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9
정성국의 지시에 음흉한 여우는 조금 남아있던 냉차를 단숨에 들이마시고, 누에바 에스파냐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고.
막 정성국에게 인사 후 집무실을 나가려는 데 그런 음흉한 여우를 정성국이 붙잡았다.
“아. 잠깐만.”
“예? 더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그래. 흠. 이 자리에 게으른 곰도 있으면 좋을 텐데 지금 부르긴 좀 그렇고...”
물론, 게으른 곰은 새한성에 있는 만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지금 바로 호출해도 되긴 했다.
다만 정성국도, 음흉한 여우도 피차 바쁜데, 게으른 곰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왠지 시간 낭비 같았기에 정성국은 팔짱을 끼며 잠시 고민했고.
그런 정성국을 보고 음흉한 여우가 이채를 띠었다.
게으른 곰의 이름을 꺼낸 것을 볼 때, 정성국의 용건을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기에.
“정보기관과 관련된 이야기인가 보군요.”
이에 정성국은 고민을 끝냈다.
사안을 생각하면 오해하지 않도록 게으른 곰까지 불러 이야기하는 것이 맞겠지만, 누에바 에스파냐의 일로 음흉한 여우도 바쁠뿐더러, 자신도 곧바로 외무청장인 조용한 곰과 이번 일을 상의해야 하는 만큼, 바로 용건을 이야기하는 것이 맞겠다 싶었다.
그리고 음흉한 여우가 게으른 곰에게 이야기를 잘 전달해주리라 믿기도 했고.
해서 정성국은 음흉한 여우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슬슬 정보기관을 공식 관청으로 만들 생각이라서 말이네.”
“어?! 그게 정말입니까?!”
음흉한 여우는 무척 놀란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동안 정보기관을 공식 관청으로 만들지 않은 까닭은 자네도 짐작하지?”
“아무래도 정보기관의 특성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음흉한 여우의 대답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정보기관은 국내외의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하는 만큼, 공식 관청으로 만들어 타국의 시선과 경계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자네들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정보기관을 비공식 관청으로 계속 유지해왔던 거고.”
정보기관은 비공식 관청으로 여전히 호위대에 속해 있었다.
처음에 정성국은 정보기관이 설립되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더는 자신의 조언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을 때, 독립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타국과 점차 활발히 교류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타국이 북미왕국의 발전을 부러워하며 북미왕국 각 분야의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기 시작하면서, 북미왕국 발전에 나름대로 일조한 정보기관을 독립시켜 공식 관청으로 만드는 것이 과연 북미왕국에 이득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생각은 타국에서 북미왕국처럼 연구청 같은 기관을 세우기 시작하자, 더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보기관을 독립시켜 공식 관청으로 만들어 버리면, 다른 나라들도 북미왕국을 따라 정보를 수집하는 데 특화된 기관을 세울 것이 분명했고, 그러면 정보기관의 정보수집 활동이나 방첩 활동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달까.
해서 정성국은 지금껏 정보기관을 제대로 된 이름도 붙여주지 않은 채 비공식 관청으로 남겨두었었고.
그리고 이런 정성국의 설명에 음흉한 여우가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전하.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결정이었으니까요. 이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 국내외에서 정보를 수집해보니, 저희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알려져 봐야 좋을 것 없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더군요.”
원래 음흉한 여우가 정성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탐사대에서 호위대로 소속을 옮기고 정보기관의 수장이 된 것은 정성국의 측근이 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음흉한 여우는 세상 밖의 정보를 접하면 접할수록 정성국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깨달을 수 있었고, 그렇기에 훗날 정성국의 측근 중 한 명으로 북미왕국의 초석을 세웠다는 평가를 듣고 싶어했던 것이다.
물론 정보기관은 호위대 산하 비공식 기관인 만큼, 지금처럼 정성국의 집무실을 찾아올 수 있었고, 직접 보고할 수도 있었으니, 이 정도만 하더라도 남들이 보기엔 측근이라고 주장할 만은 했다.
다만, 정보기관은 비공식 관청인 만큼, 자신이 정성국의 측근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보다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 분명했기에, 음흉한 여우는 하루라도 빨리 정보기관을 키워 호위대에서 독립해 공식 관청으로 인정받고 싶어했고.
해서 음흉한 여우는 정보기관을 키우는 데 열과 성을 다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이 변했다.
정보기관의 특성상, 지금처럼 음지에서 지내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음흉한 여우의 마음속에는 북미왕국 역사에 제대로 된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욕망이 있긴 했지만, 음흉한 여우는 어느덧 자신의 욕망보다는 북미왕국이 더욱 중요했기에.
해서 음흉한 여우는 같이 정보기관을 이끄는 게으른 곰에게 이에 관해 의논해보았고, 게으른 곰 역시 음흉한 여우처럼 북미왕국을 위해서라면 정보기관은 비공식 관청으로 남는 것이 나아 보인다는 말을 했고.
이를 떠올린 음흉한 여우가 정성국을 바라보며 말했다.
“해서 저나 게으른 곰, 그리고 정보기관에 속한 친구들 모두 끝까지 음지에서 북미왕국을 위해 움직이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음흉한 여우가 말을 흐리며 정보기관을 굳이 왜 공식적인 관청으로 만들려는 것이냐는 시선을 보내자 정성국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먼저, 그동안 자네들이 은밀하게 움직였어도, 다른 나라들은 이미 정보기관의 존재를 눈치챘어. 그 사실은 알고 있지?”
북미왕국의 기술력은 다른 나라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해 있었고, 그런 만큼 타국들은 북미왕국의 기술에 탐을 낼 수밖에 없었다.
다만, 북미왕국은 기술력만큼 강대한 국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괜히 기술을 빼돌리다 걸리면 북미왕국과의 외교 관계가 악화될 우려가 있었고.
특히, 북미왕국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외교 관계가 악화되었던 러시아 차르국이나 포르투갈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타국들은 잘 알고 있었기에 아무래도 조심할 수밖에 없긴 했다.
그러나 북미왕국의 기술 중 일부만 확보하더라도, 자국의 기술 수준이 급격히 발전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보니, 일부 국가들은 간혹 위험을 무릅쓰기도 했고.
그렇게 연구원이나 장인, 그리고 대학생들에게 접근해 기술이나 학문, 서적 등을 빼돌리려는 타국의 외교관들을 막다 보니, 자연히 정보기관의 존재가 일부 드러날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그리고 이를 정성국이 거론하자 음흉한 여우는 수긍했다.
“음...그렇긴 하지요. 아국의 기술을 빼돌리려던 타국의 외교관들과 몇 번 충돌한 적이 있다 보니...아. 그래서?”
“그래. 이미 타국은 정보기관의 존재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을뿐더러 이를 경계하고 있다는 징후가 계속 보이는 상황이니, 계속해서 정보기관을 비공식 관청으로 유지할 필요가 있나 싶더군.”
“으음...하지만...”
그래도 음흉한 여우가 생각하기엔, 북미왕국에서 정보기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인정하지 않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고 여겼고, 그렇기에 정성국을 설득하려 했을 때, 정성국이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정보기관의 규모가 생각보다 빠르게 커져서 지금처럼 비공식 관청으로 두기에는 좀 그렇더군.”
“아. 하긴...”
북미왕국의 인구가 늘어나고, 점차 북미왕국이 개발되면서, 북미왕국에는 수많은 마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야 할 인재들이 많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고.
어디 그뿐이랴.
정성국이 본격적으로 해외에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해외 영토를 하나둘 획득하면서, 그만큼 정보를 수집해야 할 범위가 넓어지다 보니, 정보기관의 규모가 엄청나게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음흉한 여우이니만큼 정보기관을 계속해서 비공식 관청으로 두기에는 곤란하다는 정성국의 말에 결국 수긍하며 호기심이 깃든 시선으로 물었다.
“허면 정보기관은 청급 관청이 되는 겁니까? 아니면 국급 관청?”
“흠. 내 생각엔 국급 관청이 맞을 것 같아.”
이에 음흉한 여우는 조금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현재 정보기관의 규모로는 정성국의 말대로 청급 관청보다는 국급 관청에 어울렸지만, 정보기관이 맡은 업무를 생각하면 청급 관청도 충분히 어울린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 뭐 정식 관청이 되면 지금까지와는 달리 본격적으로 인재를 모집할 수 있고, 그러면 자연히 규모가 대폭 커질 테니 나중에 청급 관청으로 오를 수 있겠지. 뭐. 그럼 정보청장의 자리를...흐흐흐.’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음흉한 여우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까? 허면 정보국이 되는 건가요?”
“아. 그 부분 말인데...”
정성국은 음흉한 여우의 물음에 미안한 표정과 난감한 표정이 뒤섞인 얼굴로 음흉한 여우를 바라보다 말했다.
“그동안 정보기관을 열심히 키워온 자네들에게는 정말 미안한 이야기지만...이번에 정보기관을 공식 관청으로 만들면서 둘로 쪼갰으면 하네.”
그동안 정보기관을 키우고자 열심히 노력한 음흉한 여우로서는 이렇게 키운 정보기관을 둘로 분리하겠다는 정성국의 말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음흉한 여우 역시 정성국이 정보기관을 분리하려는 이유를 짐작했기에, 조심스레 말했다.
“으음...역시 전하께서는 정보의 독점을 우려하시는 겁니까?”
이에 정성국은 얼굴엔 미안한 감정이 가득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래. 국내외의 모든 정보가 한 기관이 집중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네. 물론 자네들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것은 전혀 아니네만...”
이러한 정성국의 대답과 반응에 음흉한 여우가 정성국을 보고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전하의 결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북미왕국의 발전에 따라 정보기관의 규모가 계속해서 커지고, 모든 정보가 정보기관에 집중되면서 조금 우려스럽긴 했었거든요.”
“호오. 그런가?”
자신의 부담을 덜어주는 음흉한 여우의 말에 정성국이 안도했다.
원래 정성국은 모든 정보를 한 기관에서 독점하는 것의 폐해를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정보기관의 규모가 커지면 쪼갤 생각이었다.
다만, 정보기관이 쪼개지면 그만큼 정보기관이 누리던 권력도 쪼개지는 셈이라, 정보기관의 수장인 음흉한 여우나 게으른 곰에게 미안할 수밖에 없었고.
물론, 정성국이 아는 게으른 곰이라면 오히려 맡아야 할 업무가 줄어들어 무척 기뻐하리라 생각했지만, 음흉한 여우는 게으른 곰과는 성향이 달랐고, 이 때문에 정보기관을 분리하겠다는 자신의 말에 약간은 아쉬워할 수도 있어 보였는데, 의외로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자신도 정보기관에 정보가 집중되는 현상을 우려했다는 말을 하자 다행이라 여기며 눈을 반짝였고,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음흉한 여우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해서 이 문제로 게으른 곰과도 이야기를 나눠보았는데, 게으른 곰 역시 잘못하면 막대한 권력이 집중된 정보기관 때문에 북미왕국이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며 언젠간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까요.”
“그거 다행이로군.”
정보기관의 두 수장 모두 정보기관을 분리하는 것에 긍정적이라는 사실에 정성국은 무척 안도하면서 미소지었고.
그런 정성국의 귓가에 호기심 어린 음흉한 여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헌데...정보기관을 둘로 나눈다면, 역시 업무에 따라 나뉘게 되는 겁니까?”
“그렇네. 해외 정보를 수집하는 부서와 국내 정보를 수집하는 부서를 분리하는 거지. 당연히 수장은 자네와 게으른 곰이 맡을 테고.”
“그럼...”
이에 음흉한 여우는 잔뜩 기대섞인 눈초리로 정성국을 바라보았고.
그런 음흉한 여우의 반응에 정성국은 피식 웃고 그의 승진을 축하해주었다.
“그래. 축하하네. 국장이 된 것을.”
“아...”
정성국의 축하에 음흉한 여우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
특히, 음흉한 여우는 빠르게 청장, 혹은 국장 같은 고위급 관리가 되어 정성국의 측근이 되는 것이 소원이었고, 이러한 소원을 북미왕국의 상황 때문에 한 번 포기했었던 만큼, 더욱 감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해서 음흉한 여우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고, 그런 음흉한 여우의 반응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음흉한 여우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이 기쁜 소식을 자네 친구에게도 알리도록 하게. 뭐 게으른 곰이라면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귀찮은 소식이라며 투덜댈 것 같긴 한데...”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