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826화 (826/850)

#826

새한성의 한 술집.

술집 주인은 초저녁부터 무척이나 답답하다는 얼굴로 연신 술을 들이켜는 한 중년 사내를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물론 저 중년 사내는 가게 문을 열자마자 홀로 술집으로 들어와 값이 꽤 나가는 독한 술을 주문하고, 계속해서 술을 마셔댔으니 자신에게 있어서는 술집의 매상을 올려주는 참으로 고마운 손님이긴 했다.

다만, 술집 주인은 그동안 술집을 운영하면서 수많은 손님을 받아왔고, 그 경험에 의하면 저렇게 안 좋은 얼굴로 홀로 술집에 들어와 술만 들입다 마시는 손님들이 만취하면, 높은 확률로 행패를 부렸기에 아무래도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해서 술집 주인은 홀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연신 독한 술을 마셔대는 중년 사내가 만취하기 전에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겠다고 여기고, 술 깨는 데 도움이 되는 시원한 국물이 일품인 조개탕을 적당한 그릇에 담아 홀로 술을 마시는 중년 사내의 앞에 내려놓았고.

어두운 얼굴로 술을 마시고 있던 중년 사내는 고개를 들어 술집 주인을 바라보고 말했다.

“이게 뭐요. 난 안주를 따로 시킨 적이 없는 것 같소만.”

중년 사내의 목소리에 술집 주인은 속으로 안도했다.

독한 술을 안주도 없이 한 병 넘게 마셨기에, 엄청 취했으리라 여겼는데, 말을 또렷하게 하는 것을 보아하니 생각보다 주량이 되는 것 같았기에.

다만, 아무리 주량이 대단하다 해도 계속 저런 식으로 마신다면 결국은 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술집 주인이었고.

해서 술집 주인은 중년 사내와 이야기를 나누어, 중년 사내가 지금처럼 연신 술만 마시는 것은 막을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뭐 비싼 소주를 2병이나 시켰으니...덤으로 주는 거요.”

“덤?”

“그렇소. 이 조개탕의 시원한 국물은 소주랑 궁합이 잘 맞거든. 한 번 드셔보시구려.”

술집 주인의 권유에 중년 사내는 잠깐 고민했지만, 굳이 호의를 거절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기에 숟가락을 들어 조개탕의 국물을 떠서 입에 넣은 후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허어. 국물이 정말 끝내주는군.”

중년 사내의 반응에 술집 주인은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렇지. 그 조개탕 때문에 우리 가게의 단골이 된 손님들이 꽤 많으니 말이오.”

술집 주인의 말에 중년 사내 근처에 앉아 술을 홀짝이고 있던 몇몇 단골들이 그건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이는 중년 사내도 마찬가지인지 술집 주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조개탕 때문에 단골손님이 되었다? 확실히 그럴 가치가 있는 조개탕이구려.”

“하하하. 그렇지. 그러니 손님도 이 기회에 우리 가게의 단골손님이 되는 것은 어떻소.”

“글쎄올시다. 내가 술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서 말이외다.”

중년 사내의 대답에 술집 주인이 눈을 빛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저 독한 안동 소주를 연신 마시기에 술을 무척 좋아하는 주당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면...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요?”

“흐음...”

술집 주인과 이야기하면서 표정이 조금 밝아졌던 중년 사내는, 술집 주인의 물음에 다시 표정이 어두워졌고.

이에 술집 주인은 슬쩍 입을 열어 중년 사내의 대답을 독촉했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있다면, 지금처럼 혼자 술을 마시며 속으로 삭이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사정을 털어놓고 위로를 받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술집 주인의 말에 중년 사내의 표정이 조금 복잡해졌다가, 곧 깊은 한숨과 함께 이렇게 초저녁부터 술집을 방문해 술만 마시는 자신의 속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게...후우. 처가 식구들이 걱정되어서 그렇소.”

“처가 식구들?”

“그렇소. 내 아내는 누에바 에스파냐 출신이고, 처가 식구들은 누에바 에스파냐에 살고 있거든.”

처음 중년 사내의 대답에 술집 주인이나 주변에 앉아 술을 홀짝이며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단골들은 다들 고개를 갸웃했지만, 뒤이은 중년 사내의 대답에 상황을 이해하고 안타까움이 뒤섞인 탄성을 질렀다.

이미 북미신문이나 라디오 방송을 통해 누에바 에스파냐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이들도 잘 알고 있었기에.

해서 술집 주인이 정말 안 되었다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중년 사내를 위로하듯 입을 열었고.

“그거 참으로 안 됐구먼. 요새 누에바 에스파냐에 관련해서 나오는 기사들을 보니 거기 분위기가 정말 안 좋은 것 같던데...”

“그러게 말이야. 세금을 기존의 2배 넘게 올리고, 부역마저 반년 가까이 치러야 하면, 누에바 에스파냐 백성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건지...”

근처에 있던 한 단골손님이 술집 주인의 말을 받아 대꾸하자, 그 단골손님과 합석해 함께 술을 마시던 노인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뭘 어떻게 살아. 그냥 노예처럼 살다 죽으라는 소리지.”

“아이고. 이 노친네야. 말 좀 가려 하슈.”

노인의 말에 노인과 합석한 단골손님이 화들짝 놀라며 타박하고, 술집 주인이나 주변 다른 단골손님들도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시선을 보내자, 노인은 결국 중년 사내에게 사과했다.

“아. 크흠. 미안하네. 에스파냐 놈들이 하는 꼴을 보니 예전 조선에서 살 때 아전들이 장난쳤던 기억이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공격적으로 말이 나왔네.”

노인의 사과에 중년 사내는 사과를 받아들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술잔에 가득한 소주를 단숨에 들이켰고.

그런 중년 사내를 보고 노인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그리고 자네가 처가에 돈을 좀 보내주면, 아무리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과하게 세금을 걷는다 하더라도, 처가 식구들이 굶주리지는 않을 걸세. 그러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말게.”

이에 중년 사내는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겠지요. 물론 누에바 에스파냐에 있는 처가에 돈을 보내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정 방법이 없으면 제가 직접 가서 돈을 전해주고 와도 되니까요. 다만, 저나 아내가 걱정하는 것은 재정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처남들이 무척 혈기왕성한 편이거든요.”

이에 술집 주인은 중년 사내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눈치채고 중얼거렸다.

“아. 혹여 처남들이 반란에 참여할까 그게 걱정스러운 거군요.”

“후우. 그렇소이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야 누에바 에스파냐의 군대가 별 볼 일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화약 무기로 무장한 군대이잖소. 그러니 화약 무기도 없이 그들에게 대항해봐야 짓밟힐 것이 뻔한데...”

중년 사내의 탄식에 술집 주인이 위로하듯 말했다.

“손님의 처남들도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누에바 에스파냐군과 싸운다는 것은 목숨을 버리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 거요. 그런 만큼 아무리 혈기왕성하다 해도, 섣불리 반란에 참여하지는 않을 테고요. 그러니 미리부터 너무 걱정하진 마시구려.”

“음...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아내를 타이르려 했는데, 아내는 자신이 아는 동생들이라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면서, 무슨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으니 어쩌겠소.”

“그것 참...”

중년 사내의 말에 술집 주인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노인이 슬쩍 입을 열었다.

“처가 식구들을 북미왕국으로 데려오지 그러시오.”

“에이. 노친네도 참. 신문 좀 보시구려. 누에바 에스파냐가 아국과 맺은 이주 협정을 종료한 지가 언젠데.”

이에 한 단골손님이 노인을 타박하자, 오히려 노인은 그 단골손님을 보고 쏘아붙였다.

“설마 내가 그걸 모르겠나. 내 말은 몰래 데려오라는 말이지! 몰래!”

“몰래? 불법적으로 말이오?”

“그렇지. 내가 조선에서 북미왕국으로 이주한 것도 합법적인 방법이 아니라 원상을 통해 불법적으로 이주한 셈이니...”

노인은 북미왕국이 건국되기 전에 북미왕국으로 이주한 인물이었고, 이러한 사실을 아는 다른 단골손님들이 일리가 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때, 노인과 합석한 단골손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이. 그게 어디 쉽겠소? 국경을 지키는 병사들의 눈을 피해야 하는데.”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북미왕국과 맺은 이주 협정을 종료한 이후, 일부 누에바 에스파냐 원주민들은 뒤늦게 북미왕국으로 이주하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경비대에 의해 불법 이주민으로서 체포되었고.

아무리 인력이 부족해 국경 전체를 통제하진 못하더라도, 불법 이주민들이 무한한 식량과 물자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 이상, 국경 인근의 도시에 들를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체포된 것이다.

그리고 북미왕국에서는 누에바 에스파냐와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들을 다시 누에바 에스파냐로 되돌려 보냈었고.

그렇기에, 불법적으로 이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단골손님의 말에 다른 단골손님들이 동의하듯 한마디씩 덧붙였고, 그때 중년 사내가 술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후우. 아내와 결혼 후, 나는 아내를 설득해 어떻게든 처가 식구들을 북미왕국으로 이주시키려 했소이다. 헌데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이제 와서 다른 나라의 말을 익혀가면서까지 북미왕국으로 이주하고 싶지는 않다며 거절했었고, 처남들도 가족, 친구들이 살고 있는 고향을 떠나고 싶지는 않다고 하더이다. 그러니...”

물론, 당시에는 누에바 에스파냐가 북미왕국만은 못해도, 안토니오 부왕의 노력으로 점차 살기 좋아지고 있었던 상황이라 처가 식구들이 그런 결정을 내렸던 만큼, 현 누에바 에스파냐의 상황이라면 처가 식구들의 생각이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다만, 중년 사내가 생각하기에는 암울한 현 상황에서도 처가 식구들이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려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처가 식구들이 사는 고향 마을은 일종의 집성촌이나 다름없었기에, 피가 섞인 친척들을 고향 마을에 내버려 두고 자신들만 북미왕국으로 이주해 편히 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던 탓이다.

거기에, 불법적으로 이주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해서 중년 사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한 단골손님이 입을 열었다.

“그럼, 차라리 누에바 에스파냐 원주민들이 에스파냐의 압제에 대항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어떻겠소.”

“음? 그게 무슨 소리요?”

“누에바 에스파냐 원주민들이 충실히 무장을 갖춘다면 에스파냐의 압제에 벗어날 수 있을 테니, 처가 식구들도 고향에서 편히 살 수 있지 않겠소. 물론 그 혈기왕성하다는 처남들이 걱정스럽기야 하지만...”

단골손님의 말에도 중년 사내는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어떻게 돕는다는 거요? 처가에 돈 말고 화약 무기라도 보내라는 소리요?”

“음? 아. 그게 아니라 지금 누에바 에스파냐 원주민들이 에스파냐의 압제에 대항할 수 있도록 돕자면서 한창 모금 활동을 하고 있지 않소. 그러니 거기에 돈을 좀 보태라는 거지요.”

“누에바 에스파냐 원주민들을 돕기 위한 모금 활동이라고요?”

중년 사내가 눈을 크게 뜨고 단골손님을 바라보자 단골손님이 한쪽에 놔둔 신문을 중년 사내에게 건네며 말했다.

“거기 광고를 좀 보시구려.”

“이건...”

광고에는 한 단체가 에스파냐의 압제에 시달리는 누에바 에스파냐 원주민들을 돕기 위해 무기와 물자를 사들이고 있는데 돈이 부족하다면서, 만약 누에바 에스파냐 원주민들을 돕고 싶다면 해당 계좌에 돈을 이체해달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기에 중년 사내가 눈을 크게 떴고.

술집 주인도 옆에서 중년 사내가 보는 광고를 함께 보고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허. 이런 모금도 가능한 건가?”

북미왕국은 땅덩이가 워낙 넓었고, 그렇기에 자연재해가 생각보다 많이 발생했다.

물론 북미왕국은 부유했고, 그렇기에 자연재해에 피해를 입은 백성들에게 넉넉히 보상해줄 수 있었고.

다만 북미왕국은 신문과 라디오 방송 등, 언론이 발전했기에 북미왕국 백성들은 자연재해에 피해를 본 이들의 사정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었고, 이를 안타까워하며 자신들도 돕고 싶어 했고,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이 모금 광고였다.

헌데 이런 식의 모금 광고는 처음이었기에 술집 주인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노인이 중얼거렸다.

“흠. 이거 괜찮네. 누에바 에스파냐 원주민들을 도울 방법이 생긴 셈이니까. 나도 돈을 조금 보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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