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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821화 (821/850)

#821

수많은 보고서를 취합하고 분석하던 게으른 곰은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자 고개를 들었고.

싱글벙글한 얼굴로 집무실을 들어오는 음흉한 여우의 모습에 의외라는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어? 네가 여긴 웬일이냐? 그리고 손에 든 건 또 뭔데? 그거 술 아니야?”

주로 새한성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게으른 곰과는 달리, 음흉한 여우는 새김포, 새진주, 보스턴 등을 돌아다니면서 해외 정보를 취합하고 있었다.

물론, 북미왕국의 통신이 발달하고, 각 지역에 전화선이 깔린 이후에는 게으른 곰처럼 한곳에 머물며 정보를 취합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테지만, 음흉한 여우는 직접 해외의 정보가 일차적으로 취합되는 장소를 돌아다니면서, 분위기를 살피는 것을 좋아했달까.

이 때문에 1년에 3개월 정도를 제외하면 항상 각 지역을 전전했었고, 최근까지 새한성에서 머물다 다른 지역을 둘러보겠다며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새한성에 나타난 음흉한 여우의 모습에 게으른 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여기에 음흉한 여우는 다른 때와는 달리, 고급 술병이 분명해 보이는 호리병을 들고 왔는데, 게으른 곰이나 음흉한 여우 둘 다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던 탓에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은 얼굴로 음흉한 여우를 바라보았고, 그런 게으른 곰의 반응에 음흉한 여우가 씩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술이지. 내가 축배를 들어야 할 정도로 끝내주게 좋은 소식을 가져왔거든!”

“엥? 무슨 소식?”

음흉한 여우는 집무실 책상 위에 술병을 내려놓고, 맞은편 의자에 앉으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방금 어딜 들렀다 온 줄 아냐?”

음흉한 여우의 질문에 게으른 곰이 고개를 갸웃했다.

“음? 뭐야. 새한성에 도착했으면 바로 이곳으로 와야지 다른 곳을 들른 거야? 아. 혹시 집에 들렀다 온 거냐?”

“집은 무슨. 궁에 가서 전하를 알현하고 온 길이다.”

“엥? 거길 왜?”

“누에바 에스파냐의 일로 급히 보고할 것이 있었거든.”

이에 피곤함에 절어있던 게으른 곰의 눈빛이 뒤바뀌었다.

음흉한 여우가 직접 정성국을 알현해 보고할 정도의 사안이라면, 분명 보통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에바 에스파냐? 뭔 일 있어?”

“아. 그게...”

음흉한 여우가 누에바 에스파냐의 일을 설명해주자 워낙 일이 바빠 제때 면도하지 못해 삐죽거리는 턱수염을 매만지며 이러한 설명을 유심히 듣던 게으른 곰은 중얼거렸다.

“흠. 반란이라. 정말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반란이 일어난다면...남부 지역이 조금 시끄럽겠네.”

게으른 곰은 국내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부서를 담당하고 있는 터라 누에바 에스파냐의 분위기가 국내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를 우선할 수밖에 없었고.

특히, 북미왕국 남부의 애리조나 지역이나 텍사스 지역의 경우는 멕시코 출신 원주민들이 많이 정착한 터라, 누에바 에스파냐의 일이 알려지면 여러모로 시끄러워질 수밖에 없고, 자칫하면 의도하지 않은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게으른 곰이 조금 걱정스럽다는 어조로 중얼거리자 음흉한 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러니 당분간은 신경 좀 써야 할걸?”

“아. 그래야겠지. 헌데...이게 축배를 들 정도로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물론 그렇지. 그건 다른 건수거든.”

“대체 뭔데. 그 다른 건수가.”

게으른 곰이 빨리 말하라는 시선을 보내자 음흉한 여우가 히죽 웃으며 그러한 시선을 잠시 즐기다 입을 열었다.

“누에바 에스파냐의 일을 보고하고 나서, 전하와 잠깐 정보기관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거든? 그러다...전하께서 그러시더라고. 슬슬 정보기관을 공식 관청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말이야.”

“뭐?! 이런 젠장! 좋은 소식이라면서! 이게 어떻게 좋은 소식이냐! 나쁜 소식이지! 그것도 끔찍하게 나쁜 소식!”

자신의 말에 질색하는 게으른 곰의 반응은 정성국이 예측한 것과 비슷했기에, 음흉한 여우는 키득거리며 웃다가 말했다.

“야. 그동안 우리가 키워온 정보기관이 드디어 공식 관청이 되는데 이게 어떻게 나쁜 소식이냐. 좋은 소식이지.”

“그걸 말이라고. 야. 정식 관청이 되면 당분간은 일이 넘쳐날 것이 뻔하잖아!”

정보기관이 비록 비공식 관청이었지만, 그 규모는 생각보다 컸다.

그러니 정보기관이 정식 관청이 되어 제대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막대한 업무를 감당해야 할 것은 뻔해 보였고.

해서 게으른 곰이 학을 떼며 소리치자, 음흉한 여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그렇기야 하겠지. 특히 정식 관청이 되면 규모를 대폭 키워야 할 테니, 당분간은 정신없을 것 같고. 하지만 정보기관의 규모가 커질수록 아국이 안전해질 테니 그 정도야 감수해야 하지 않겠어?”

“젠장...”

음흉한 여우의 말대로, 지금까지 정보기관은 꾸준히 인원을 확장하며 그 규모를 키워오고는 있었지만, 비공식 관청이었기에 한계가 있긴 했다.

정보기관의 존재 자체가 비밀이다 보니, 그리고 업무의 특성상 아무나 끌어들일 수가 없었기에 다른 관청과는 달리 인원을 대폭 늘려 규모를 빠르게 확장하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허나, 정보기관이 정식 관청이 된 이상 그러한 제약은 줄어들 테고, 그렇게 제약이 줄어들면 자연히 정보기관의 규모가 커지면서 더 많은 정보원, 분석가, 수사관, 공작원 등을 확보할 수 있게 되어 북미왕국이 더욱 안전해질 테니, 북미왕국을 위해서라면 이를 감수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음흉한 여우의 정론에 게으른 곰은 투덜거리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게으른 곰의 수긍에 음흉한 여우는 피식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정보기관이 공식 관청이 된 덕분에 승진할 수 있게 되었으니 축배를 들 정도로 좋은 소식 맞아.”

“아니. 아국에서는 고위급 관리가 될수록 일만 많아지는데 승진이 뭐 그리 좋다고...”

다른 나라라면 고위급 관리가 될수록 그만한 권력을 쥐게 되는 셈이라 좋아라 하겠지만, 북미왕국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북미왕국의 발전은 다른 나라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기에, 그만큼 고위급 관리가 감당해야 할 업무는 어마어마했고, 고위급 관리들이 이 업무를 제때 처리하지 못한다면 북미왕국의 발전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는 터라, 고위급 관리들은 퇴근까지 미뤄가며 업무에 매달리느라 자신들이 쥔 권력을 제대로 써먹을 시간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게으른 곰으로서는 승진한다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자신의 친구가 오히려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며 투덜거렸고.

음흉한 여우는 그런 게으른 곰의 반응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가져온 술병의 마개를 열고, 게으른 곰 앞에 있는 빈 찻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에헤이. 그래도 정보기관의 초대 국장이라면 분명 역사에 이름이 남을 거라고. 그 정도면 가문의 영광이라 남들은 좋아 죽을 텐데, 넌 뭐 그리 불만이 많냐. 자. 이거 마시고 불만은 깔끔하게 털어내 버려.”

음흉한 여우가 술을 따를 때까지만 해도 뚱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게으른 곰은 음흉한 여우의 말에 눈을 번뜩였다.

“국장? 국급 관청이라고? 그럼 역시나 정보기관을 분리하는 모양이네?”

게으른 곰에게 술을 따른 후, 자신의 찻잔에 술을 따르던 음흉한 여우는, 게으른 곰의 질문에 살짝 놀라며 물었다.

“허. 어떻게 알았냐?”

“대내외의 정보를 모두 수집하는 현 정보기관의 위상과 업무를 생각하면 국급 관청은 낮잖아. 그걸 전하께서 모르실 리 없는데 청급 관청이 아니라 국급 관청으로 만드신 것을 보면, 정보의 독점으로 훗날 정보기관이 북미왕국에 악영향을 끼치실 것을 염려해 처음부터 업무에 따라 정보기관을 분리해 정식 관청으로 만들기에 국급 관청으로 정했다는 결론이 나오지.”

이에 음흉한 여우는 역시나 하는 표정을 지으며 술병을 내려놓고 게으른 곰에게 엄지를 추켜올렸고.

“오. 정보를 다루는 정보기관의 수장다운 분석력이었어.”

하지만 게으른 곰은 음흉한 여우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됐고. 그보다 업무에 따라 국내 정보 부서와 해외 정보 부서를 분리하는 것 맞지?”

“맞아. 그리고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새로 신설될 해외 정보를 수집하는 국급 관청은 내가 맡고, 국내 정보를 수집하는 국급 관청은 네가 맡는 거지. 아. 그리고 전하께서는 국급 관청의 이름을 우리가 알아서 정하라고 하시더라.”

“이름이라...넌 정했어?”

“해외 정보국이 어떨까 싶은데?”

정식 관청이 된 만큼, 다른 관청처럼 직관적인 이름을 붙이는 것이 맞겠다 싶어 음흉한 여우는 이곳에 오면서 자신이 맡을 해외 정보를 담당하는 국급 관청에 해외 정보국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를 이야기하자 게으른 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해외 정보국? 그럼 우린 국내 정보국이라고 이름 붙이면 되겠네.”

“야. 그거 너무 대충 아니냐?”

이런 음흉한 여우의 지적에 게으른 곰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잠시 음흉한 여우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자기 앞에 높인 술이 담긴 찻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킨 후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게 네가 할 말이냐.’

* * *

에스파냐로 복귀한 안토니오 후작은 제3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가 젊었을 적, 에스파냐의 후작으로서 활동했을 때가 제1의 전성기, 그리고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으로서 활동했을 때가 제2의 전성기였다면, 지금은 스스로 제3의 전성기라 여길 정도로 자신을 찾는 귀족들로 인해 정신없을 정도였달까.

이는 당연히 북미왕국 덕분이었다.

안토니오 후작은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 시절, 북미왕국을 무척 높이 평가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공을 들여왔고, 덕분에 북미왕국과 합작해 에스파냐의 숙원 사업이던 파나마 운하마저 건설해냈다.

그런 만큼 에스파냐 귀족들은 안토니오 후작이 북미왕국에 나름 연줄을 만들어 두었다고 생각했고.

특히, 안토니오 후작은 에스파냐로 복귀하기 전, 북미왕국을 방문해 정성국을 알현하고 꽤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까지 알려졌으니, 북미왕국과 어떻게든 끈을 만들어 두려는 귀족들이 안토니오 후작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안토니오 후작은 에스파냐 본토로 복귀해 뒷방의 늙은이로서 남는 것이 아니라 사교의 중심이 되어 버렸고.

그렇기에 안토니오 후작은 자신을 찾아온 북미왕국 대사를 진심으로 환영했고, 북미왕국 대사가 전한 누에바 에스파냐의 소식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그게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누에바 에스파냐 각지를 돌아다니는 에스파냐 상인들이 현지의 분위기가 너무 좋지 않다면서 반란을 걱정할 정도라고 합니다. 이에 국영 상단에서 급히 본국에 소식을 전했고, 본국에서는 이러한 누에바 에스파냐의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해 급히 저에게 소식을 전해온 겁니다. 아마 시간이 흐르면 제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겠지요.”

북미왕국 대사의 말에 안토니오 후작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허어. 멜키오르 부왕은 대체 왜 그런 어리석은 정책을...”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명백한 사실은, 이대로라면 누에바 에스파냐에서는 반란이 발생할 거란 점이고, 그렇게 되면 에스파냐뿐만 아니라 아국에도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한창 탄식하던 안토니오 후작은 북미왕국 대사의 지적에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아. 그렇겠군요. 반란이 발생하면 당연히 북미왕국의 수출에도 영향을 끼칠 테니까요.”

“예. 특히, 반란이 일어나면 고무나 구아노의 수급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고, 저희는 그 점이 무척 걱정스럽습니다. 또한, 안토니오 후작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아국에는 누에바 에스파냐 출신 이주민들이 꽤 많은 터라, 고향과 친구가 반란을 일으킨다면 동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일이 극단으로 치닫기 전에 에스파냐에서 멜키오르 부왕의 행동에 제동을 걸어주었으면 하는데, 이를 제가 직접 거론하기에는...”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흐리는 북미왕국 대사를 보고 안토니오 후작은 북미왕국 대사가 왜 자신을 찾아와 이를 이야기하는지 파악하고 입을 열었다.

“아. 이해합니다. 북미왕국 대사께서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의 정책을 거론하는 것은 내정 간섭으로 여겨질 수도 있으니까요. 허니 제가 나서야겠군요.”

“오. 그래 주시겠습니까?”

북미왕국에서 원하는 대로 움직일 의사를 보이는 안토니오 후작을 보고 북미왕국 대사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을 때, 안토니오 후작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저도 제가 20년 넘게 발전시켜 온 누에바 에스파냐가 엉망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니까요. 다행히 최근에 저를 좋게 봐 주시는 귀족들이 있으니, 이들과 논의해 함께 움직인다면,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상황이 급한 만큼 바로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

“아. 그러시지요. 그리고 이 자료들은 다른 귀족분들을 설득하는 데 사용하시고요.”

“감사합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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