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0
갑작스럽게 약속을 잡고, 잉글랜드 대사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후 딱딱한 표정으로 대사관을 나서는 에스파냐 대사를 입구까지 배웅한 잉글랜드 대사의 보좌관은 에스파냐 대사가 대사관을 떠나자 곧바로 응접실로 발걸음을 옮겼고.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홀로 커피를 홀짝이고 있던 잉글랜드 대사는 보좌관의 발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들어 보좌관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에스파냐 대사는 떠났나?”
“그렇습니다. 대사님. 헌데...”
보좌관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잉글랜드 대사를 바라보자, 잉글랜드 대사는 보좌관이 무엇을 궁금해하는지를 깨닫고 살짝 웃으며 말했다.
“에스파냐 대사가 갑자기 왜 찾아왔느냐고?”
“예.”
“우리 잉글랜드의 상인들이 누에바 에스파냐의 반란군들에게 군수 물자를 지원하는 멕시코인 연합회와 거래하지 못하도록 단속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찾아왔더군.”
이에 보좌관은 화들짝 놀라며 중얼거렸다.
“헉! 에스파냐에서 그 사실을 어떻게...”
멕시코인 연합회가 잉글랜드의 상인인 스티브와 접촉해 머스킷과 화약의 대량 구매 의사를 밝히자, 스티브는 일단 판매 협상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새한성에 있는 잉글랜드 대사관에 연락을 취했다.
스티브가 여러 가지 품목을 취급하는 상인이라 머스킷과 화약도 거래하긴 했지만, 멕시코인 연합회에서 요구하는 2만 자루의 머스킷과 30톤에 달하는 화약은 그로서도 쉬이 구하기 어려울 정도도 막대한 양이었을뿐더러, 설사 어떻게 이 막대한 물량을 구하더라도, 이를 아무 생각 없이 멕시코인 연합회에 넘겼다가는 훗날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일단, 북미왕국은 몇몇 물품들을 수입 금지 품목으로 정하고, 북미왕국과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고 교류하는 나라들에게 이 수입 금지 품목을 북미왕국의 개인이나 단체에 판매하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이 수입 금지 품목에 화약 무기가 들어간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스티브로서는 머스킷과 화약을 멕시코인 연합회에 넘겼다가, 훗날 북미왕국에서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멕시코인 연합회는 이 군수 물자들을 에스파냐의 압제에 시달리는 누에바 에스파냐인들에게 넘긴다고 말했지만, 스티브로서는 이들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만약 멕시코인 연합회가 자신이 거래한 군수 물자를 이용해 북미왕국에서 문제를 일으키기라도 한다면 그 뒷일을 과연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달까.
마지막으로 멕시코인 연합회에서 정말 군수 물자를 누에바 에스파냐인들에게 넘긴다 하더라도, 이는 누에바 에스파냐의 반란을 부추기는 꼴이다 보니, 훗날 에스파냐가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었고 말이다.
이렇게 걸리는 점이 많다 보니, 스티브로서는 멕시코인 연합회와 거래하면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 있음에도, 일단 잉글랜드 대사관에 연락해 이번 거래를 진행해도 되는지 연락했고.
이에 잉글랜드 대사는 보좌관과 상의한 끝에, 스티브에게 멕시코인 연합회와 거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단 잉글랜드 대사는 북미왕국이 이번 누에바 에스파냐 문제에서 에스파냐 편이 아니라 누에바 에스파냐 주민들의 편을 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언론이 저렇게 누에바 에스파냐의 식민지 정부뿐만 아니라 에스파냐까지 비판하기는 어려웠으니까.
그러니 스티브가 누에바 에스파냐 주민들을 돕기 위해 군수 물자를 넘기더라도, 북미왕국에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리라 판단했고.
누에바 에스파냐 주민들의 봉기가 성공한다면, 에스파냐는 자금줄인 누에바 에스파냐를 잃을 테고, 그러면 에스파냐는 흔들릴 테니, 이들의 항의 따위는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를 기회로 쿠바 섬을 노리는 것도 괜찮아 보였달까.
해서 잉글랜드 대사는 연락해 온 스티브에게 자신이 도울 테니 바로 멕시코인 연합회와 계약을 체결하라고 재촉했고, 결국 계약이 체결되면서 잉글랜드의 군수 물자 일부가 스티브를 통해 멕시코인 연합회에 넘어갔고, 또 넘어갈 예정이었다.
헌데 에스파냐 대사가 찾아와 이 문제를 거론했다고 하니, 보좌관은 기겁했고, 그런 보좌관의 반응에 잉글랜드 대사가 손을 내저었다.
“아. 오해하지 말게. 에스파냐에서 우리가 스티브를 내세워 멕시코인 연합회와 거래한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은 아니니까.”
“예? 그럼...”
“이번에 누에바 에스파냐의 혁명군이 식민지 정부의 토벌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잖나. 그러면서 혁명군이 머스킷으로 무장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북미왕국에서는 머스킷을 생산하지 않으니, 멕시코인 연합회가 유럽 상인과 접촉해 머스킷을 구했다는 결론이 나오고.”
“아...그럼 그냥 찔러본 건가요?”
이에 잉글랜드 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네. 다만, 나와 대화하면서, 우리가 개입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눈치챈 것 같기는 한데...”
“헉! 그럼 큰일 아닙니까?”
보좌관이 잉글랜드 대사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짓자 잉글랜드 대사가 콧방귀를 뀌었다.
“큰일은 무슨. 지금 에스파냐가 우리를 압박할 여력이 있을 것 같나?”
“아. 그건 그렇겠군요.”
잉글랜드 대사의 말대로 에스파냐는 당장 발밑의 불부터 꺼야 할 상황이라 잉글랜드를 압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보좌관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잉글랜드 대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보다 에스파냐 대사가 꽤 조급해하는 것을 보니, 누에바 에스파냐의 상황이 무척 좋지 않은 것 같더군. 그러니, 더 많은 군수 물자를 넘기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음...허면?”
“그래. 자메이카 총독부와 바하마 총독부에 연락해서, 일단 그곳의 군수 물자들의 일부를 스티브에게 넘기도록 하지.”
잉글랜드 대사가 씩 웃으며 이렇게 명령을 내리자 보좌관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연락을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멕시코인 연합회에 더 많은 군수 물자를 판매할 의사가 있다고 알리게.”
“예?! 더 많은 군수 물자를요?!”
이미 계약한 것만 해도 머스킷 2만 자루인데, 여기서 더 판매할 거냐는 시선을 보내는 보좌관을 보고 잉글랜드 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금 광고를 통해 막대한 기부금을 확보한 덕분에 멕시코인 연합회는 군수 물자를 더 사들일 여력이 있을 거야. 그리고 이들은 군수 물자를 비싸게 사들이고 있고. 그럼 이 기회에 최대한 많은 돈을 확보해야 하지 않겠나.”
“으음...알겠습니다. 스티브에게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 * *
“그래. 저들이 뭐라고 답하던가.”
이서빈은 항복을 권하기 위해 백기를 들고 과나후아토 인근 요새를 방문한 전령이 진영으로 복귀하자 곧바로 질문을 던졌고.
“그게...끝까지 항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답니다.”
전령의 대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허. 독하네. 정말.”
이에 이서빈 뒤에 있던 부관이 이서빈의 중얼거림에 동의한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미 물자는 대부분 소모한 상태이고, 믿었던 멕시코시티의 지원군 역시 저희 혁명군에 의해 박살 나서 당분간은 자신들을 도울 이들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을 텐데도, 항복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버틸 줄은...”
“끙.”
원래 요새는 방어를 위해 세우는 만큼, 충분한 물자를 비축해 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다만, 과나후아토 인근 요새의 경우는, 오랜 평화로 인해 비축된 물자가 많지 않았다.
그나마 공격받을 가능성이 있는 해안가 인근의 요새와는 달리, 과나후아토 인근 요새는 내륙에 있다 보니, 어지간하면 공격받을 일이 없었고.
그러니 과나후아토 인근 요새의 역대 사령관들은 만약을 대비해 철저히 물자를 비축하기보다는, 물자를 조금씩 빼돌리면서 뒷돈을 챙겨왔기에, 장부상으로는 반년 치의 물자가 비축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 반도 안 되는 2개월 치의 물자만이 비축되어 있었고.
여기에 과나후아토에서 살다가 혁명이 발생하자 분노한 과나후아토 주민들을 피해 도망친 에스파냐인들이 모두 요새로 피신하면서, 요새에서 수용할 수 있는 한계 인원보다 많은 이들이 요새에서 머물렀기에, 많지 않은 물자는 빠르게 소모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포로로 잡은 식민지 정부의 관리나, 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요새를 드나들었던 과나후아토 주민을 통해 알게 된 이서빈은, 중부 토벌군을 완벽하게 섬멸한 후, 그 기세를 몰아 요새를 공격하자는 과나후아토 혁명 세력의 주장을 일축하고, 요새를 물샐틈없이 포위한 후, 물자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물론, 과나후아토 혁명 세력은 장기전을 택한 이서빈의 결정에 탐탁지 않은 눈치였다.
그동안 누에바 에스파냐는 비교적 평온했고, 이 때문에 식민지 정부는 병력을 조금씩 감축해왔다.
해서 혁명이 시작되기 직전 누에바 에스파냐에 배치된 에스파냐군은 2만 명이 채 되지 않았고, 과나후아토에서 처음 혁명이 시작된 이후, 식민지 정부에 반감을 품은 주민들이 과나후아토를 따라 혁명을 일으키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치안을 유지하는 에스파냐군의 제거였고.
덕분에 멕시코시티를 기준으로 북서부 지역에 배치된 에스파냐군들은 시작부터 전선에서 이탈한 셈이었다.
여기에 이번 일로 중부 토벌군 4천 명 역시 전선에서 이탈해버렸고 말이다.
그러니 현재 식민지 정부의 통제하에 있는 병력은 1만 명 정도에 불과한데, 자신들이 중부 토벌군을 격파했다는 소식이 누에바 에스파냐 전역에 알려진다면, 당연히 지금은 식민지 정부의 통치 아래에 있는 누에바 에스파냐 남동부 지역의 주민들도 동요할 것이 분명하니, 식민지 정부로서는 남동부 지역의 안정을 위해 이 지역에 배치된 병력을 섣불리 움직이기는 어려워 보였고.
그런 만큼 과나후아토 혁명 세력은 지금이 식민지 정부를 거세게 몰아붙일 적기라고 판단했는데, 이서빈은 고작 조그마한 과나후아토 인근 요새를 피해 없이 점령하겠다고 장기전을 택했으니, 탐탁지 않을 수밖에.
하지만, 당장 과달라하라 혁명군조차 이곳으로 진군하면서 머스킷을 다루는 법을 대충 훈련받은 것이 전부였고, 과나후아토 혁명군의 경우는 머스킷을 다루는 법도 몰랐기에, 이들을 제대로 훈련시킬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이서빈이었고.
여기에 북미왕국에서 추가로 군수 물자를 지원해주기로 한 만큼, 시간이 흐른다고 혁명군에 마냥 불리하지 않으리라는 계산도 섰다.
또한, 에스파냐 본국에서 식민지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즉각 지원군을 파견한다 해도, 이들은 결국 에스파냐의 선박을 이용해 대서양을 횡단해야 할 테니, 지원군이 누에바 에스파냐에 도착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터라, 장기전을 통해 과나후아토 인근 요새의 항복을 받아낸 후 움직이더라도, 에스파냐 지원군이 누에바 에스파냐 땅을 밟을 것 같지는 않았고 말이다.
해서 이서빈은 이를 바탕으로 과나후아토 혁명 세력을 설득했고, 과나후아토의 사령관인 리카르도가 이서빈의 의견을 받아들이면서, 과나후아토 혁명 세력은 병력을 동원해 과나후아토 인근 요새를 물샐틈없이 포위했고.
시간이 흘러 혁명군들의 훈련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고, 망원경을 통해 요새 안을 살핀 결과 요새의 식량 사정이 많이 악화된 것 같았기에, 슬슬 요새에 틀어박힌 에스파냐인들의 항복을 받아내 과나후아토의 안전을 확보하고, 이서빈은 혁명군과 함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겠다고 판단해 전령을 보냈다.
헌데, 요새에 틀어박힌 에스파냐인들이 결사 항전할 뜻을 밝혔으니 이서빈은 골치가 아프다는 얼굴로 요새를 바라보았고.
그때, 에스파냐인들에게 항복을 권하는 전령을 보냈다는 소식에 이서빈을 만나러 왔던 리카르도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냥 요새를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리카르도의 의견에 이서빈은 표정을 찌푸리며 요새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수만 믿고 공격하기엔 피해가 너무 클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서빈이 적극적으로 요새를 공격하지 않은 것은, 과나후아토 인근 요새의 시설이 생각보다 견고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화포도 20문가량 있었다.
물론 저 요새에 작열탄은 없었지만, 산탄의 일종으로 쪽수를 앞세워 덤벼드는 적을 쓸어버릴 포도탄은 있다고 하니, 그냥 수를 앞세워 요새를 공격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해서 이서빈이 고개를 젓자, 리카르도가 목소리를 높였다.
“저도 압니다. 저 요새를 함락하기 위해 많은 피를 흘릴 수 있다는 것은. 하지만, 혁명군의 훈련은 이미 끝났고, 토벌군이 박살 난 이후 식민지 정부는 잔뜩 움츠러든 상태입니다. 더불어 저들은 우리가 멕시코시티로 진군할 것을 우려해 멕시코시티의 방어에만 열을 올리고 있지요. 그러니 이를 기회로 멕시코시티를 제외한 멕시코 남서부 지역의 에스파냐군을 각개격파해, 하루라도 빨리 혁명 세력의 영역을 넓혀야 하는데, 고작 저 요새 때문에 이곳에 붙잡혀 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런 리카르도의 반응에 이서빈은 고심했다.
에스파냐인들이 지금이야 악에 받쳐서 결사 항전하겠다고 주장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물자가 떨어져 굶주리기 시작하면,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탓이다.
해서 이서빈이 리카르도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흐음...그래도 그냥 공격하는 것은 피해가 너무 커요. 그러니 기왕 기다린 것. 딱 1주일만 더 기다려 봅시다.”
이에 리카르도는 강렬한 눈빛으로 이서빈을 바라보았지만, 이서빈은 위축되지 않고, 자신을 믿어달라는 얼굴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고.
그렇게 이서빈과 리카르도 주변은 적막만이 감돌았다.
그리고 잠시 후, 리카르도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이서빈의 계획대로 움직인 덕분에 중부 토벌군을 섬멸시킬 수 있었던 터라, 한 번 더 믿어보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휴우. 알겠습니다. 대신 1주일이 지나면...”
“예. 그땐 과나후아토 사령관님의 의견을 따르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