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825화 (825/850)

#825

에스파냐 주재 북미왕국 대사는 안토니오 후작을 만나고 대사관으로 돌아온 후, 즉각 보고서를 작성해 항공 우편을 통해 본국으로 보고서를 보냈고.

외무청장인 조용한 곰은 에스파냐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정성국을 찾았다.

그리고 정성국에게 보고서를 건네며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고.

눈으로는 북미왕국 대사가 작성한 보고서를, 귀로는 조용한 곰의 설명을 듣던 정성국은, 에스파냐의 상황을 대략적으로 파악하게 되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허. 이것 참...카를로스 2세가, 아니. 에스파냐에서 이런 결정을 내리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특히, 에스파냐의 재정 상태가 썩 좋은 것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이전과는 달리 최악은 아닌 것으로 압니다. 헌데도 누에바 에스파냐의 정책을 바꿔가면서까지 더 많은 자금을 확보하려 하다니...”

조용한 곰은 에스파냐의 결정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처음 안토니오 후작이 누에바 에스파냐의 세금과 부역을 줄이면서 당장 누에바 에스파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줄어들었지만, 북미왕국에서 에스파냐와의 교역 규모를 늘렸고, 누에바 에스파냐에 투자한 덕분에 손해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누에바 에스파냐가 안정되면서 군사비로 소모되는 비용이 대폭 줄고, 또 누에바 에스파냐의 경제가 조금씩 커지면서, 자연히 에스파냐가 누에바 에스파냐를 통해 얻는 이득은 커져만 갔고.

그러니 안토니오 후작의 원주민 우대 정책을 꾸준히 유지하기만 해도, 에스파냐는 누에바 에스파냐를 손쉽게 통치할 수 있고, 누에바 에스파냐를 통해 에스파냐가 얻는 이득은 계속해서 커질 것이 분명했다.

헌데, 갑자기 에스파냐에서 이렇게 잘 굴러가고 있는 누에바 에스파냐에 개입해 누에바 에스파냐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으니, 조용한 곰은 에스파냐의 결정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이에 정성국은 보고서를 내려놓고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에스파냐의 결정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가지만, 당장 중요한 것은 왜 에스파냐가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가 아닌 것 같네.”

정성국의 말에 조용한 곰은 그건 그렇다는 얼굴로 수긍했다.

“맞습니다. 당장 중요한 것은 외교적인 방법을 통해서는 이번 누에바 에스파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거겠지요.”

“그렇지. 어차피 멜키오르 부왕을 설득하는 것은 어려워도, 에스파냐가 현 누에바 에스파냐의 상황을 알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무언가 조치를 취할 줄 알았는데,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힘을 앞세워 원주민들의 불만을 누르려 할 테고, 이는 누에바 에스파냐에 혼란을 가져오겠지.”

정성국의 예측에 조용한 곰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누에바 에스파냐의 원주민들이 에스파냐에 대항해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려 할 것은 분명해 보였고, 이 반란으로 수많은 피가 흐를 것이 뻔해 보였기에.

그리고 북미왕국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누에바 에스파냐의 땅을 적시는 피는 누에바 에스파냐 원주민들의 피일 것이 뻔했고.

문제는 조용한 곰이 아는 정성국의 성향이라면 이를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다.

해서 조용한 곰은 정성국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허면 본격적으로 누에바 에스파냐 원주민들을 도우실 생각이십니까?”

“그럴 생각이네.”

“으음...”

정성국의 단호한 대답에 조용한 곰이 앞으로가 걱정된다는 얼굴로 신음을 흘리자, 정성국이 바로 입을 열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단순히 원주민들의 처지가 안타까워서가 아닐세. 원주민들이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에스파냐군에 의해 진압당하면, 원주민들은 거의 노예나 다름없는 신세가 될 테고, 누에바 에스파냐의 경제는 망가져 버릴 거야. 그럼 아국의 피해가 크지.”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아국이 우호국인 에스파냐의 반란 세력을 지원한다면, 에스파냐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 역시 아국을 경계할 테니, 그게 조금 걱정스러운 거지요.”

정성국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끼며 조용한 곰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물론 유럽 국가들은 서로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웃 국가끼리 사이가 좋은 경우가 얼마나 있겠는가.

그러니 누에바 에스파냐에 반란이 일어나고, 북미왕국이 반란 세력에 도움을 주어 에스파냐가 누에바 에스파냐라는 거대한 식민지를 잃게 된다면, 유럽 국가들은 에스파냐의 불행에 기뻐할 것 같기는 했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다른 유럽 국가들, 특히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들은 내심 북미왕국을 경계할 것이 분명했다.

특히 정성국은 언론이나 각국 대사와의 만찬 자리에서 유럽의 식민지 정책에 부정적인 의견을 여러 번 피력한 적이 있었기에.

그러니 자연히 이들 국가와는 관계가 경색될 테고, 조용한 곰은 이 점이 걱정스러운 것이리라.

해서 정성국은 잠깐 고민하다, 무언가 방법이 떠올랐는지 조금 짓궂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허면 누에바 에스파냐의 반란 세력을 지원하되, 비공식적으로 지원하면 되지 않겠나.”

“예? 비공식적으로요?”

* * *

“부르셨습니까. 전하.”

“아. 왔군. 저기 앉게. 정보국장.”

정성국의 호출에 정성국의 집무실로 한달음에 달려온 음흉한 여우는 정성국이 자신을 정보국장이라고 부르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고.

그런 음흉한 여우의 모습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말을 걸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정보국을 설립하고 조직을 정비하느라 정신없나 보군?”

집무실로 들어온 음흉한 여우의 얼굴에는 피곤이 가득했다.

눈 밑은 어두웠고 피부도 무척 푸석해 보였으니.

해서 정성국이 음흉한 여우가 조금 걱정되어 질문을 던지자 음흉한 여우가 씁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렇긴 합니다. 덕분에 며칠째 퇴근도 못 하고 정보국 건물에서 숙식하며 수많은 업무를 처리하고 있으니까요.”

“흠. 그래?”

음흉한 여우의 대답에 정성국은 미안함과 난감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무언가를 고민하는 눈치였고.

정성국을 바라보고 있던 음흉한 여우는 그런 정성국의 표정을 보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따로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있긴 한데...”

가뜩이나 막대한 업무에 시달리는 음흉한 여우에게, 이런 큰일을 맡겨도 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애써 삼키는 정성국이었고, 그런 정성국을 보고 음흉한 여우가 허리를 곧게 펴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전하께서 소신을 부르신 것을 보면, 정보국에서 나서야 할 일 같은데, 어찌 일이 많다고 이를 마다하겠습니까. 그리고 어차피 요 며칠간 고생한 덕분에 정보국의 설립과 조직의 구성은 거의 끝난 상태고, 새로운 인원을 모집하는 일은 부하들에게 일임하거나, 천천히 진행하면 그만이니 말입니다.”

“그런가.”

정성국은 음흉한 여우의 말에 잠깐 고민했지만, 이번 일은 외무청보다는 정보국이 맡는 것이 여러모로 나았기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흠. 내가 자네를 부른 것은 누에바 에스파냐의 일 때문일세. 이걸 한 번 읽어보게.”

그러면서 정성국은 조용한 곰이 가져왔던, 에스파냐 주재 북미왕국 대사가 작성한 보고서를 음흉한 여우에게 건넸고.

음흉한 여우가 이 보고서를 빠르게 살피는 사이, 정성국은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커피 향이 집무실을 가득 채웠을 때쯤, 음흉한 여우가 보고서의 내용을 다 확인했는지, 입을 열었다.

“으음. 이 보고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번 누에바 에스파냐의 일을 외교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한 셈이로군요.”

“그렇지. 그리고 그냥 내버려 뒀다간, 아국의 손해가 너무 크고. 해서 누에바 에스파냐 원주민의 요청대로, 저들을 도와줄 생각인데...문제는 이웃 국가에 반란이 일어났는데 곧바로 반란 세력을 지원하면 아무래도 외교적으로 고립될 수가 있다는 말이지?”

“그야...그렇겠지요.”

“해서 비공식적으로 원주민들을 지원할 생각이네.”

정성국의 말에 음흉한 여우가 눈을 빛냈다.

“비공식적으로 말입니까?”

“그래. 혹시나 해서, 그리고 에스파냐를 압박하기 위해 사전 작업을 해 두었거든?”

“사전 작업이라 하시면...”

정성국은 커피를 음흉한 여우에게 건네며 씩 웃었다.

“아. 자네는 정보청 설립 문제로 바빠서 모르려나? 언론을 이용해 누에바 에스파냐의 사정을 슬쩍 흘렸다네.”

정성국이 건넨 커피잔을 조심스럽게 받아들던 음흉한 여우는, 정성국의 말에 움찔하며 놀란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어? 허면 지금 남부 지역에서 에스파냐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 전하께서 의도하신 일이었습니까?”

“맞네. 아국에 정착한 멕시코 출신 이주민이 50만 명을 넘는 만큼, 이들이 누에바 에스파냐의 사정을 알고 한목소리를 낸다면 에스파냐를 압박할 수 있을 테니 말일세.”

“아. 그럼 북미신문이 아닌 애리조나와 텍사스의 지역 신문에서 처음 기사가 나온 것도...”

이에 정성국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북미신문이 왕실 소유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지 않나. 그리고 에스파냐를 압박하는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기사 내용이 조금 과격한 편이라 북미신문보단 다른 지역 신문들을 이용한 거지.”

“아. 그렇군요.”

음흉한 여우가 정성국의 말에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정성국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무튼, 이러한 사전 작업 덕분에 남부 지역에서 멜키오르 부왕과 에스파냐의 인상이 무척 나빠졌네. 누군가가 나서서 멜키오르 부왕과 에스파냐에 착취당하고 있는 누에바 에스파냐 원주민들을 위한 무기와 물자를 구하려면 돈이 필요하니 제발 도와달라는 광고라도 낸다면, 기꺼이 주머니를 열 정도로 말이지.”

정성국이 여기까지 말하자, 음흉한 여우는 정성국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채고 흥미롭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남부 지역 백성들이 십시일반으로 낸 돈으로 무기와 각종 물자를 사고, 누에바 에스파냐 원주민들에게 넘길 때, 아국의 지원 물자도 슬쩍 끼워서 넘기라는 거군요?”

“정확하네. 다만, 우리가 이렇게 무기와 물자를 충분히 제공한다고 해도, 솔직히 누에바 에스파냐 원주민들이 잘 훈련된 에스파냐군을 상대하기가 쉽지는 않을 거야.”

“그렇겠지요. 특히 원주민들은 군사적인 지식이 전혀 없을 테니...”

일단 에스파냐는 수많은 전쟁을 치렀고, 그렇기에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들이 많았다.

거기에 멜키오르 부왕 역시 전쟁터에서 공을 세운 인물이지 않은가.

그러니 북미왕국에서 몰래 누에바 에스파냐의 원주민들에게 충분한 무기와 물자를 공급해준다 하더라도, 원주민들이 에스파냐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는 쉽지 않았고.

헌데 이렇게 일이 흘러가면 북미왕국으로서는 여러모로 곤란해진다.

손해를 막기 위해 추가로 투자했는데도 망해버렸으니, 손해가 더욱 커지는 셈 아닌가.

그러니 정성국으로서는 어떻게든 누에바 에스파냐의 원주민들이 에스파냐군을 격파할 수 있게 도와야 했고.

물론 가장 쉬운 방법은 역시 북미왕국의 무기를 넘기는 것이지만, 북미왕국이 자신들의 무기를 얼마나 철저히 통제하는지는 유럽에서도 뻔히 알고 있기에, 이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니 차선으로 정성국은 원주민들을 돕기 위해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었고.

어차피 정보국 요원 가운데 상당수는 군사청 출신이었고, 여기에 정보국의 규모를 빠르게 확대하기 위해 군사청 소속 병사들을 요원으로 대거 차출할 계획이니만큼, 이들 중 일부를 민간인 신분으로 누에바 에스파냐에 파견해 원주민들을 돕는다면, 에스파냐군을 격파하는 것이 마냥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아 보였달까.

해서 정성국은 비공식적인 지원만으로는 한계가 있기에 골치 아픈 표정을 짓고 있는 음흉한 여우에게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를 유심히 듣던 음흉한 여우는 정성국의 말이 끝나자 곧바로 입을 열었다.

“확실히 이쪽에서 대규모 군사 고문단을 보낸다면, 원주민들에게도 충분히 승산이 있겠군요.”

“그렇지.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라면, 군사 고문단의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다는 것인데...”

정성국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말을 흐리자, 음흉한 여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어차피 정보국의 주 업무는 타국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고, 이는 생각보다 위험한 일입니다. 그리고 정보국을 자원한 이들은 이를 알고 있음에도 북미왕국을 위해 기꺼이 자원한 거고요. 허니 그 부분은 너무 심려치 마시지요.”

“후우. 그런가.”

정성국이 음흉한 여우의 말에 깊은 한숨을 쉬며 고민하고 있을 때, 음흉한 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번 일은 아국의 안전과도 직결된 문제입니다.”

“음?”

정성국이 고민을 멈추고 음흉한 여우를 바라보며 그게 무슨 뜻이냐는 시선을 보내자, 음흉한 여우가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국과 에스파냐와의 관계는 나쁘지 않고, 또, 아국의 국력을 생각하면 감히 에스파냐가 아국을 공격할 리는 없겠지요. 허나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지 않습니까.”

“...나중에 에스파냐와 대립할 수도 있으니, 이 기회에 누에바 에스파냐를 확보해야 한다는 건가?”

이에 음흉한 여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최소한 국경을 맞댄 멕시코 북부 지역만큼은 아국의 영향력 아래에 두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야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아국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테니까요.”

북미 남부 지역의 도시나 마을들은 주로 국경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

이는 북미왕국에서 국경 방어를 위해 철도를 국경 인근에 설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리되었고.

그렇기에 만약 에스파냐에서 북미왕국을 기습 공격한다면, 분명 남부 지역의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 기회에 멕시코 북부 지역만이라도 아국의 영향력 아래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음흉한 여우의 말에 정성국은 자신도 모르게 수긍했고.

결국, 정성국은 마음을 다잡고 명령을 내렸다.

“후우. 알겠네. 자네가 이 일을 맡아 바로 진행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전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