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835화 (835/850)

#835

교육청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꼼꼼하게 살핀 정성국은 보고서에 결재한 후, 잠깐 휴식을 취할 겸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다가갔고.

냉장고를 열어 정성국의 명령으로 왕실 숙수가 만든 과즙 음료가 담긴 유리병들 가운데, 보랏빛이 감도는 유리병을 꺼내 티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빈 찻잔에 조금 따라 음미한 후 중얼거렸다.

“흠. 이번 것은 생각보다 맛이 괜찮네. 이 정도면 예전 포도 주스 맛과 흡사하니...슬슬 제품으로 만들어 팔아도 될 것 같은데?”

정성국은 북미왕국을 건국한 이후, 정책적으로 계속해서 논밭을 늘려왔고, 덕분에 북미왕국에는 식량을 비롯해 수많은 작물이 어마어마하게 생산되고 있었다.

북미왕국에서 자체적으로 소모하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물론, 그렇게 식량이 남아돈다고 해도 크게 문제는 없었다.

식량이 부족한 다른 나라에 판매하거나, 가축의 사료로 사용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는 다른 상품 작물들도 비슷한 상황이었고.

다만, 채소나 과일의 경우는 조금 문제였다.

둘 다 장기보관하는 것이 어려웠기에, 타국에 판매할 수가 없어, 어떻게든 생산량을 조절하거나, 아니면 수요량을 늘려야 했달까.

다만, 생산량을 조절한다 해도, 개간한 밭을 그냥 내버려 둘 수야 없으니, 결국 다른 작물을 심어야 하는데, 식량을 심기엔 북미왕국의 중재로 유럽의 정세가 안정되면서 자연히 유럽 내 식량 생산이 늘어날 것으로 예측되는 터라 불가능했고 다른 작물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러다 보니 북미왕국에서는 어떻게든 채소나 과일의 수요량을 늘리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고.

다행히 북미왕국은 그나마 보관 기관을 늘릴 수 있는 통조림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다양한 채소, 과일 통조림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통조림은 알루미늄의 가격 문제로 북미왕국 내에서만 유통되다 보니, 판매량은 많지 않았다.

시장에 가면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살 수 있는데 굳이 통조림을 살 이유가 없지 않은가.

물론 편하게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과일 같은 경우는 이를 이용해 다양한 술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었지만, 북미왕국의 경우 음주로 인해 사고가 발생하면 가중 처벌받다 보니, 술 소비량이 얼마 되지 않은 터라, 한계가 명확했고.

해서 북미왕국의 관리들이나 농업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이 문제로 꽤나 고심하고 있었고,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정성국은 전생의 과일 주스를 떠올렸다.

현재 북미왕국의 음료 시장은 오로지 커피뿐이지만, 이걸 조금 다양화한다면 북미왕국 백성들에게도 좋고, 넘쳐나다 못해 썩어가는 과일도 어느 정도 처리할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그래서 정성국은 왕실 숙수들에게 이를 연구하게 했고, 그동안 다양한 종류의 과즙 음료가 정성국에게 전달되었는데, 처음엔 맛이 별로였지만, 점차 괜찮아졌기에 정성국은 이 정도면 돈 받고 판매해도 괜찮겠다 싶었다.

해서 정성국은 찻잔에 담긴 포도 과즙 음료를 모두 마신 후, 왕실 상단을 관리하는 정평국을 호출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을 때,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음흉한 여우가 보고서 더미와 함께 집무실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고.

이에 정성국은 탁자 위에 포도 과즙 음료가 담긴 병을 들어, 빈 찻잔에 따라 반대편에 놓으며 음흉한 여우에게 손짓했다.

“일단 여기 앉게.”

“감사합니다. 전하.”

들고 왔던 보고서들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음흉한 여우는 정성국이 건넨 찻잔에 황송해하며 조심스레 마셨고.

달콤하고 시원한 포도 과즙 음료의 맛에 놀란 기색이던 음흉한 여우는, 곧 단숨에 음료를 마시기 시작했고, 그런 음흉한 여우의 모습에 정성국은 만족하며 하루라도 빨리 제품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거 포도로 만든 냉차입니까?”

“냉차라기보단, 포도 과즙으로 만든 음료일세. 괜찮지?”

“예. 시원하고 달짝지근한 게 좋군요.”

“그렇지?”

“예. 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도 맛보게 해주고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하하하. 뭐 조만간 왕실 상단에서 판매할 생각이니 쉽게 구할 수 있을 걸세. 그보다 정보국장이 갑자기 찾아오다니...무슨 일로 찾아온 건가?”

이에 음흉한 여우는 빈 찻잔에서 시선을 떼고, 정성국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누에바 에스파냐에 나가 있던 의용군이 승전 소식을 보내왔기에 이를 보고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뭐?! 승전 소식? 벌써 전투를 치렀단 소린가?!”

음흉한 여우의 대답에 정성국은 무척 놀란 표정을 지었다.

원래 정보국의 계획은 정보국 소속의 누에바 에스파냐인인 디에고에게 머스킷과 물자를 제공해 과달라하라에서 세력을 어느 정도 키운 후, 누에바 에스파냐의 식민지 정부와 본격적으로 싸우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과달라하라에 파견된 의용군이 본격적으로 전투에 참여하는 것은 못해도 한 달 후가 될 거라 여겼다.

한 달 정도는 지나야, 추가로 머스킷이 과달라하라에 지원될 테니 말이다.

헌데 벌써 전투를 치렀다고 하니, 정성국으로서는 일단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정성국의 반응에 음흉한 여우가 누에바 에스파냐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예. 누에바 에스파냐의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는지라, 추가 지원을 기다리며 과달라하라에서 대기할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누에바 에스파냐의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간다고? 아.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올라온 외무청의 보고서에 베라크루즈에 주둔해 있던 병력 일부가 멕시코시티로 이동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긴 했는데...설마 그것 때문인가?”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 베라크루즈에 주둔해 있는 에스파냐군 상당수가 서쪽, 그러니까 멕시코 시티 방면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베라크루즈에 방문했던 수송선 선장이 목격했다는 보고서가 올라왔었고.

이 때문에 정성국 역시 조만간 멜키오르 부왕이 멕시코 북서부 지역의 혁명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병력을 움직이지 않을까 싶었다.

해서 정성국이 살짝 굳은 얼굴로 이를 확인차 묻자, 음흉한 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동안 식민지 정부에 반기를 들고 봉기한 혁명 세력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식민지 정부가 본격적으로 혁명군을 토벌하고, 다시 멕시코 북서부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토벌군을 구성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원래 추가 지원이 도착한 후에 움직이려 했던 의용군이 과달라하라 혁명 조직의 지도자인 디에고의 요청을 받아들여 과나후아토로 이동했고, 과나후아토 혁명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진격하던 토벌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한 거지요.”

음흉한 여우의 설명에 누에바 에스파냐의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 정성국이 팔짱을 끼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질문을 던졌다.

“흠. 그나마 승리했다니 다행이기는 한데...혹시 파견한 의용군 중에 다친 이들이 있나?”

“7명이 경상을 입은 것 외에는 없습니다.”

“오. 그래?”

음흉한 여우의 대답에 정성국은 반색했다.

애초에 정성국이 군수 물자의 추가 지원 이후에 의용군이 움직였으면 한 것은 의용군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머스킷 말고도 철제 무기를 대거 보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화약 무기로 무장한 에스파냐군을 상대하긴 쉽지 않을 터이고, 자연스럽게 화약 무기를 사용하는 병력끼리 정면으로 맞붙게 될 공산이 큰데, 이렇게 일이 흘러가면 의용군들 역시 전투에 참여해야 할 테고, 머스킷의 특성상, 대열을 이루어 비교적 근거리에서 사격하게 될 테니, 아무래도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헌데, 피해가 무척 경미하다고 하니, 정성국은 무척 다행이라고 여겼고, 이러한 정성국의 반응에 음흉한 여우가 빙긋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예. 의용군들도 그렇고, 의용군들이 지휘하는 과달라하라 혁명군도 그렇고, 식민지 정부에 대항해 들고 일어난 혁명 세력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중요한 전력 아니겠습니까. 그 때문에 과나후아토 혁명 세력에서도 과달라하라 혁명군을 보호하기 위해 따로 병력을 붙여주었기에, 별다른 피해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과달라하라 혁명군?”

처음 듣는 이름에 정성국이 고개를 갸웃하자, 음흉한 여우가 설명했다.

“아. 저희가 보내준 머스킷으로 무장한 과달라하라 혁명 조직의 병력입니다. 지휘는 의용군들이 하고 있고요.”

이러한 설명에 정성국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쯧.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가 보내준 군수 물자로 과달라하라 혁명군을 조직하고, 과나후아토로 이동해 토벌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다시 이 소식을 우리에게 전달하기 위해 푸에르토 바야르타 항으로 보고서를 보내기까지 거의 한 달 가까이 차이가 날 텐데, 이걸 동시에 보고 받아야 하는 상황이 안타깝군.”

정성국의 지적에 음흉한 여우가 면목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게...멕시코시티를 기준으로 북서부와 남동부가 거의 단절된 상태라 기존의 연락망을 사용할 수 없다 보니, 현재로선 푸에르토 바야르타 항에 물자를 보내면서 이곳에 도착해 있는 보고서들을 회수하고 있는데, 에스파냐의 눈치 때문에 수송선을 자주 보내기가 어렵다 보니...”

원래 정보국은 에스파냐인의 이름을 빌려 누에바 에스파냐에 면직물을 유통하는 조그마한 상단을 만들고, 이를 통해 각지의 정보원들과 접촉해 누에바 에스파냐 전역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헌데, 멕시코 북서부 지역에서 혁명이 발생하면서 누에바 에스파냐 전역이 어수선해지자, 상단을 움직이는 데 애로사항이 꽃필 수밖에 없었다.

멕시코 북서부 지역은 이미 혁명 세력에게 넘어갔는데, 이곳으로 마차에 물자를 싣고 상행에 나선다면, 식민지 정부가 그걸 두고 볼 리 없지 않은가.

해서 현재 식민지 정부가 통제하고 있는 멕시코 남동부 지역의 정보는 이전처럼 수집되어 보고되고 있었지만, 혁명 세력이 장악한 멕시코 북서부 지역의 정보는 기존과는 달리 푸에르토 바야르타 항으로 전해지고 있었고.

그런데 북미왕국에서 이 푸에르토 바야르타 항에 수송선을 자주 보내기가 어렵다는 것이 문제였다.

에스파냐 대사는 모금 광고로 모인 자금이 군수 물자로 바뀌어 멕시코 북서부 지역의 반란군들에게 전해질 것을 무척이나 경계했기에.

해서 일전에 처음 수송선 3척을 푸에르토 바야르타 항으로 보낸 것도, 나름대로 멕시코 서해안을 오가는 에스파냐 선박들의 수가 적을 때, 그들의 눈을 피해 겨우 보낸 것이었고.

그러니 정보원들이나 의용군들이 작성한 보고서가 늦게 도착하는 것이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음흉한 여우였고, 이에 정성국은 몰래 오갈 수 있고, 물자도 운반할 수 있는 잠수함이 떠올랐지만, 아직 잠수함은 개발 중이었기에 의미가 없어 진작 잠수함 개발에 나서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쩝. 당분간은 어쩔 수 없나. 아무튼, 이번에 의용군에서 보내왔다는 보고서를 좀 주게.”

“아. 여기 있습니다.”

음흉한 여우가 탁자에 올려놓은 보고서 가운데 하나를 정성국에게 건네자, 정성국은 이를 받아들고 빠르게 훑어보았고.

“와우. 이거 놀라운데? 과나후아토를 토벌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던 식민지 정부의 토벌군을 매복, 포위해서 아예 섬멸해버렸다고?”

보고서의 내용에 감탄했다.

보고서에는 과나후아토로 진격하는 식민지 정부군 4천 명을 상대하기 위해, 과나후아토에서 1만 2천 명의 병력을 동원, 그중 4천 명과 과달라하라 혁명군 3천, 도합 7천 명이 먼저 남하해 적당한 지형에 매복했고, 길을 따라 북상하는 토벌군의 속도에 맞춰 본대 8천 명이 남하해, 먼저 이동한 7천 명이 매복한 지역에 대치한 후, 전투를 벌였다고 쓰여 있었다.

그 후 토벌군이 길을 막고 있는 본대를 격파하기 위해 정신을 쏟고 있을 때, 활을 들고 토벌대 양옆 언덕에 매복해있던 원주민 1천 명이 화살을 발사해 토벌군의 신경을 분산시켰고.

동시에 후방에서 매복하고 있던 6천 명의 병력으로 토벌군의 뒤를 공격해 결국 모두 섬멸했다고 하니, 아무리 혁명 세력의 병력이 훨씬 많다 하더라도, 이렇게 깔끔하게 승리하기가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이런 정성국의 반응에 음흉한 여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과달라하라 혁명군이 머스킷으로 무장하고 있기에, 혁명군을 지휘하는 의용군 대장인 이서빈의 발언력이 세졌고, 여기에 탐사대 소령이었던 예전 경력까지 들먹인 덕분에 과나후아토 혁명 세력의 군사 지휘권을 임시로 확보했기에 이러한 승리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음흉한 여우의 말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다면 상황이 이해가 되는군. 보고서를 보니 이서빈 이 친구는 꽤 뛰어난 전술가로 보이니 말이야.”

“예. 이서빈이 정보국의 공작원이 되겠다며 나섰을 때, 군사청장과 탐사대장이 저에게 한소리 했었으니까요.”

확실히 이 정도의 인재라면, 군사청장이나 탐사대장이 음흉한 여우에게 투덜댔을 것 같긴 했기에, 정성국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이번 전과를 보니 군사청장이나 탐사대장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는군. 아무튼, 에스파냐군 4천 명을 전멸시켰으니, 첫 단추치고는 제대로 기운 셈이로군.”

“그렇습니다. 특히, 누에바 에스파냐에 배치된 병력이 그리 많지 않잖습니까. 헌데 그중에서 4천 명이 사라진 셈이니, 멜키오르 부왕으로서는 일이 급해졌지요.”

음흉한 여우의 대답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음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 특히, 이 소식이 알려지게 된다면, 아마 멕시코 남동부 지역의 주민들도 동요할 테고 말이지.”

이에 음흉한 여우가 짓궂은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예. 해서 멕시코 남동부 지역에 있는 정보원들에게 이 소식을 전달할 생각입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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