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3
오랜만에 가족 전체가 모여 저녁 식사를 한 후, 예전처럼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의 주제는 당연히 정안문의 대학 생활이었고.
정안문은 성적 때문에 고생은 많이 했지만, 비슷한 나잇대의 동기들과 함께 수업을 받고, 또 훈련받은 일이 퍽이나 즐거웠던지 밝게 웃으며 이야기했고, 이런 정안문의 모습에 정성국은 마음을 놓았고, 다른 가족들의 안색도 많이 밝아졌다.
그 후 밤이 깊어지자, 정성국은 그동안 정안문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하며 궁에서 쉴 때만큼은 충분한 수면을 취하라는 말과 함께 정안문을 자기 방으로 보내버렸고.
그렇게 정안문이 빠지자 다른 가족들도 하나둘 일어나 서로 인사한 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정성국에게 인사한 하얀 들꽃이 정성국을 바라보고 말했다.
“전하. 오늘은 형님과 함께 주무세요.”
정성국은 전아라, 하얀 들꽃을 모두 왕비로 맞이했기에, 잠자리 역시 번갈아 가며 가졌다.
즉, 홀숫날엔 전아라와 짝숫날엔 하얀 들꽃과 함께 잔다고 해야 할까.
물론 처음에는 왕비나 후궁을 여럿 두는 동양처럼 정성국은 따로 자신의 방에 머무르고, 그 날의 기분에 따라 혼자 자거나, 아니면 전아라나 하얀 들꽃의 방을 방문하기도 했었다.
다만, 정성국은 그날그날 정성국이 자신의 방에 올지, 오지 않을지 노심초사하는 전아라와 하얀 들꽃의 모습에, 이런 방식으로 바꾸었고.
번갈아 가며 전아라와 하얀 들꽃과 지냈기에 서로의 관계와 정도 깊어지고, 전아라와 하얀 들꽃 역시 서로를 견제할 이유가 없으니 둘의 사이도 훨씬 좋아졌기에 정성국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날마다 잠자리를 바꾸었다.
그리고 오늘은 짝숫날이라 원래는 하얀 들꽃과 함께 자는 날인데, 하얀 들꽃이 정성국에게 전아라와 자라고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하얀 들꽃의 마음 씀씀이가 기특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라를 위로해주라는 뜻이지?”
“예. 안문이의 반쪽이 된 얼굴을 본 이후, 형님께서 매우 속상하신 모양인 듯하더라고요. 그러니 전하께서 형님을 위로해주세요.”
이에 정성국은 흐뭇하게 웃다가 하얀 들꽃을 껴안고 살짝 입을 맞춘 후 말했다.
“알았어. 그리고 신경 써 줘서 고맙고.”
그리고 이런 정성국의 행동에 하얀 들꽃은 정성국의 품 안에서 배시시 웃었다.
“고맙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것을요.”
이에 정성국은 피식 다시 한번 하얀 들꽃에게 입을 맞춘 후 하얀 들꽃과 손을 잡고 응접실을 나섰고.
전아라의 방과 하얀 들꽃의 방이 나뉘는 갈림길에서 하얀 들꽃의 손을 놓으며 먼저 가라는 듯 손짓했다.
그리고 하얀 들꽃이 사뿐사뿐 복도를 걸어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 이후에야 몸을 돌려 전아라의 방으로 이동했고.
문을 두드릴까 잠깐 고민하던 정성국은 그냥 문을 슬며시 열었고, 커다란 침대에서 꽤나 복잡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전아라의 모습이 보였기에 정성국은 곧바로 전아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들은 전아라는, 정성국의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어? 여길 왜 오셨어요? 오늘은...”
“알아. 오늘은 하얀 들꽃과 자는 날이라는 거.”
“헌데 왜...”
정성국은 전아라의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왜긴 왜야. 네가 안문이를 보고 속상해하는 것이 뻔히 보이니 위로하러 온 거지.”
“아. 아니에요. 그런 거. 조금 놀랐을 뿐이고 이젠 괜찮으니 동생한테 가 보세요.”
하얀 들꽃을 먼저 생각하는 전아라를 보고 정성국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은 참 한결같네. 서로를 그렇게 생각해주니.”
“예?”
“하얀 들꽃이 그러더라. 네가 안문이를 보고 많이 충격받고 속상해하는 것 같으니, 오늘은 너를 꼭 위로해주라고. 그리고...내가 들어오기 전에 네 얼굴이 무척이나 복잡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하얀 들꽃이 이렇게 배려해준 게 고마울 뿐이고.”
“아...”
정성국이 이곳에 온 것이 하얀 들꽃의 배려라는 정성국의 말에 전아라는 하얀 들꽃에 대한 고마움이 가득한 탄성을 질렀고.
그런 전아라를 보고 정성국은 팔을 들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자신 쪽으로 당겨 전아라가 자신에게 기대게 한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속상해?”
이에 전아라는 어떻게 대답할지 잠깐 고민하다가, 이런 분위기에서 굳이 자신의 속마음을 숨길 필요는 없다고 판단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예. 솔직히 속상해 죽겠어요. 괜히 대학교에 보낸 건가 싶고.”
전아라가 마치 투정 부리듯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이런 전아라의 모습을 처음 보았기에 조금 놀라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대꾸했다.
“에이. 그건 아니지. 너도 알잖아? 나중을 생각하면 안문이는 더 다양한 경험을 쌓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솔직히 정나리도 그렇지만 정안문 역시 태어난 이후 궁 밖을 나갈 일이 많지 않았고.
궁 안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이들이라 봐야 정평국의 자식들 정도가 전부였으니, 또래 친구도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정성국은 초등 교육은 궁 내에서 자체적으로 가르쳐도 중등 교육부터는 외부의 시설에 맡기는 것이 아이들을 위해 나은 선택이 아닌가 싶었고.
다만, 호위 문제나 이런저런 걸리는 것이 많아 결국 취소할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정성국은 꼭 고등 교육 과정인 대학교만큼은 궁 내에서 자체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교에 보낼 생각을 한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이 일은 전아라, 하얀 들꽃과도 상의했던 일이고, 당시 전아라와 하얀 들꽃 역시 정성국의 말에 동의했었기에 정성국이 이를 슬쩍 언급하자 전아라가 조금 울상인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거야 알지만...후우. 솔직히 애 얼굴이 반쪽이 된 것을 보니 속상해서 그래요.”
이런 전아라의 모습에 정성국은 잔잔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해해. 나도 처음엔 조금 놀랐으니까. 다만...안문이는 내 아들이고, 또, 백성들은 당연히 안문이가 내 뒤를 이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 언젠가 한 번쯤은 겪었을 일이잖아.”
“후우. 그렇긴 하죠.”
전아라 역시 정안문이 정성국의 장남이라는 사실 때문에 언젠가는 겪었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런 전아라의 반응에 정성국은 전아라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리고 녀석은 스스로 주변의 압박을 이겨냈어. 그러니 다음에 이런 일이 또 발생하더라도 안문이는 잘 이겨낼 테고. 그러니 우리 안문이를 믿자.”
“...알았어요. 오라버니.”
* * *
정성국은 집무실을 찾아온 게으른 곰과 음흉한 여우를 반겼다.
지금 시점에서 이 둘이 자신의 집무실을 찾아올 이유라면 역시 정보기관의 정식 관청 설립 문제 때문일 것이 분명했기에.
그리고 예상대로 게으른 곰과 음흉한 여우는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꺼내며 정성국에게 보고서를 건넸고.
정성국은 보고서들을 빠르게 훑어본 후 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흠. 국내 정보국과 해외 정보국이라...”
이번에 설립될 두 정보기관인 국내 정보국과 해외 정보국의 이름을 되뇌는 정성국의 반응이 왠지 모르게 긍정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음흉한 여우가 슬쩍 입을 열었다.
“조금 직관적이긴 한데...어차피 관청의 이름이니만큼 직관적인 이름을 붙이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에 정성국은 보고서를 내려놓고 음흉한 여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뭐 자네 말대로 관청의 이름이니 직관적이어서 나쁠 것은 없지. 다만...”
“다만?”
“너무 직관적이라 타국이 위협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군.”
“예?”
정성국의 말에 음흉한 여우는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때 옆에 있던 게으른 곰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흠. 국내 정보국이야 크게 상관없지만, 해외 정보국이 문제 될 거라고 여기십니까?”
이에 정성국은 자신의 생각을 어느 정도 짐작한 게으른 곰에 슬쩍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래. 뭐 다른 나라도 암암리에 타국의 정보를 수집하기는 하지만, 대놓고 하지는 않지 않나. 쉬쉬하는 편이지. 헌데 우리가 타국의 정보를 수집하는 정식 관청을 설립하고 이름마저 해외 정보국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면...다른 나라들이 꽤나 위협적으로 받아들일 것 같네. 이름만 놓고 생각해보면 직접적으로 다른 나라의 정보를 수집하겠다고 선포하는 꼴이지 않은가. 특히 아국과 타국의 국력 차이를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게 느낄 테고.”
정성국의 이야기에 음흉한 여우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크게 떴고.
다만 게으른 곰의 생각은 조금 다른지 조심스럽게 반박했다.
“저도 처음 해외 정보국이라는 이름을 접했을 때, 그런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다만 어차피 정보기관이 공식 관청이 된 이상, 어느 정도의 정보는 알려질 테니 이름은 크게 상관없을 거라 여겼습니다만...”
정보기관을 계속해서 비공식 관청으로 둔다면 모를까, 어차피 정식 관청이 되면 자연히 그 관청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려질 테니, 관청의 이름 따위는 크게 상관없을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게으른 곰이었고.
이에 정성국이 무어라 이야기하려 할 때, 한발 먼저 음흉한 여우가 끼어들어 게으른 곰에게 말했다.
“아니야. 가뜩이나 정보기관이 정식 관청이 되면 타국의 경계를 받을 것이 분명한데, 관청의 이름마저 노골적으로 해외 정보국이라고 이름 붙이면 확실히 곤란할 것 같아.”
그러면서 음흉한 여우는 면목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정성국에게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타국의 반응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음흉한 여우가 그동안 맡은 업무가 바로 해외 정보의 수집이니만큼, 해외 정보국이라는 이름에 타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음흉한 여우가 먼저 고려했어야 했다.
헌데 자신은 이를 간과했고, 게으른 곰이나 정성국이 이 점을 지적하니 음흉한 여우는 자신이 키워온 정보기관이 정식 관청이 된다는 것에, 그리고 자신이 국장이 된다는 사실에 너무 들떴었다는 생각이 들어 정성국에게 면목이 없었고.
해서 정성국에게 정식으로 죄를 청하자 정성국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음흉한 여우의 허리를 들게 하며 말했다.
“아. 아닐세. 내가 조금 예민하게 생각한 것도 없지 않으니 그렇게 면목 없다는 얼굴을 할 필요가 없어. 그보다 관청의 이름이 문젠데...따로 정해둔 이름이 없다면 해외 정보국은 해외를 뺀 정보국으로, 국내 정보국은 방첩국 혹은 안보국이 어떨까 싶은데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저야 크게 상관 없습니다만...”
정성국의 제안에 음흉한 여우는 대답하면서 슬쩍 옆에 있는 게으른 곰의 눈치를 살폈고.
게으른 곰은 정성국이 제안한 방첩국, 혹은 안보국의 이름을 몇 번 되뇌다 말했다.
“흠. 방첩국은 어감이 좀 강한 것 같으니 안보국으로 하겠습니다.”
게으른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이름 문제는 해결되었고. 다음 문제는 예산 문젠데...솔직히 아국의 재정 상황에서 이 정도 예산을 배정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없어. 헌데 이렇게 단기간에 규모를 키우는 것이 가능하겠나? 다른 관청이라면 모를까 정보국, 안보국의 특성을 생각하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게으른 곰과 음흉한 여우가 가져온 보고서에 따르면, 새로 신설될 정보국, 안보국의 예산을 현재보다 대략 4배로 잡았다.
그리고 예산과 관청의 규모가 비례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게으른 곰과 음흉한 여우는 정보국과 안보국의 규모를 4배 가까이 키운다는 뜻과도 같았고.
헌데 적당히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한 백성을 채용하면 되는 다른 관청들과는 달리, 정보국, 안보국의 특성을 생각하면, 아무나 채용할 수는 없었기에, 이렇게 단기간에 정보국, 안보국의 규모를 늘릴 수 있냐는 정성국의 물음에 게으른 곰이 답했다.
“솔직히 쉽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요.”
“그래?”
“예. 이미 북미왕국에 충성하는 집단이 있지 않습니까.”
게으른 곰의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갸웃했다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눈을 빛냈다.
“아. 군사청 소속 병사들을 끌어들이겠다?”
이에 음흉한 여우가 빙긋 웃으며 끼어들었다.
“예. 물론 정보국과 안보국의 모든 이들을 군사청 소속 병사들로 채울 생각은 아닙니다만, 당장 늘려야 하는 중간 관리직 들의 업무는 병사들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병사들 가운데 입이 무겁고 진중한 이들을 대거 채용해 규모를 키울 생각이니...그 부분은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확실히 그렇군. 그럼 단기간에 정보국, 안보국의 규모를 키울 수 있겠어. 물론 유능한 인재를 빼간다고 군사청장이 무척 투덜대기야 하겠지만...그건 알아서 감당하도록 하게. 하하하.”
“끙...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