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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822화 (822/850)

#822

정성국은 여름 방학이 되어 궁으로 돌아온 정안문을 보고 보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이것 참. 군사대학에서의 생활이 그리 만만하진 않았던 모양이구나. 고작 반년 만에 얼굴이 반쪽이 되다니.”

원래 정성국은 올 초 군사대학에 입학할 정안문의 입학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찰스 2세의 죽음으로 유럽에서의 체류가 길어지면서, 군사대학의 입학식에 참석하지 못했고.

여기에 군사대학의 경우 학생들의 사사로운 외출을 허락하지 않았고, 주말에 가족이 직접 군사대학을 방문해 면회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정안문은 정성국을 비롯해 왕실 가족들이 군사대학에 방문하는 것을 꺼렸고, 이러한 정안문의 선택을 존중한 정성국은 유럽 일정을 모두 마무리한 후, 북미왕국으로 돌아와 정안문의 면회를 가지 않았다.

그리고 군사대학의 경우 다른 종합 대학교와는 교과과정이 조금 달랐고, 그만큼 한 학기가 길었다.

보통 다른 종합 대학교의 경우, 한 학기가 4개월 정도라면, 군사대학의 경우 일반 교육과 더불어 군사 훈련까지 진행하는 터라, 한 학기가 5개월이 조금 넘는다고 해야 할까.

그러다 보니, 정성국은 거의 반년 만에 아들인 정안문의 얼굴을 보게 된 셈인데, 정안문의 외향은 정성국의 기억과는 달랐고, 정성국의 예상과도 달랐다.

원래 정안문은 꽤 건장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보통 왕족들은 먹는 것에 비해 활동이 적어 통통한, 혹은 뚱뚱한 체형이 많았지만, 정성국의 명령 때문에 운동을 꾸준히 해왔기에 자연히 보기 좋을 정도로 건장한 체격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군사대학에서는 장교가 될 학생들의 체력 단련을 중요시하는 만큼, 궁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체격이 좋아질 것으로 예상했고.

헌데 지금 정성국의 눈에 보이는 정안문의 체격은 오히려 이전보다 마른 느낌이었고, 얼굴 역시 반쪽이 되었다고 느낄 정도로 엄청나게 빠져 있었기에, 정성국은 정안문의 얼굴을 보고 헛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고,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정안문은 멋쩍은 미소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하하. 좀 그렇죠?”

다만, 정안문의 모습에 고생 좀 했겠구나 싶어 헛웃음을 터트린 것으로 끝낸 정성국과는 달리 전아라는 오랜만에 본 아들의 얼굴이 반쪽이 된 것에 꽤나 충격을 받은 눈치였고, 하얀 들꽃이나 정나리 역시 비쩍 마른 정안문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급히 정안문에게 다가갔다.

“어머. 어떻게 해. 정말 많이 말랐구나. 혹시 누가 괴롭히기라도 하니?”

하얀 들꽃이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정안문의 팔을 만지작거리며 묻자 정안문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전혀 아닙니다. 작은어머니. 군사대학의 선생들도 동기들도 모두 제 신분을 뻔히 아는데 어찌 저를 괴롭히겠습니까.”

물론 정안문이야 자신의 신분을 비밀로 하고 싶어했지만, 그게 가능하겠는가.

특히, 정안문의 입학식에 전아라와 정나리까지 참석했는데.

물론 군사대학에서는 정안문이 불편해할까 봐 쉬쉬하긴 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정안문이 군사대학에 입학했다는 사실이 퍼져 나갔고.

그러니 군사대학 내에서 정안문을 건드릴 만한 이들은 없었다.

여기에 정안문은 정성국의 장남이고 대외적으로는 정성국의 유일한 후계자로 알려진 만큼, 정안문을 건드릴 만한 이들은 없었다.

오히려 선배들조차 정안문에게는 존댓말을 할 정도라 곤란할 정도였지.

해서 정안문이 이를 이야기하며 하얀 들꽃에게 그런 일은 전혀 없다고 일축하자, 옆에 있던 정나리가 끼어들었다.

“근데 오빠는 왜 그리 말랐어? 설마 군사대학에서 나오는 밥이 별로야?”

정안문과 정나리의 사이는 이복남매라기보다, 친남매에 가까울 정도로 무척 친한 편이었다.

물론 이는 정성국의 가정 교육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울릴 수 있는 비슷한 또래가 많지 않다 보니, 자연스레 친구처럼 지내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정나리는 정안문의 모습에 마음이 상한 모양인지 표정을 잔뜩 찌푸리며 혹여 음식이 맞지 않은 것인지를 물었다.

생각해보면 정나리 자신도 그렇지만, 정안문 역시 태어났을 때부터 왕실 숙수들이 정성을 다해 만든 음식들만 접했기에, 일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정안문은 자신을 보고 속상해하는 정나리를 보고 빙긋 웃으며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아니야. 엄청 잘 나와. 매일 고기반찬도 푸짐하게 나오고, 자율배식이라 마음껏 먹을 수도 있고, 중간에 간식도 나오니까. 뭐 맛이야 조금 떨어지긴 하지만, 내 입맛이 그렇게 예민한 것도 아니고,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처럼 배고프니 배를 채우는 게 우선이라...”

“그럼 잠자리가 불편해?”

“에이. 아니야. 군사대학 기숙사 시설 정도면 솔직히 괜찮은 편이거든.”

개발청에서 대학교를 건설할 때, 가장 신경 쓰는 것이 바로 기숙사 시설이었다.

북미왕국은 땅덩이가 워낙 넓을뿐더러, 대학이 몇 개 없는 터라, 대학생 대부분은 기숙사에서 지내야 하는 만큼, 정성국도, 그리고 교육청에서도 다른 어떤 시설보다 대학생들이 대학 생활 내내 머물게 될 기숙사 시설을 가장 신경 써 달라고 요청한 탓에, 개발청에서는 기숙사 건설에 가장 공을 들일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대학생들은 기숙사에서 편히 지낼 수 있었고, 이는 정안문도 예외가 아니었기에 정나리의 물음에 웃으며 고개를 젓자, 정나리가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시설이 문제가 아니라...다른 사람들하고 같은 방을 써야 하니 불편할 거 아니야.”

일부 종합 대학교의 기숙사에는 개인실도 존재하긴 했지만, 군사대학의 기숙사는 예외 없이 다인실이었다.

다만, 정안문의 신분이 신분인 만큼, 군사대학의 학장은 정안문을 배려해 다인실 하나를 그냥 내어주려 했었다.

입학식 때 전아라와 정나리가 참석하자, 학장은 입학식이 끝난 후 이 둘과 정안문을 따로 학장실로 불러 잠깐 이야기를 나눴었고, 이때 정안문에게 다인실에 혼자 머무는 것이 어떻겠냐고 슬쩍 제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안문은 이러한 학장의 배려를 정중히 거절했다.

정안문이 다인실을 혼자 사용한다면, 구설수에 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거기에, 군사대학의 기숙사가 다른 대학교들과는 달리 개인실이 전혀 없이 다인실로 구성된 것은 장교가 되기 전 단체 생활에 익숙해지라는 의미였으니 더더욱 이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고.

다만 정안문은 지금까지 궁에서만 살아왔고, 단체 생활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었기에, 전아라나 정나리는 학장의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정안문은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내며, 이 기회에 단체 생활을 하며 동기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안문의 대답에 학장은 무척이나 흐뭇해하면서 그런 생각이라면 충분히 잘 적응할 수 있을 거라 덕담을 해주기도 했고.

헌데 지금 정안문의 모습을 보아하니, 분명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했고, 밥은 잘 먹는다고 하니 잠자리가 불편해 제대로 자지 못해 저렇게 수척해졌다고 생각해 정나리가 퉁명스레 말을 하자, 정안문은 그런 동생이 귀여운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전혀 안 불편해. 나도 처음엔 조금 걱정했는데, 오히려 시끌벅적하니 괜찮더라.”

“그래?”

“그럼. 그리고 솔직히 수업에 체력 단련에, 개인 공부까지 끝내면 피곤해서 기숙사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지는 게 다반사라 뭐...”

이러한 정안문의 대답에 정나리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정안문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괴롭히는 사람도 없고, 밥도 잘 나오고, 잠자리도 괜찮은데 왜 이렇게 말랐어? 뭐가 문젠데?”

“어. 그게...”

정나리의 질문에 정안문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조금 난처하다는 얼굴로 말을 흐리자, 정성국이 피식 웃었다.

정성국은 정안문이 왜 저렇게 수척해진 것인지 대충 짐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해서 정성국은 정안문을 바라보고 물었다.

“주변의 시선 때문에 압박감이 심하냐?”

이에 정안문은 어떻게 알았느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정성국을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음...뭐 비슷합니다. 정확히는 저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압박감이 생각보다 심해서요.”

“그렇겠지. 일단 넌 내 아들이니까.”

정안문은 정성국의 장남이자 유일한 아들이었다.

그리고 북미왕국 백성에게 정성국이 살아있는 신과 비슷한 위치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정성국의 유일한 후계자로 알려진 정안문에게 갖는 기대감이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어마어마한 기대감은 정안문에게는 어마어마한 압박감으로 다가왔을 테고.

다만, 이 압박감을 견디지 못해 수척해진 것인지, 아니면 이 압박감을 견디고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다 수척해진 것인지는 정성국도 판단하기 어려웠기에, 정안문이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 판단하기 위해 아들의 대답을 기다렸고, 곧 정성국의 귓가에 아들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그래서 군사대학의 선생들도, 그리고 선배들과 동기들도, 묘하게 제 능력 이상을 기대하는 눈치라서 말입니다. 헌데 이에 부응하려면 결국 좋은 성적을 내야 하는데 동기들이 만만치 않다 보니...”

“하하하. 그렇겠지.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군사대학에 입학한 친구들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을 거라고.”

정성국은 정안문의 말에, 유럽을 방문하기 전 정안문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라 웃음을 터트렸다.

정안문은 정성국의 유럽 방문 소식을 듣고, 군사대학에 입학하기 전, 유럽을 방문하고 싶어했지만, 정성국은 정안문이 군사대학에 입학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그리고 이를 통해 정안문이 어떤 정신적인 압박을 받을지 뻔히 보였기에, 군사대학에서의 생활을 미리 준비하라고 조언해주었었다.

다만, 정안문은 이런 정성국의 조언에도 꽤 자신만만한 눈치였기에, 정성국은 결국 정안문이 군사대학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졸업 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허락하겠다는 약속까지 해주면서 정안문이 군사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체력 단련과 공부를 시킬 수 있었고.

정안문 역시 정성국의 말에, 이전의 대화가 떠올랐는지 멋쩍은 표정으로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예. 저도 호위대와 함께 운동하면서 나름대로 체력을 길렀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의 말처럼 제 동기들과 비교하니 하위권에 불과하더군요. 그리고 다른 과목들의 성적 역시 겨우 중위권에 불과했고요. 해서 이를 만회하려다 보니...”

“흠. 그럼 잠도 줄여가며 공부에 매달린 거냐? 그래서 그렇게 야윈 거고?”

“하하하. 뭐 그렇죠.”

정성국의 질문에 정안문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정안문의 대답에 전아라나 하얀 들꽃, 정나리는 꽤나 복잡한 표정으로 정안문을 바라보았지만, 정성국은 정안문의 대답에 내심 흡족해했다.

정안문은 압박감을 견디지 못해 수척해진 것이 아니라, 압박감을 연료로 삼아 과하게 노력하다 수척해진 셈이었으니, 차후에 정안문에게 비슷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정안문은 충분히 이겨낼 수 있으리라 생각된 탓이다.

다만, 정안문의 앞에서, 그리고 정안문의 대답에 무척이나 심란해 보이는 가족들 앞에서 이러한 기쁨을 내색할 정도로 정성국이 멍청하진 않았기에, 겉으로는 혀를 찼다.

“쯧. 그래서. 성적은 좋아졌고?”

이에 정안문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예! 기말시험에서는 그래도 상위권까지는 올라갔습니다.”

이런 정안문의 모습에 전아라나 하얀 들꽃, 그리고 정나리는 정성국을 바라보며 제발 정안문을 말리거나 꾸짖어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아무리 공부가, 학업이 중요하다지만, 몸이 상할 정도로 매달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라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기에.

하지만 정성국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들의 바람과는 달랐다.

“됐다. 그럼.”

“예?”

“하지만...”

정성국의 말에 전아라나 하얀 들꽃이 무어라 이야기하려 했지만, 정성국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만, 고작 주변의 시선이나 기대에 얽매여 계속해서 건강을 헤칠 생각은 아닐 것이라 믿는다.”

이에 정안문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물론 그래야지요. 저도 점차 체력이 떨어지는 것 같아, 앞으로 수면 시간만큼은 철저히 지킬 생각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정안문의 대답에 전아라와 하얀 들꽃, 정나리는 조금 안심하면서도, 여전히 걱정스럽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정성국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겨 이야기의 주제를 슬쩍 틀었다.

“그래. 나와 가족들과 한 약속이니 지키리라 믿으마. 그보다 군사대학의 방학은 좀 짧았지? 3주였던가?”

“그렇습니다.”

“그럼 그때까지는 궁에서 푹 쉬거라. 알겠지?”

“하하하. 알겠습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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