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4
응접실에서 어두운 얼굴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안토니오 후작은 응접실의 문이 열리자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오는 에스파냐 주재 북미왕국 대사를 보고 그를 반겼다.
“아. 오셨습니까.”
그러면서 안토니오 후작은 북미왕국 대사에게 자리를 권하고 미리 내려둔 커피를 건넸지만, 북미왕국 대사는 뭐가 급한지 안토니오 후작이 건넨 커피는 쳐다도 보지 않고 안토니오 후작에게 물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겁니까.”
북미왕국 대사가 안토니오 후작을 만나 누에바 에스파냐의 상황을 전달한 것이 벌써 열흘 전이었다.
그리고 당시 안토니오 후작은 북미왕국 대사의 설명을 통해 누에바 에스파냐의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누에바 에스파냐에 영향력을 행사해 누에바 에스파냐의 상황을 진정시켜보겠다고 이야기했었고.
그 이후 안토니오 후작은 열심히 여러 귀족을 만나고 다녔기에 북미왕국 대사는 곧 이번 사태가 순조롭게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헌데, 시간이 흘러도 에스파냐에서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고, 본국에서 계속 전해져오는 누에바 에스파냐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갔기에, 북미왕국 대사는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누에바 에스파냐의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무언가 조치를 취해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면 모를까, 조치가 늦어 누에바 에스파냐의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킨 후라면, 에스파냐에서 취할 행동은 반란의 진압이지 설득이 아닐 테고, 에스파냐가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일어난 반란을 힘으로 진압한다면 누에바 에스파냐의 경제는 초토화될 것이 분명했기에.
해서 북미왕국 대사는 안토니오 후작에게 따지듯 묻자, 안토니오 후작은 꽤나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그게...”
그리고 이런 안토니오 후작의 반응에 북미왕국 대사는 무척 답답하다는 얼굴로 살짝 목소리를 높였다.
“항공 우편으로 계속해서 전달되는 보고에 따르면 지금 누에바 에스파냐의 분위기가 정말 심상치 않습니다. 잘못하면 정말 누에바 에스파냐 전역에서 커다란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멜키오르 부왕의 정책을 막아야 하는데 에스파냐에서는 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겁니까.”
이에 안토니오 후작은 무언가 결심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쉬며 겨우 입을 열었다.
“...후우. 알아보니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일단, 제가 나서서 이번 누에바 에스파냐의 일을 알아본 결과 멜키오르 부왕이 기존의 누에바 에스파냐의 정책을 변경한 것은 멜키오르 부왕의 뜻이 아니더군요.”
안토니오 후작의 말에 북미왕국 대사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멜키오르 부왕의 뜻이 아니라면...설마?”
북미왕국 대사가 무언가를 눈치챈 듯 보이자, 안토니오 후작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멜키오르 부왕은 그저 본국의 명령을 따르고 있을 뿐이지요. 정확히는 국왕 폐하의 명령을 말입니다.”
“...예? 그게...사실입니까? 어...음.”
북미왕국 대사는 안토니오 후작의 말에 무척이나 당황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안토니오 후작이 말한 국왕 폐하라는 존재는 에스파냐의 국왕 카를로스 2세가 분명한데, 카를로스 2세는 몸이 무척 불편해 정상적으로 나라를 통치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근친혼의 결과 주걱턱이 심해 입을 다물지도 못했고, 상체에 비해 하체는 지나치게 빈약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으며, 뇌전증까지 앓고 있었으니 어찌 제대로 나라를 통치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북미왕국에서도 이번 일에 카를로스 2세가 개입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말이다.
헌데 안토니오 후작은 이번 일이 멜키오르 부왕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카를로스 2세의 뜻이라고 하니, 북미왕국 대사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이런 북미왕국 대사의 반응에 안토니오 후작이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후우. 대사께서도 아국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계시니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국왕 폐하의 모후께서 섭정을 거둔 이후로, 국왕 폐하께서 친정을 시작하셨습니다만 대사께서도 아시는 것처럼 국왕 폐하께서는 건강이 썩 좋지 않기에 모든 일을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그야...그렇지요.”
“해서 일부 신하들이 국왕 폐하를 돕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계시겠지요?”
“음...”
원래 에스파냐는 섭정인 마리아나 왕대비가 통치했다.
카를로스 2세가 4살 때, 필리페 4세가 사망하면서 카를로스 2세가 에스파냐의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는데, 당장 4살짜리 아이가 어떻게 에스파냐를 통치할 수 있겠는가.
해서 카를로스 2세의 모후인 마리아나 왕대비가 섭정을 맡게 되었고.
다만, 마리아나 왕대비 역시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고, 에스파냐를 통치할 능력도 없었기에, 섭정으로서 직접 에스파냐를 통치하기보다는 측근들을 재상으로 임명해 정치를 맡겼다.
헌데, 에스파냐에는 불행히도 이 측근들은 능력도 없었고, 에스파냐를 잘 다스리는 데도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권력 남용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지.
그러다 보니 필리페 4세의 사생아이자 카를로스 2세의 이복형인 돈 후안은 마리아나 왕대비가 임명한 재상들의 전횡을 막고, 더 나아가 마리아나 왕대비를 섭정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세력을 모았고.
이 때문에 에스파냐 정계는 이 권력 다툼으로 꽤나 혼란스러웠고, 이 권력 다툼은 원 역사보다 길어졌다.
북미왕국과의 존재 덕분에 에스파냐의 재정 상태가 전생보다는 나았고, 이 덕분에 섭정인 마리아나 왕대비를 지지하는 세력과 돈 후안을 지지하는 세력이 비등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돈 후안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며 이 기나긴 권력 다툼은 끝났고.
하지만 마리아나 왕대비의 측근들은 돈 후안의 죽음을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때마침 에스파냐의 정당한 통치자인 카를로스 2세가 성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카를로스 2세는 건강 문제로 제대로 나라를 통치하기 어려웠지만, 돈 후안을 지지했던 세력이 카를로스 2세가 성인이 된 이상, 카를로스 2세가 직접 에스파냐를 통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며 마리아나 왕대비가 섭정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명분이 카를로스 2세에게 있다 보니, 마리아나 왕대비는 결국 섭정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카를로스 2세가 직접 에스파냐를 통치하게 되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예상했듯 카를로스 2세는 근친혼의 결정체 같은 인물이라 수많은 장애와 질병을 달고 있었고, 그 때문에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제대로 나라를 통치하기 어려웠고.
자연히 카를로스 2세는 신하들에게 자신의 업무 일부를 맡겼다.
이러한 사실을 파악하고 있는 북미왕국 대사는 안토니오 후작의 말에 돌아가는 사정을 대충 눈치채고 확인차 질문을 던졌다.
“옛 돈 후안 밑에 있던 귀족들이 이번 사태의 원흉이라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은 에스파냐를 부흥시키려는 국왕 폐하의 신임을 얻기 위해 예전부터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했는데, 그중에 한 인사가 누에바 에스파냐는 원주민들을 위한 정책을 펴느라 재정을 낭비하고 있다면서, 일부 정책을 바꾸면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더 많은 자금을 확보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에스파냐를 부흥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 모양입니다.”
이에 북미왕국 대사는 표정을 완전히 구겼다.
그가 에스파냐에서 주재한 지 꽤 시간이 흘렀고, 에스파냐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나름대로 에스파냐 귀족들과 인맥을 쌓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었기에.
물론, 북미왕국 대사는 돈 후안이 살아있어 한창 에스파냐 정계가 혼란스러울 때, 괜히 타국의 정치 문제에 간섭하지 말라는 본국의 명령에 따라 두 세력의 귀족들과는 거리를 두었고, 이 때문에 현재 카를로스 2세의 측근이 된 옛 돈 후안 밑에 있던 귀족들과는 별다른 친분이 없긴 했다.
다만, 이 정도 규모의 일이 진행되면 자연스레 이런저런 말이 흘러나오기 마련이고, 당연히 에스파냐에 주재하는 북미왕국 대사에게도 이러한 사실이 흘러들어올 텐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안토니오 후작조차 이러한 사실을 미처 모르고 있다가 인맥을 동원해 움직인 끝에 이를 겨우 파악했다는 것은 그만큼 카를로스 2세의 측근 귀족들이 은밀하게 일을 진행했다는 뜻이었기에, 내심 경계심이 들 수밖에 없었고.
더불어 정보기관이 주로 민간에 떠도는 정보를 수집한다면, 외무청, 특히 자신 같은 대사급은 귀족들과 만나 정계의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꼴이라 나중에 본국에서 질책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았기에 더욱 입맛이 썼다.
해서 북미왕국 대사는 표정을 구겼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안토니오 후작의 시선이 느껴져 일단 표정 관리를 하며 대화를 계속했다.
“크흠. 그리고 귀국의 국왕 폐하는 그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여겨 받아들였고요?”
“...그렇습니다.”
안토니오 후작이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북미왕국 대사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짓다 문득 눈을 크게 떴다.
“잠깐만요. 허면 에스파냐 본토에서 군인 출신을 부왕으로 임명한 까닭이...?!”
이에 안토니오 후작이 답답한 듯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세금을 올리고 부역을 늘리면 원주민들이 반발할 것이 뻔하니까요.”
안토니오 후작의 대답에 북미왕국 대사는 다시 한번 표정을 구겼다.
안토니오 후작이 누에바 에스파냐를 통치할 때 이미 에스파냐에서는 누에바 에스파냐의 정책을 변경하기로 마음먹었고, 이를 위해 안토니오 부왕을 복귀시키고 군인 출신인 멜키오르를 새로이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으로 임명한 만큼, 그리고 멜키오르 부왕은 차근차근 누에바 에스파냐를 장악해 결국 본국의 명령대로 정책을 바꾼 셈이니, 인제 와서 안토니오 후작이 이를 막으려 해도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해서 북미왕국 대사는 반쯤 포기한 표정으로 안토니오 후작에게 물었다.
“허면 안토니오 후작께서 나서신다 한들, 이를 뒤집기는 어렵겠군요?”
“후우. 그렇습니다.”
안토니오 후작이 낙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북미왕국 대사는 이곳에서 안토니오 후작과 더 이야기해봐야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스파냐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허면 저는 이를 본국에 보고해야 하니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잠시만요. 혹시 이번 일로 우리 에스파냐와 북미왕국 간의 관계가 많이 악화되리라 여기십니까?”
막 몸을 돌리려는 북미왕국 대사에게 안토니오 후작이 질문을 던지자, 북미왕국 대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아국의 손해가 생각보다 클 것 같기는 한데...뭐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렇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