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8
정성국은 엄청난 숫자의 보고서 더미를 들고 낑낑대며 집무실로 들어오는 관리청장의 모습에 당황했다.
관리청에서 저런 엄청난 숫자의 보고서가 올라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관리청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들은 태반이 예산이나 인사 문제와 관련되었기에, 정성국은 최대한 우선해서 처리하는 편이었으니, 보고서가 밀린 것도 아닐 테고 말이다.
해서 정성국은 집무실 책상 위에 보고서 더미를 겨우 내려놓고 크게 숨을 들이쉬고 있는 관리청장을 보고 이게 무슨 보고서냐는 시선을 보냈고.
이에 관리청장은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청장들이 넘겨준 훈장 수여 후보자들의 명단과 그에 관련된 서류들입니다.”
“뭐?! 이 두툼한 보고서들이 전부 훈장 수여 후보자 명단이라고?”
“그렇습니다. 전하.”
정성국이 직접 상훈 제도를 전생과 비슷한 방식으로 개편하고 나서, 청장들에게 훈장을 수여 받을만한 공을 세운 이들을 살펴 보고하라고 명령을 내렸었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이러한 보고서가 올라올 만했다.
물론, 청장들이 개별적으로 정성국에게 보고서를 올린 것이 아니라, 관리청장이 다 가져온 것이 조금 의아하기는 한데, 어차피 관리청은 재정적인 문제와 인사 문제를 담당하는 관청이었기에, 예전부터 관리들의 포상 문제는 각 청에서 관리청과 논의해 처리하기도 했고, 이번 상훈 제도의 개편 업무 역시 관리청에서 진행한 만큼, 각 청에서 일단 관리청에 보고서를 넘기고 관리청에서 다시 확인한 후에 보고한 거구나 싶었고.
다만, 아무리 모든 기관의 보고서가 함께 올라왔다고 해도, 보고서의 양이 너무 많은 것 같았기에, 정성국은 관리청장의 대답에 기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관리청장이 책상 위에 올려놓은 보고서 더미의 가장 맨 위에 놓인 두꺼운 보고서를 펼쳐 내용을 빠르게 훑어보았고, 앞의 몇 장은 훈장 수여 후보자들의 명단이, 그리고 나머지는 훈장 수여 후보자들이 세운 공적이 적혀 있었기에, 정성국이 몇 장을 넘기다 내려놓으며 감탄사를 토해냈다.
“휘유. 뭐 다른 나라에 비하면야 신생국이기는 해도, 북미왕국이 건국된 지도 꽤 되었을뿐더러, 건국 이후 내가 기억할 정도로 큰 공을 세운 이들이 꽤 많은 편이라, 훈장을 수여 받을 이들이 꽤 많으리라 짐작하긴 했었지만...이건 내 예상보다도 많은데?”
정성국은 훈장을 남발하면 훈장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훈장을 수여해 수여자에게 큰 명예를 주겠다는 정성국의 의도가 틀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정성국은 엄격한 기준을 세워 훈장을 수여함으로써 훈장의 가치를 높게 유지하려 했고, 이를 청장들에게도 따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다만, 정성국이 상훈 제도를 개편하고, 건국 훈장을 만들어 북미왕국의 건국에 공을 세운 이에게 건국 훈장을 수여하겠다고 밝힌 이후, 청장들 역시 북미왕국이 건국된 이후부터 북미왕국의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이들을 훈장 수여 후보자로 생각했고, 정성국 역시 이를 알면서도 막지 않았기에 정성국은 생각보다 훈장을 받을 만한 이들이 많겠구나 예상했다.
거기에 북미왕국이 아시아나 유럽의 나라들에 비하면야 비교적 최근에 건국된 신생국이지만 이미 건국된 지도 22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만큼, 그리고 그렇게 강산이 2번이나 바뀔 동안 여러 나라와 전쟁도 치르고, 북미 대륙 전역을 개발해 다른 나라들이 경이로워할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기까지, 큰 공을 세운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그러나 책상 위에 수북이 쌓여있는 보고서 더미를 보니 정성국이 막연히 예상한 수보다 훨씬 많아 보였기에, 정성국으로서는 꽤나 놀랄 수밖에 없었고.
해서 정성국은 책상 위의 보고서 더미에 손을 얹으며 관리청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훈장 수여 후보자가 총 몇 명인가?”
“다 합치면 7500명이 조금 넘습니다.”
“7500명이라...”
관리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보고서 더미를 보고 많을 거라 짐작은 했지만, 훈장 수여 후보자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훈장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기준을 올려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에.
특히, 전생의 대한민국이 한 해에 2만 개 정도의 훈장을 수여했는데, 북미왕국과 대한민국의 인구 비율을 생각해보면, 훈장을 남발하던 대한민국보다 많은 셈이니.
다만, 북미왕국의 경우 상훈 제도를 개편하면서 북미왕국이 건국된 이후 공을 세운 이들을 후보자로 삼았기에, 자세히 따지고 보면 22년간 7500명이라는 소리고, 이는 연간 약 340명 수준에 불과하니, 이 정도면 남발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정성국은 굳이 기준을 건드릴 필요는 없겠다 판단했고.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자, 정성국은 눈앞에 보이는 보고서 더미를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어휴. 이걸 어느 세월에 다 확인하나.”
이에 관리청장이 빙긋 웃으며 정성국에게 말을 건넸다.
“물론 후보자의 수가 많긴 한데, 확인이야 금방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음?”
“그게...이전부터 공을 세운 이들은 따로 포상을 내리면서 관리청에서 그와 관련된 기록들을 보관해오지 않았습니까. 거기서 훈장을 수여할 만한 공을 세운 이들을 선발한 것이 이 훈장 수여 후보자 명단이라서 말입니다.”
관리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눈을 빛냈다.
관리청장의 말대로라면 정성국은 크게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정성국이 이 보고서 더미를 보고 바로 한숨을 내쉰 것은 이를 하나씩 확인하면서 훈장 수여 후보자가 정말로 합당한 공적을 세웠는지, 그리고 그 공적은 어느 정도인지를 따져야 했는데, 이미 예전에 공을 세운 이들은 정성국이 따로 포상을 내리면서, 그러한 과정을 다 거쳤던 만큼, 정성국이 따로 보고서를 붙잡고 끙끙댈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해서 정성국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아. 그래? 그럼 대충 훑어보고 그대로 결재해도 크게 문제는 없겠군.”
정성국의 중얼거림을 들은 관리청장은 조금 난감한 얼굴로, 그래도 서류만큼은 제대로 확인해주십사 부탁했고.
정성국은 관리청장의 부탁을 못들은 체하며 말했다.
“다만, 어지간하면 훈장 수여자들과 그 가족들을 궁으로 초대해 잠깐 대화도 나누고, 직접 훈장을 수여해줄까 싶었는데, 대상자가 7500명에 달한다면 그건 조금 어렵겠군. 아무리 일정을 조절한다고 해도...”
“어? 그거 정말 좋은 생각 같습니다. 물론, 전하께서는 국정을 돌보느라 바쁘시니만큼 모든 훈장 수여자들을 궁으로 초대하고, 직접 훈장을 수여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일부는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일부라...그럼 역시 1등급 훈장 수여자들을 초대해야겠지?”
정성국의 말에 관리청장이 당연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2등급 훈장부터는 청장들이나 지방청장, 기관장들이 수여하면 될 테니까요. 다만, 건국 훈장 같은 경우에는 등급에 상관없이 전하께서 직접 훈장을 수여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다른 훈장과는 달리 건국 훈장의 경우는 나라를 건국하는 데 공을 세운 이들에게 수여하는 훈장이니만큼, 훈장의 등급이 낮더라도 청장들이 건국 훈장을 수여하기보다는 정성국이 직접 건국 훈장을 수여하는 것이 모양새가 좋았기에, 정성국은 관리청장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아. 그건 그렇군. 그럼 일정을 조금 넉넉하게 잡아야겠는데?”
7500명 전부가 1등급 훈장 수여자는 아니겠지만, 이 명단에 없는, 정성국이 직접 선발한 건국 훈장 수여자만 하더라도 그 수가 꽤 되었기에, 정성국은 일정을 조절해, 한 일주일 정도에 걸쳐 몇 시간씩 훈장을 수여하는 데 시간을 내야겠다고 말하자, 관리청장이 입을 열었다.
“오.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요. 그러면 며칠 동안 언론에서 훈장과 관련된 내용을 계속해서 보도할 테고, 그럼 북미왕국의 백성들은 훈장에 대해서 빠삭해질 테니 말입니다.”
“하하하.”
정성국은 북미왕국에서 살아있는 신에 가까운 만큼, 북미왕국 언론들 역시 정성국이 외무 활동을 할 때마다, 어떻게든 정성국을 취재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니 정성국이 직접 훈장을 수여하는 행사를 연다면, 당연히 북미왕국 언론들은 모두 집결할 것이 분명했고.
여기에 일주일 가까이 훈장 수여식을 진행한다면, 일주일 내내 언론에서 이 일에 대해 떠들 것이 분명했기에, 정성국은 관리청장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정성국의 웃음이 잦아들 때쯤, 관리청장이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정성국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전하. 건국 훈장 수여자는 총 몇 명입니까?”
건국 훈장의 경우 정성국이 직접 훈장 수여 대상자를 선발했기에, 관리청장이 질문을 던지자, 정성국이 대답했다.
“아. 건국 훈장 수여자 말인가? 총 462명일세.”
“허어. 건국 훈장을 3등급으로 나누었을 때 짐작은 했지만, 생각외로 수여자가 많은 모양이군요.”
“뭐 북미왕국을 건국하는 데, 많은 이들이 힘을 보탰으니 당연한 거겠지. 다만 건국 훈장 수여자 가운데 조선인들이 있어서 그 부분이 조금 고민일세.”
정성국이 표정을 찌푸리며 이렇게 이야기하자 관리청장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건국 훈장은 훈장 가운데 최고의 훈장이 될 텐데, 조선인에게 건국 훈장을 수여한다고 하니 당활할 수밖에.
“예? 조선인에게 건국 훈장을요? 아. 설마 원상 소속의?”
다만, 정성국이 왜 조선인에게 건국 훈장을 수여하려 하는지를 깨닫고 관리청장이 원상을 입에 올리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북미왕국의 건국에 원상의 지분이 무척 크질 않나. 해서 원상의 대방에게는 1등급 건국 훈장을, 그리고 북미왕국을 위해 조선 팔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조선 유민들을 북미 대륙으로 이주시키는 데 애를 쓴 도방과 행수들에게는 2, 3등급 건국 훈장을 수여하는 게 맞겠다 싶어서 말이지.”
“하긴...”
정성국의 말처럼 원상은 북미왕국의 건국에 큰 지분이 있었다.
물론 당시엔 원상 자체가 정성국의 상단이었으니 북미왕국의 건국에 원상의 지분이 큰 것은 당연하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원상의 행수 급들 정도만 되어도 정성국이 조선을 떠나 북미 대륙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리라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이를 밀고하기보단 정성국이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인생을 바칠 정도였으니.
해서 관리청장은 정성국이 이들에게 2, 3등급 건국 훈장을 수여한다고 이야기했을 때, 그게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관리청장의 반응에 정성국이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원상 소속은 아니지만, 별다른 잡음 없이 개척촌을 운영하면서 북미왕국의 건국을 돕고, 북미왕국의 뼈대라 할 수 있는 헌법을 제정하는 일을 맡은 백호 어르신도 있지 않나.”
정성국이 현재는 개항장 인근에서 지내고 있는 윤휴를 언급하자, 관리청장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죠. 백호 어르신은 당연히 1등급 건국 훈장을 받아야지요. 암요.”
“하하하. 그렇지. 그리고 의제 형도 개척촌을 운영하면서 북미왕국의 건국에 힘을 보탰으니, 3등급 건국 훈장은 받을 만 해 보이고. 헌데, 문제는 이들이 조선인이다 보니, 공식적으로 건국 훈장을 수여하면...”
“조선에서는 난리가 나겠군요.”
관리청장의 말에 정성국이 꽤나 난감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해서 고민이야. 조선과의 관계가 꽤 괜찮은 만큼, 공식적으로 이들을 초청해 건국 훈장을 수여하고, 이 기회에 제대로 된 진실을 밝힐지, 아니면 비공식적으로 수여하고 예정대로 북미왕국이 건국된 지 100년 후에 진실을 밝힐지 말이지.”
그동안은 조선과의 관계 때문에 적당히 조작한 내용을 역사 교과서에 실었지만, 이렇게 조작한 역사를 계속해서 아이들에게 가르칠 생각은 없는 정성국이었다.
다만, 우연히 북미 대륙을 발견해 그대로 눌러앉은 것이 아니라, 북미 대륙을 발견한 뒤에서 조선에 돌아와, 아예 이주할 작정으로 사람과 물자를 가득 실어 북미 대륙으로 이주했고, 그 후로도 원상을 통해 물자와 조선의 유민들을 계속 보냈다는 진실을 밝힌다면, 북미왕국도, 조선도 여러모로 시끄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정성국은 전생에서 시간이 흐른 후 기밀 서류가 민간에 공개되는 것처럼, 100년 후에 이를 공개하라고 이야기했었다.
다만, 현재 조선과의 관계도 괜찮을뿐더러, 조선이 동만주를 확보하고, 북미왕국이 조선의 동만주 개척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만큼, 100년 후라면 조선은 동만주까지 완벽히 손에 넣어 동아시아에서 나름 콧방귀를 뀔 정도로 국력이 커질 것 같은데, 이때 진실을 밝히면, 당사자들이 대부분 사망한 시점이라 하더라도 일이 커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고.
해서 정성국이 이번 건국 훈장을 계기로 진실을 밝힐까 싶어 슬쩍 관리청장에게 이를 이야기하자, 관리청장은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가, 곧 정성국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음. 그 부분은 저보다는 외무청장인 조용한 곰과 상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생각하기엔, 비공식적으로 수여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나?”
“예. 물론 현 조선의 상황에서 모든 사실이 밝혀진다고 저희를 배척하긴 어려울 겁니다. 저희의 도움 없이는 만주를 제대로 개발하기도 어렵고, 또, 바로 옆에 예전만은 못하지만 강대한 청나라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원상이나 백호 어르신에게는 피해가 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정성국 역시 이 부분이 마음에 걸렸었다.
다만, 정성국은 조선의 분위기가 조금 바뀐 만큼, 괜찮지 않을까 싶었지만, 관리청장이 진실이 알려지면 그동안 조선 조정에 거짓말을 해온 원상이나, 북미왕국을 도운 윤휴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고 지적하자, 정성국은 비공식적으로 건국 훈장을 수여하는 것이 훈장을 수여 받는 조선인들에게도, 조선에게도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을 정했다.
“음...역시 그럴려나. 알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