#848
만족한 얼굴로 응접실을 나가는 잉글랜드 대사를 배웅한 조용한 곰은, 잠깐 고민하다 정성국을 만나기 위해 궁으로 향했고.
업무를 보던 중 잠시 쉬고 있던 모양인지 커피를 내리고 있던 정성국은 갑작스러운 조용한 곰의 방문을 반기며 일단 커피를 내어주다가, 조용한 곰이 찾아온 용건을 이야기하자 조금 놀랍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허. 이거 잉글랜드 대사의 소식통이 생각보다 대단하군.”
“예. 타국의 반발을 우려해서 일단은 조용히 철도 전문 대학교를 설립하고 동맹국에 유학생들을 배정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빨리 눈치채고 득달같이 달려와 항의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동안 타국, 특히 유럽 국가들은 북미왕국의 기술력에 놀라고 감탄하고 부러워하면서, 어떻게든 북미왕국의 학문을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북미왕국은 다른 학문은 개방했어도, 일부 학문, 특히 공학기술 계열의 학문은 건축학 정도를 제외하면 기술 유출을 우려해 철저히 북미왕국인들에게만 가르쳤고.
이에 유럽 국가들은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물론 북미왕국의 의학이나 건축학 같은 학문도 분명 중요하고 나라의 발전에도 크게 도움이 되겠지만, 북미왕국 기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학문은 기계 공학이나 전기 공학, 화학 공학 같은 학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헌데 북미왕국에서 철도 전문 대학교를 설립하고, 이 철도 전문 대학교에서 기차를 정비하고 수리할 인재를 키우기 위해 기초적인 기계 공학을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면, 그리고 이 철도 전문 대학교에서 아무리 동맹국에 한정해서라지만 유학생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알려지면, 당연히 북미왕국의 동맹이 아닌 유럽 각국은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동맹국들 사이에도 유학생 숫자로 이런저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고.
해서 북미왕국은 일이 시끄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나름 조용히 철도 전문 대학교를 설립하고, 한정된 유학생 자리를 동맹국들에 배분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작업이 모두 끝나기도 전에 잉글랜드 대사가 용케 철도 전문 대학교 설립 소식을 듣고 득달같이 항의하러 왔으니.
이는 잉글랜드 대사가 북미왕국, 정확히는 새한성에 나름의 정보망을 구축해두었다는 뜻이었기에, 정성국이나 조용한 곰 둘 다 감탄하면서도, 경각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다만, 공식적인 첩보원이나 다름없는 외교관들을 새한성에 주재시켰을 때부터, 이러한 일이 발생할 거라 여기고, 이에 대비해 안보국까지 만들어둔 만큼, 정성국은 크게 개의치 않고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빨라도 올해 말쯤에나 눈치채지 않을까 싶었더니. 그래서...잘 설득은 한 건가?”
이에 조용한 곰을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잉글랜드 대사의 눈빛을 보아하니, 이 문제를 놓고 꽤 격렬히 항의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해서 일전에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잉글랜드 대사에게 슬쩍 유구국에 유학생을 충분히 배정했다는 사실과 잉글랜드에서 유구국과 협상해 유구국에 배정한 유학생 자리를 넘겨받는다 하더라도, 일단 아국은 그냥 넘어가겠다고 이야기했고요.”
애초에 유구국에 생각보다 많은 유학생을 배치한 의도가 상황을 봐서 타국, 정확히는 잉글랜드에 유학생 자리를 넘겨주기 위함이었다.
북미왕국에서 잉글랜드를 특별히 신경 쓰는 이유는 일단 제임스 2세가 잉글랜드의 왕이 된 이후, 양국이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런던에서는 공공연히 북미왕국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말이다.
이는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친선 사절단의 대표로 북미왕국을 방문한 이후, 북미왕국의 발전상에 감탄하면서 잉글랜드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북미왕국과 우호적으로 지내야 한다고 느꼈을뿐더러, 형인 찰스 2세가 사망하고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했을 때, 정성국이 직접 잉글랜드를 방문해, 북미왕국에 우호적인 귀족들을 제임스 2세와 연결해줌으로써, 정적이라 할 수 있는 조카 몬머스 공작의 세력을 완전히 위축시키고, 잉글랜드 내부를 장악할 수 있었으니, 제임스 2세를 비롯해 그를 따르는 귀족, 관리들 태반이 북미왕국을 무척 우호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그런 만큼, 고작 철도 전문 대학교의 유학생을 허용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북미왕국에 무척 우호적인 잉글랜드를 섭섭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정성국이었다.
더불어, 북미왕국은 비공식적으로 누에바 에스파냐 혁명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멕시코인 연합회를 통해 잉글랜드의 군수 물자를 대량으로 구매하고 있었고, 잉글랜드는 멕시코인 연합회의 뒤에 북미왕국이 직접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이야 모르겠지만, 군수 물자 반입을 모른척한다는 점에서 북미왕국이 비공식적으로 누에바 에스파냐 혁명 세력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 분명했고.
헌데 이 유학생 문제로 잉글랜드와 마찰을 빚었다가 혹시라도 잉글랜드에서 멕시코인 연합회에 판매하기로 한 군수 물자의 인도 시기라도 늦춘다면, 특히, 에스파냐 본국에서 누에바 에스파냐로 지원군을 편성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누에바 에스파냐 혁명 세력이나, 그를 지지하는 북미왕국이나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으니.
해서 정성국은 조용한 곰에게 나중에 철도 전문 대학교의 일이 알려지고, 잉글랜드 대사가 찾아왔을 때, 한 번 설득을 해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유구국을 거론해, 잉글랜드에서 능력껏 유학생 자리를 확보할 수 있게 유도하라고 이야기했었고.
그렇기에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대답에 나쁘지 않다는 얼굴로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 잘 했네. 그럼 잉글랜드 대사는 곧바로 외국인 학교로 달려갔겠구만? 하하하.”
유구국은 북미왕국에 따로 대사관을 두기보다는 조선처럼 매년 사절단을 보내왔고.
올해 북미왕국을 방문한 유구국 사절단은 이미 본국으로 돌아간 후였기에, 잉글랜드 대사가 접촉해야 할 대상은 북미왕국 외국인 학교에서 공부 중인 유구국 왕실 인사였기에, 정성국이 웃으며 이를 언급하자, 조용한 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다만...”
조용한 곰이 말을 흐리며 정성국의 눈치를 살피자, 정성국은 조용한 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짐작하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여전히 우려되는 건가? 잉글랜드인을 철도 전문 대학교에 입학시키는 것이?”
처음 정성국이 상황을 봐서 안 되겠다 싶으면 꼼수로 잉글랜드에 유학생을 받아들라고 지시했을 때도, 조용한 곰은 기술 유출을 우려해 조심스럽게 반대했었다.
다만,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잉글랜드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북미왕국에 이득이 될 거라는 정성국의 설득에 결국 수긍했었고.
헌데, 막상 잉글랜드가 유구국과 협상해 유학생을 보낼 것이 확실해지자, 조용한 곰은 다시 기술 유출을 우려하는 모양이라 정성국이 이를 묻자, 조용한 곰은 약간 경직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잉글랜드 대사의 반응을 보니, 아국의 철도 기술을 몹시 탐을 내는 것이 적나라하게 보이는터라...잘못하면 아국의 철도 기술이 잉글랜드에 그냥 넘어갈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에 정성국은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괜찮아. 물론 기초적인 지식 정도야 확보할 수 있겠지만, 단순히 그뿐일세. 그 정도의 지식이야 이미 철도를 운용하고 있는 조선 역시 확보한 상태이지만,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기관차를 생산할 수 있나? 아니지 않은가.”
조선은 철도를 부설한 이후, 더 많은 기관차를 수입하길 원했지만, 당장 북미왕국 역시 기관차를 계속 늘려야 했기에, 조선이 원하는 충분한 양의 기관차를 판매하지는 못했고.
이 때문에 조선은 자체적으로 기관차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었지만, 북미왕국과 교류한 이후 조선의 기술력이 이전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기관차를 만들어낼 정도는 아니었던 터라, 아직까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정성국이 이를 거론하며, 잉글랜드 역시 조선처럼 당장 기관차를 자체 생산하는 것은 무리라고 이야기하자, 조용한 곰은 잉글랜드와 조선은 다름을 역설했다.
“그렇기야 하지요. 허나 잉글랜드는 결국 자체적으로 증기기관 기술을 발전시켰고, 증기선뿐만 아니라 조악해서 제대로 써먹긴 어렵다고 판단되지만, 기관차까지 개발했습니다. 허니 조선과는 상황이 조금 다르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무척 조악한 편이지만,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기관차를 만들어내긴 했다.
그런 만큼, 조용한 곰은 잉글랜드는 조선보다 기술 수준이 높다고 평가했고, 그렇기에 철도 전문 대학교에 유학생을 보내 기초적인 기계 공학의 지식이라던가, 기관차의 구조 같은 지식을 얻게 되면, 충분히 쓸만한 기관차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보았고.
해서 조용한 곰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정성국은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래 봐야 한계는 명확하네. 그리고 잉글랜드인 유학생이 철도 전문 대학교에서 철도 공학을 배우고 자국으로 복귀할 때쯤이면, 기차 생산 공방의 확장과 추가 공방 건설이 끝나 한창 기관차를 대량으로 생산할 시기 아닌가.”
“예? 설마 잉글랜드에도 기관차를 판매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야지. 솔직히 잉글랜드의 지하자원 태반을 수입하는 아국으로서는 잉글랜드에 철도가 부설되면 나쁠 것 없지 않나.”
잉글랜드에도 기관차를 판매하겠다는 말에 기겁했던 조용한 곰은 정성국의 말에 무척이나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정성국의 말처럼 잉글랜드에 철도가 부설된다면, 잉글랜드의 광산에 투자한 북미왕국 입장에서는 이득이긴 했다.
다만, 기관차의 구조 같은 지식을 가르쳐주고, 여기에 실물까지 판매한다면, 잉글랜드는 분명 자력으로 제대로 된 기관차를 만들어낼 것이 뻔해 보였고.
해서 조용한 곰은 잉글랜드에 기관차를 판매하는 것만큼은 막아야겠다는 생각에 정성국에게 말했다.
“그렇기야 하지요. 철도가 부설되면 수송 비용을 낮출 수 있으니 말입니다. 다만, 잉글랜드에 아국의 기관차를 판매한다면, 저들이 기관차 제작 기술을 완전히 습득할 것 같습니다만...”
“기관차를 분해해서 말이지?”
정성국의 물음에 조용한 곰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성국은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뭐 동맹국들은 안 그럴 것 같나? 조선조차 기관차 제작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장인들을 통해 아국에서 파견한 기술자들에게 은근슬쩍 접근하고 있는 판에? 아마 우리가 조선철도공사를 조선에 넘겨주는 순간 조선도 기관차를 분해하려 들걸?”
“으음...”
조용한 곰 역시 조선철도공사에 소속된 기술자들에게 조선 장인들이 접근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만, 조선에서 노골적으로 기술자들에게 기술을 빼내려 했다면야 조선에 이를 경고했겠지만, 조선은 그저 기술자들과 장인들끼리 식사나 술자리를 통해 개인적인 친분을 쌓게 하고, 식사자리나 술자리에서 대화를 통해 기관차와 관련된 지식이나 정비에 대한 경험 등을 물어보는 등, 나름대로 선을 지키고 있었기에, 그냥 모른 척할 뿐이었고.
그런 만큼 조용한 곰은 조선을 비롯한 동맹국들이 기관차를 분해해서라도 기관차 제작 기술을 확보하려 할 거라는 정성국의 말에 그저 신음을 흘릴 뿐이었고, 그런 조용한 곰의 반응에 정성국이 다시 입을 열었다.
“뭐 처음부터 타국에 철도를 부설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조선에 이어 시베리아 부족 연합에도 철도를 부설하기 시작한 만큼, 그리고 이후엔 동맹국에도 철도를 부설하기로 한 만큼, 기술이 일부 흘러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어. 그러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그렇습니까...”
생각해보면 정성국은 기술 유출을 무척 경계하는 편이었는데, 이번에는 의외로 관대한 모양새를 보였기에, 이 점이 내심 의아했던 조용한 곰은, 동맹국에 철도를 부설하기 시작한 이상 기술 유출을 현실적으로 막을 순 없으니, 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말에 힘없이 수긍했고.
이러한 조용한 곰의 반응에 정성국이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어차피 다른 나라에 판매하는 기관차들 역시 조선처럼 초창기 기관차를 넘겨줄 생각이니...그걸 분해하고 분석한다고 해서 무언가를 크게 얻지는 못할 거야. 저들이 자체적으로 기관차를 생산하지 못하는 건 설계문제라기보다는 강철의 품질 문제와 금속 가공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이걸 단기간에 해결하긴 어렵거든.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물론 시간이 흐른다면 해결될 문제이기는 했다.
다만, 저들이 열심히 노력해 겨우 북미왕국의 초창기 기관차와 비슷한 성능의 기관차를 만드는 것에 성공했을 때, 북미왕국에서는 그보다 수십 배나 뛰어난 기관차가 달릴 테니 기초적인 기술이 유출된다고 너무 우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정성국이었다.
거기에 북미왕국은 타국과 활발히 교역하고 있었고, 북미왕국의 발전에 필요한 자원 중 상당수를 타국에서 수입하고 있는 만큼, 타국에 철도가 부설되면 그만큼 북미왕국에도 이득이 될 것으로 보았고.
해서 정성국은 일단 동맹국들과 최근 북미왕국에 무척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며 북미왕국의 대외 정책에 협조적인 잉글랜드에 혜택을 줄 생각을 한 것이고, 그렇기에 정성국이 앞으로의 일을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단언하자, 조용한 곰은 자신만만한 시선을 보내는 정성국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