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0
한창 전화기를 붙잡고 애리조나 지역 신문사 중 한 곳과 통화하던 에스파냐 대사의 보좌관은, 바깥이 소란스러워지자 외출했던 에스파냐 대사가 복귀했음을 짐작하고 통화를 마무리했다.
어차피 지금 통화하고 있는 애리조나 지역 신문사는 자신들이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하더라도, 기존에 체결한 계약을 깰 수는 없다고 이야기했기에, 계속 붙잡고 있어 봐야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해서 보좌관은 전화기를 내려놓고, 즉각 다른 대사관들을 방문하고 돌아온 에스파냐 대사를 만나기 위해 집무실로 향했고.
보좌관이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외투를 벗고 있는 에스파냐 대사의 얼굴이 무척이나 어두웠기에, 보좌관은 상황을 짐작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질문을 건넸다.
“결국, 설득에 실패하신 겁니까?”
이에 벗은 외투를 시종에게 건넨 에스파냐 대사는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후우. 그렇네. 잉글랜드 대사도, 포르투갈 대사도, 그리고 믿었던 프랑스 대사 역시 내 제안을 듣자마자 선을 긋더군.”
어제 북미신문에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마침내 반란이 일어났다는 기사가 실리자 에스파냐 대사는 가슴이 철렁했다.
물론 에스파냐 대사는 본국의 명령으로 멜키오르 부왕이 세금과 부역을 늘리면서, 누에바 에스파냐의 분위기가 무척 안 좋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다만, 에스파냐 대사는 북미왕국 신문사들에 실린 기사와는 달리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정말 반란이 일어날 거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누에바 에스파냐 주민들은 누에바 에스파냐 각지에 주둔한 에스파냐군의 강력함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설사 불만을 품을지언정 반란까지 일으키지는 않으리라고 여긴 것이다.
거기에 북미왕국 언론들은 누에바 에스파냐 식민지 정부에서 주민들에게 걷는 세금과 부역을 몇 배나 늘렸기에 누에바 에스파냐 주민들은 결국 이러한 폭거를 참지 못하고 들고 일어날 거라고 이야기했지만, 에스파냐 대사는 그럴 리 없다고 여겼다.
북미왕국이 등장하기 전, 누에바 에스파냐인들은 지금과 같은 세금과 부역을 별말 없이 받아들였었기에.
해서 에스파냐 대사는 일부 언론사들을 통해 북미왕국 언론들이 누에바 에스파냐의 사정을 과장해 보도하고 있다는 광고를 내기도 했었고.
헌데 실제로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반란이 발생했으니, 에스파냐 대사로서는 앞으로의 일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에스파냐 대사가 조용한 곰과 만나 누에바 에스파냐 내부의 일에 북미왕국이 직접 개입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약속을 받았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북미왕국이 직접 누에바 에스파냐의 반란세력과 접촉해 이들을 지원하지는 않을 텐데, 문제는 북미왕국인들이 누에바 에스파냐의 반란세력과 접촉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에스파냐 대사관에서 신문사들과 접촉해 멕시코인 연합회가 낸 모금 광고를 내리려 했지만, 일부 신문사들만 에스파냐 대사관의 협상을 받아들였을 뿐, 아직 상당수의 신문사 1면 광고에는 누에바 에스파냐인들을 돕자는 모금 광고가 실린 상황이다 보니,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반란이 일어난 이상, 더 많은 기부금이 멕시코인 연합회로 흘러 들어갈 텐데, 에스파냐 대사로서는 이 점이 무척 우려될 수밖에 없었다.
보통 북미왕국에서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모이는 금액이 최소 수천만 원대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리고 모금 광고에 적혀 있는 대로 멕시코인 연합회에서 그 막대한 돈으로 무기를 비롯한 물자를 사서 누에바 에스파냐 반란세력에 넘긴다면, 에스파냐군은 이번 반란을 쉬이 진압하기 어려울 테고, 그렇게 반란이 길어지면서 누에바 에스파냐인들이 두려워하는 에스파냐군이 실제로는 그리 강력하지 않다는 인식이 생기는 순간, 아직 반란이 일어나지 않은 멕시코 남부 지역이나 페루 부왕령에도 반란의 불길이 번질 테니.
해서 에스파냐 대사는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북미신문을 보자마자 보좌관을 불러, 어떻게 하면 북미왕국에서 멕시코인 연합회를 제재하게 만들 수 있을지를 논의했다.
헌데, 북미왕국의 여러 신문에 누에바 에스파냐인들을 위한 모금 광고가 실리자마자 에스파냐 대사가 직접 북미왕국에 강하게 항의했지만, 북미왕국에서는 자신들의 소관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 손을 놓고 있다 보니, 이제 와서 에스파냐 대사가 다시 조용한 곰을 만나 강하게 항의하며 멕시코인 연합회를 제재해 달라고 요청해봐야, 지금처럼 모른 척할 것이 분명했고.
해서 에스파냐 대사가 고민하고 있을 때, 보좌관은 식민지를 보유한 다른 유럽 국가들을 끌어들여 함께 북미왕국을 압박한다면, 북미왕국도 지금처럼 무시하지는 못하리라는 말을 꺼냈고, 에스파냐 대사 역시 에스파냐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함께 북미왕국을 압박한다면, 북미왕국도 무언가 반응을 보일 거라 판단해 즉각 식민지를 보유한 잉글랜드, 포르투갈, 프랑스 대사관을 방문했다.
물론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들은 저 세 나라 외에도 많았다.
다만 덴마크, 네덜란드, 스웨덴은 북미왕국과 동맹을 맺은 만큼, 에스파냐의 손을 잡지는 않을 것 같았고, 오스만 제국 역시 그동안의 관계를 생각하면 우호적인 북미왕국의 손을 잡을 것이 분명했기에, 그나마 가능성 있어 보이는 세 나라의 대사관을 방문한 것이고.
헌데 이 세 나라의 설득에 실패했다는 에스파냐 대사의 대답에 보좌관이 표정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음...물론 북미왕국의 국력을 생각하면 저희와 함께 북미왕국을 압박하자는 제안이 부담스러울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세 나라는 모두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는 만큼, 그리고 저들도 식민지 주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있는 만큼, 북미왕국 언론이 자유롭게 기사를 내는 것이 마땅치 않을 텐데도 대사님의 제안을 듣자마자 거절했다는 말씀입니까?”
북미왕국 언론들이 이번에 누에바 에스파냐와 관련된 기사를 내서 북미왕국 내 여론이 움직인 것처럼, 북미왕국 언론들이 잉글랜드, 포르투갈, 프랑스 식민지와 관련된 기사가 실린다면 이들은 여러모로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세 나라 역시 식민지 주민들을 착취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사실이 언론을 통해 북미왕국에 알려진다면, 당연히 북미왕국 내에서 이들 나라에 대한 여론이 무척이나 악화될 테고, 그렇게 여론이 악화되면, 북미왕국과의 외교 관계에도 영향을 끼칠 테니 말이다.
지금 에스파냐가 그런 것처럼.
그렇기에 보좌관은 에스파냐 대사가 이들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한 명도 설득하지 못했다고 하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이런 보좌관의 물음에 에스파냐 대사가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네. 일단 잉글랜드 대사는 예상대로 내 제안을 듣자마자 거절하더군.”
“잉글랜드야...유럽을 방문했던 북미왕국 국왕이 제임스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이후, 북미왕국과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는 만큼, 잉글랜드 대사로서는 굳이 이번 일에 아국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북미왕국과의 관계가 어그러지는 것을 원치 않겠지요.”
정성국이 유럽을 방문했다가 제임스 2세를 만나 그에게 힘을 실어준 이후, 본국의 명령을 받은 잉글랜드 대사는 북미왕국과의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는데 무척이나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보좌관도 잘 알고 있었기에, 세 나라 가운데 잉글랜드만큼은 설득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자, 에스파냐 대사가 그 말을 받았다.
“맞네. 그 때문인지 잉글랜드 대사는 내가 북미왕국을 압박해보자는 말을 꺼내자마자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면서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더군. 그래서 잉글랜드 대사를 설득하는 것은 포기하고 다음으로 포르투갈 대사를 만났는데, 포르투갈 대사는 우리의 예상보다 더 북미왕국을 두려워하는 눈치더군.”
에스파냐 대사의 말에 보좌관은 탄식했다.
예전에 노예무역 문제로 북미왕국과 대립했다가 브라질 식민지 대부분을 잃었던 것이 떠오른 것이다.
“허. 그렇습니까?”
“그래. 포르투갈 대사도 북미왕국 언론에서 자유롭게 기사를 내는 것이 탐탁지 않은 눈치이긴 하더군. 북미왕국 언론에서 브라질 북부 식민지나 아프리카, 인도 식민지에서 포르투갈이 현지인들을 착취하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면, 여러모로 골치 아플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지요. 해서 포르투갈은 저희와 함께할 줄 알았는데...”
보좌관의 말에 에스파냐 대사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헌데 포르투갈 대사는 이를 막겠다고 우리와 손을 잡고 북미왕국을 압박했다가 북미왕국과 관계가 틀어지면 더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더군. 그래서 우리의 제안을 거절했네.”
에스파냐 대사의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쉰 보좌관은 마지막 남은 프랑스를 언급했다.
“허면 프랑스는...”
보좌관이 프랑스를 언급하자 에스파냐 대사는 조금 전에 만났던 프랑스 대사의 오만한 태도를 떠올리고 약간 분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프랑스는 우리의 예상대로 북미왕국을 크게 두려워하지는 않았네. 헌데 오히려 그게 문제일세.”
“예? 그게 무슨...”
에스파냐 대사의 말에 보좌관의 의아한 표정을 짓자 에스파냐 대사가 말했다.
“프랑스 대사가 그러더군. 아무리 북미왕국 언론이라 하더라도, 프랑스를 건드리지는 못할 거라고. 그러니 굳이 우리와 손잡고 북미왕국을 압박해 북미왕국 언론을 견제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고 말이지.”
“미친...그게 정말입니까?”
에스파냐 대사의 대답에 보좌관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프랑스 대사의 말은 곧 북미왕국 언론이 누에바 에스파냐 기사를 싣고, 그러면서 에스파냐를 비난한 것은, 에스파냐의 국력이 별 볼 일 없기에 그런 것 아니냐는 뜻이었기에 보좌관은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프랑스가 유럽의 중심이라 불릴 정도로 강대국인 것은 맞고, 현재 에스파냐의 국력이 프랑스보다는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프랑스 대사가 저렇게 깔보는 듯한 태도를 보일 정도는 절대로 아니었기에 보좌관은 정말 프랑스 대사가 그런 말을 했느냐고 되물었고.
그런 보좌관의 반응에 에스파냐 대사가 분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뜨더군.”
“허...”
에스파냐 대사의 확언에 보좌관은 탄식했고.
그러다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가 유럽 나라들 가운데는 가장 강대한 국력을 자랑하는 터라, 프랑스 대사가 꽤 오만한 편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안하무인인 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서 보좌관이 프랑스 대사를 떠올리고 분노한 기색이 역력한 에스파냐 대사에게 이를 지적하자, 에스파냐 대사는 분노를 죽이고 곰곰이 생각해보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확실히...그렇군. 뭔가 이상한데? 물론 프랑스 대사가 오만한 편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우리 에스파냐를 깔볼 정도로 막 나가는 인사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 허면 프랑스 대사가 왜 그런 태도를 보인 거지?”
이에 보좌관이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말했다.
“아무래도 프랑스 대사는 아국이 누에바 에스파냐를 잃을 거라 여긴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누에바 에스파냐가 독립해버린다면 아국은...”
“...다시 재정이 파탄 나겠지. 젠장. 그래서 막 나간 거로군.”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가 우리를 돕지 않는 이상, 북미왕국을 압박하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
“...멕시코인 연합회의 자금이 누에바 에스파냐로 흘러 들어간다는 소리군. 하아. 정녕 이를 막을 방법은 없는 건가?”
에스파냐 대사의 탄식에 보좌관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일단 멜키오르 부왕과 에스파냐 본국에 현 상황을 전달하는 것이 우선일 것 같습니다.”
“...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