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0
음흉한 여우가 떠난 이후, 정성국은 전화로 조용한 곰을 호출하고, 조용한 곰이 오기까지 티테이블에 앉아 음흉한 여우가 가져왔던 누에바 에스파냐에 관련된 보고서들을 제대로 살펴보기 시작했고.
보고서들을 모두 확인했을 때쯤,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며 조용한 곰이 들어왔기에, 정성국은 마지막으로 읽고 있던 보고서를 내려놓고 조용한 곰을 반겼다.
“아. 왔나? 여기 앉게.”
정성국이 조용한 곰에게 자리를 권하며 냉차를 따라주자, 조용한 곰은 이를 조심스럽게 받아들며 말했다.
“아. 감사합니다. 전하. 헌데 갑자기 무슨 일로 찾으신 겁니까?”
“그게 말이지...”
정성국은 조용한 곰에게 누에바 에스파냐의 현지 사정에 관해 자세히 설명했고, 냉차를 홀짝이며 정성국의 이야기를 듣던 조용한 곰은 설명이 끝나자 탄식을 토해냈다.
“허어. 최근 누에바 에스파냐가 조금 시끄럽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는데...원주민들이 반란까지 생각하고 있단 말입니까?”
“정보기관의 보고로는 그렇다더군. 그리고 원주민 중 일부는 아국에 도움을 요청한 상태이고.”
정성국의 말에 조용한 곰은 놀란 표정으로 급히 질문을 던졌다.
“예? 도움이라니요. 대체 무슨 수로 아국에 도움을 요청한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이미 반란군이 조직되었다는 뜻입니까?”
“아. 그건 아니고, 자네도 알다시피 누에바 에스파냐에는 정보기관의 정보원들이 있지 않나. 그리고 이 정보원 중에 상당수가 원주민들이다 보니, 이들이 요청한 걸세.”
일반 정보원들은 자신이 북미왕국을 위해 정보를 수집한다는 사실을 당연히 모른다.
일반 정보원들이야 돈으로 고용된 이들이니만큼, 언제든 노출될 수 있다고 봐야 했기에, 이들에게는 철저히 비밀로 했달까.
다만, 이런 일반 정보원들을 관리하고, 일반 정보원들이 가져온 정보를 북미왕국에 넘기는 중간 관리자들은 자신들이 북미왕국을 위한다는 사실을 알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원래 정보기관에서는 중간 관리자들을 모두 북미왕국인들로 채우려 했지만, 정보기관의 인원이 넘쳐나는 편은 아니었기에, 결국 일반 정보원 가운데 그나마 믿을 만하고 북미왕국에 호의적인 이들을 중간 관리자로 승진시켜 일을 맡겼었다.
헌데, 이들이 멜키오르 부왕의 폭거에 분개하면서 기존의 연락망을 통해 북미왕국에 도움을 요청했다는 정성국의 설명에 조용한 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렇습니까. 그럼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도움이라면 설마 아국의 개입을 원하는 겁니까? 아니면...”
“에스파냐군에 대항할 수 있도록 무기를 제공해주길 원하고 있다더군.”
이에 조용한 곰의 안색은 심각해졌다.
“무기를 제공해 달라는 것은...결국 에스파냐의 통치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거군요.”
“그렇지. 해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의논하기 위해 자네를 급히 부른 걸세.”
정성국의 대답에 조용한 곰은 고심하다가 슬쩍 정성국의 안색을 살피며 질문을 던졌다.
“흐음...역시 전하께서는 이번 일에 개입하시기를 원하시는 겁니까? 전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이번 일에 아국이 개입하는 것은 부담이 큽니다.”
이에 정성국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겠지. 우호국의 반란군을 돕는 셈이니까. 아마 우리가 이번 일에 개입한다면, 분명 에스파냐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 나라들과의 외교 관계에도 영향을 끼칠 테고.”
“맞습니다. 특히,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들은 아국을 경계하기 시작할 겁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이번 일에 개입하실 생각이십니까?”
어지간하면 이번 일에 개입하지 말았으면 하는 시선을 보내는 조용한 곰을 보고, 정성국은 잠깐 고민하다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 개인적인 판단을 이야기하자면야...당연히 개입해야 한다고 보네. 아. 물론 이러한 판단은 멜키오르 부왕에게 착취당하는 멕시코 원주민들의 처지가 안타깝기 때문만은 아니야.”
“허면?”
이에 정성국은 티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여러 보고서들 가운데 하나를 집어 조용한 곰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이 보고서를 한 번 읽어보게. 이번에 멜키오르 부왕이 세금을 대폭 올리고 부역마저 과하게 부과한 탓에, 원주민들을 제대로 된 경제 활동을 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질 거라는 내용이 적혀 있지.”
“어? 그러면...”
조용한 곰은 멜키오르 부왕의 조치가 어떤 상황을 불러일으킬지를 짐작한 듯 사색이 된 얼굴로 정성국을 바라보았고, 이에 정성국은 그 짐작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되면 누에바 에스파냐의 경제는 폭삭 망할 테고, 당연히 아국의 손해 역시 커질 수밖에 없네. 그건 막아야 하지 않겠나.”
“으음...”
원래 유럽 나라들이 자꾸 식민지 건설에 목을 매는 이유는 당연히 경제적인 이익 때문이다.
에스파냐가 신대륙을 발견, 그 후에 거대한 식민지를 건설하고, 막대한 양의 은을 캐서 본국으로 가져오자 다른 유럽 나라들의 눈이 뒤집힌 것이다.
해서 다른 나라들도 앞다투어 식민지 건설에 사력을 다했지만, 에스파냐처럼 막대한 귀금속을 발견하지는 못했고.
그러자 다른 나라들은 차선으로 식민지를 원료 공급처와 상품 시장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식민지 주민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농작물, 자원 등을 생산해 본국으로 가져가고, 식민지에서 필요한 생필품들은 식민지에서 직접 생산하기보다는 본국에서 생산해 판매함으로써 이득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경우, 자국의 식민지에 타국의 상인들이 드나들거나 물건을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이득을 극대화하기 위해 식민지에는 저품질의 상품을 비싸게 판매하고 있었는데, 경쟁 상품이 등장하면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에스파냐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펠리페 3세가 정치, 종교적인 목적으로 모리스코, 그러니까 기독교로 개종한 무어인들을 본토에서 전부 추방해버렸는데, 이들이 주로 수공업자들이다 보니 모리스코가 에스파냐에서 사라지면서 에스파냐의 산업이 초토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에스파냐는 본토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생필품마저 타국에서 수입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당연히 다른 나라처럼 식민지를 상품 시장으로 이용해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해서 이전에는 다른 나라의 상인들이 에스파냐의 식민지인 누에바 에스파냐에 물건을 팔면서 이득을 챙겼고.
북미왕국을 건국하고, 에스파냐와 정식으로 교역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자연스레 북미왕국이 누에바 에스파냐의 상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에스파냐 본국에서도, 그리고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인 안토니오 부왕도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에스파냐의 생산력으로는 누에바 에스파냐까지 감당하긴 어려워 방치한 상황이었고, 북미왕국이 내부의 유통을 에스파냐 상인들에게 맡김으로써 중간에서 에스파냐가 이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으며 누에바 에스파냐의 주민들은 비교적 저렴하고 품질이 월등한 북미왕국의 물품을 사들이는 데 망설이지 않으면서 내수 경제가 활성화되어 세금마저 많이 거둘 수 있게 되었으니, 에스파냐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고.
덕분에 북미왕국은 손쉽게 누에바 에스파냐라는 거대한 시장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동안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생각보다 많은 이득을 취할 수 있었는데, 멜키오르 부왕이 원주민들을 작정하고 착취하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확보한 거대한 시장이 초토화될 것이 뻔히 보였으니.
해서 조용한 곰은 정성국의 말을 듣고 심각한 표정으로 신음을 흘리다 곧 정성국이 건네준 보고서를 살펴보기 시작했고.
정성국의 말처럼 다른 나라와의 외교 관계 때문에 누에바 에스파냐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는, 북미왕국이 입을 손해가 생각보다 커 보이자 한숨을 내쉬며 겨우 입을 열었다.
“후우. 확실히 이 보고서 내용대로 일이 흘러간다면, 아국의 손해가 무척 크겠군요.”
“그렇지. 그러니 내 생각엔 이번 일에 개입하긴 해야 할 것 같은데...”
정성국의 말에 조용한 곰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나 곧바로 원주민들에게 무기를 넘겼다가는 에스파냐뿐만 아니라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가 많이 어그러질 겁니다. 시베리아 지역이나 브라질 지역의 경우와는 상황이 다르잖습니까.”
“흐음...”
조용한 곰의 말대로 러시아 차르국의 통치 아래에 있던 시베리아 지역이나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 지역에 북미왕국이 개입했어도, 타국이 별말을 하지 않은 것은 북미왕국에게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차르국의 경우 먼저 북미왕국을 공격했을뿐더러, 이를 사과하라는 북미왕국의 요청을 거절했다는 사실을 유럽 각국이 알고 있었기에, 북미왕국이 시베리아 지역의 원주민들을 지원하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포르투갈의 경우는 다른 나라들은 북미왕국과의 관계를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 노예무역을 금지한 상황에서 포르투갈 혼자 노예무역을 유지한 터라 다른 나라들이 이런 포르투갈의 행동을 못마땅해했을뿐더러, 북미왕국은 노예무역을 지속하고 있는 포르투갈과 외교 관계를 단절했기에, 후에 브라질 식민지의 반군과 동맹을 맺었어도 별 말하지 않았고.
그러나 에스파냐의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에스파냐는 북미왕국과 우호적으로 지내기 위해 노력했고, 이를 다른 나라들도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에스파냐의 식민지인 누에바 에스파냐의 반란군과 접촉해 무기를 지원한다는 것이 알려지는 순간, 북미왕국의 신뢰도는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해서 정성국 역시 무작정 누에바 에스파냐의 원주민들을 돕자고 나서기에는 이 점이 걸렸기에 조용한 곰의 지적에 침묵했고.
그런 정성국을 보고 조용한 곰이 말했다.
“해서 말인데, 일단 외교적으로 접근해보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음? 외교적으로?”
“예. 에스파냐 대사를 통해 멜키오르 부왕을 설득해보는 거죠.”
“글쎄? 설득이 통하겠나?”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정보기관의 보고서에 따르면, 기존의 누에바 에스파냐 관리들은 당연히 원주민들에게 막대한 세금과 부역을 부과하겠다는 멜키오르 부왕의 방침에 반대했지만, 멜키오르 부왕은 이러한 반대를 무시하고 자신의 주장을 밀고 나가 결국 이를 관철했다고 쓰여 있었다.
이러한 멜키오르 부왕의 행동을 고려해보면, 멜키오르 부왕을 설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어 보였고.
정성국의 표정에서 이러한 속마음을 읽어낸 조용한 곰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정보기관과 외무청에서 분석한 바에 따르면 멜키오르 부왕이 현실감각이 없는 인물은 아니고, 북미왕국의 강력함을 모르는 인물도 아닙니다. 그러니 아국이 직접 이번 일에 우려를 표한다면 섣불리 행동하기는 어렵겠지요.”
“흐음...”
조용한 곰의 말에도 여전히 회의적인 표정을 고수하는 정성국이었다.
솔직히 정성국은 이렇게 누에바 에스파냐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멜키오르 부왕이 외무청과 정보기관이 분석한 것처럼 현실감각이 떨어지지 않는 인물인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은 쓰게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동시에 에스파냐 주재 북미왕국 대사를 통해 에스파냐 본국에 현 누에바 에스파냐의 사정을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허면 에스파냐 본국에서 무언가 조치를 취하겠지요.”
“아. 그건 조금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군. 특히, 안토니오 후작이 현 누에바 에스파냐의 상황을 알게 된다면 적극적으로 나서줄 테니까.”
정성국이 전대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이었던 안토니오 후작을 거론하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특히, 안토니오 후작은 누에바 에스파냐를 20년 가까이 통치하면서 에스파냐에서 그 누구보다 누에바 에스파냐의 사정에 정통한 만큼, 안토니오 후작이 나선다면 분명 에스파냐 본토에서도 멜키오르 부왕에게 자제하라는 명령을 내릴 겁니다.”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알겠네. 허면 일단은 자네 말대로 외교적인 방법으로 누에바 에스파냐의 일을 풀어보도록 하지. 다만...만약을 대비해, 그리고 에스파냐를 슬쩍 압박하기 위해, 사전 작업은 해 두도록 하지.”
“사전 작업이라고 하시면?”
정성국의 말에 조용한 곰이 의아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지자, 정성국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여론을 이용할 생각이네.”
이에 조용한 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아. 언론을 이용해 누에바 에스파냐의 상황을 알려 여론을 조성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지. 특히, 북미 남부에는 멕시코 출신 이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지 않나. 그러니 언론을 통해 현 누에바 에스파냐의 상황을 흘린다면, 그들은 분명 누에바 에스파냐 주민들의 상황에 공감해 멜키오르 부왕의 강압적인 통치에 분개할 걸세. 그리고 그러한 여론이 생긴다면...”
정성국이 히죽 웃으며 말을 흐리자, 조용한 곰이 그 말을 받아 이어나갔다.
“에스파냐 대사가 받는 압박은 커지겠지요. 자연히 어떻게든 멜키오르 부왕을 설득하기 위해 애를 쓸 테고요. 좋은 방법이군요. 다만...속도를 조금 조절해주셨으면 합니다.”
멜키오르 부왕의 설득에는 시간이 필요한데 여론만 너무 불타오르면 곤란했기에, 조용한 곰이 이 점을 거론하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거야 당연하지. 상황을 봐 가며 천천히 진행할 테니 걱정하지 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