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8
“어? 자네가 여긴 웬일인가?”
정성국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집무실을 방문한 음흉한 여우의 얼굴을 보고 무척이나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음흉한 여우는 게으른 곰과 함께 북미왕국 정보기관의 수장이었지만, 주로 국내의 방첩활동과 정보수집 업무를 담당하는 게으른 곰과는 다르게 해외의 정보수집 업무를 담당하는 터라, 새한성보다는 새김포, 새진주, 보스턴 등에 머물 때가 더 많았고.
그러니 새한성에서 음흉한 여우를 보는 일은 꽤나 드물었기에 정성국이 놀라고 또 의외라는 표정으로 이야기하자, 음흉한 여우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급히 보고드려야 할 내용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그래? 일단 앉게.”
정성국은 음흉한 여우에게 자리를 권한 후 시원한 냉차를 따라주었고.
“감사합니다. 전하.”
“아닐세. 그보다 급히 보고해야 할 내용이 뭔가.”
음흉한 여우의 표정을 보아하니, 좋은 일로 방문한 것 같지는 않았고, 보통의 경우는 보고서를 올리고 끝낼 터인데 음흉한 여우가 직접 방문한 것을 보면 생각보다 큰일이라는 생각에 정성국이 바로 음흉한 여우의 방문 용건을 묻자, 음흉한 여우가 냉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누에바 에스파냐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린가. 누에바 에스파냐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니?”
갑작스럽게 누에바 에스파냐를 거론하는 음흉한 여우를 보고 정성국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누에바 에스파냐는 북미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웃 국가였다.
물론 누에바 에스파냐 자체가 정상적인 국가라기보단 식민지에 가깝긴 했지만, 북미왕국의 입장에서는 누에바 에스파냐가 정상적인 국가인지, 식민지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북미왕국의 남쪽에 있는 누에바 에스파냐가 북미왕국에 위협이 될지, 아닐지에 관한 것이었달까.
그리고 지금까지 누에바 에스파냐는 북미왕국에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었다.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이었던 안토니오 부왕은 북미왕국을 무척 높이 평가하고 우호적으로 나왔었으니까.
그리고 작년에 안토니오 부왕이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 후임으로 새롭게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 자리에 오른 멜키오르 부왕이 고위 귀족 출신이었던 안토니오 부왕과는 성향이 다르다는 평가에 조금 걱정했었지만, 안토니오 부왕의 말대로 멜키오르 부왕 역시 현실적인 인사였고, 북미왕국의 강력함을 모르지 않았기에, 이전처럼 누에바 에스파냐와 북미왕국 간의 우호 관계에 신경 쓰는 모습을 보이자 정성국은 걱정을 접었고.
물론 멜키오르 부왕이 누에바 에스파냐를 장악하고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더는 멕시코 원주민들을 이주시킬 수 없게 되었고, 그 이후엔 멕시코 원주민들을 고용할 수도 없게 되었지만, 이게 멜키오르 부왕이 북미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취한 조치라기보다는 북미왕국으로 이주할 수 있게 된 멕시코 원주민들이 북미왕국으로 빠져나가면서, 멕시코 북부 지역이 텅 비게 되자 이를 막기 위한 조치인 만큼, 아쉬워할지언정 멜키오르 부왕이 혹여 북미왕국에 적대적이지는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고.
그 이후에도 간간이 외무청에 누에바 에스파냐의 소식을 접하긴 했지만, 정성국이 신경 쓸 정도의 일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음흉한 여우의 말은 전혀 달랐기에 정성국이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자, 음흉한 여우가 대답했다.
“누에바 에스파냐에 파견된 정보원들이 보내오는 소식을 종합해보면...아마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어 보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음흉한 여우의 대답에 정성국은 아끼는 찻잔을 떨어뜨릴 정도로 기겁했다.
“...뭐?! 대규모 반란?!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그렇습니다. 전하.”
“허. 이것 참...”
정성국은 조심스레 들고 있던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중국 대륙이나 유럽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든, 대규모 전쟁이 발생하든, 드넓은 태평양, 대서양이 가로막고 있었기에 솔직히 북미왕국에 미치는 영향은 적었다.
그러나 누에바 에스파냐는 북미왕국의 바로 남쪽에 위치한 만큼,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반란이 일어난다면 자연스럽게 북미왕국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고.
해서 정성국은 음흉한 여우의 말에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번 반란이 북미왕국에 미칠 영향을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자세한 사항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반란의 주체는? 설마 멜키오르 부왕인가?”
누에바 에스파냐의 잠재력은 대단했다.
넓은 영토, 풍부한 자원에 인구도 많았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에스파냐는 늘 누에바 에스파냐의 독립을 경계하고 있었기에, 정성국은 반란의 낌새가 보인다는 음흉한 여우의 말에 당연히 누에바 에스파냐가 본국인 에스파냐에 반란을 일으키는 거라 생각했고.
다만, 그 주체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안토니오 부왕을 대신해 부임한 멜키오르 부왕이 반란을 일으킨 것인지, 아니면 그동안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자리를 잡은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인지 말이다.
해서 정성국이 묻자 음흉한 여우는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다가, 정성국이 자신의 말을 오해했음을 깨닫고 곧바로 정정해주었다.
“예? 아...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멜키오르 부왕은 타도의 대상이지요.”
“음? 아아. 그럼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에스파냐 본국에 반기를 든 것이 아니라...”
“맞습니다. 멕시코 원주민들이 멜키오르 부왕의 강압적인 통치에 거세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멜키오르 부왕은 멕시코 원주민들의 무력으로 진압할 생각이라 일이 커질 것 같습니다.”
이에 정성국은 혀를 찼다.
안토니오 부왕이 20년 넘게 안정적으로 통치해왔던 누에바 에스파냐를 고작 1년 만에 엉망으로 만들었으니, 멜키오르 부왕의 통치 능력에 정성국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 멜키오르 부왕이 정치가나 행정가 출신이 아니라 군인 출신이었다는 말을 듣고 조금 걸리기는 했는데...’
보통 안정된 식민지의 경우에는 정치가나 행정가 출신을 파견하곤 했다.
막 식민지를 건설해 내외부적으로 위협이 존재한다면야 군인 출신을 보내 이러한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 맞겠지만, 이미 잘 돌아가는 식민지라면 굳이 군인 출신을 파견할 이유가 없었으니.
헌데 에스파냐에서는 의외로 군인 출신인 멜키오르를 부왕으로 임명했었기에 조금 의아하긴 했었다.
다만, 군인 출신이라고 해서 행정이나 정치에 무지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그냥 넘겼었는데, 이런 사태가 발생하자 정성국은 그런 인사를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으로 임명한 에스파냐의 결정이 안타까워 혀를 찰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서 이번 반란의 성격을 명확히 인식한 정성국이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흠. 허면 일종의 민란이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안토니오 부왕은 아국이 북미 대륙의 원주민들로 구성된 국가였기에, 그리고 전하께서 식민지 통치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점차 원주민들을 대우해주기 시작했습니다.”
음흉한 여우의 대답에 정성국이 맞장구쳤다.
“아. 그랬었지. 그리고 아국에 고용된 멕시코 원주민들과 그 가족들이 아국으로 이주할 수 있게 되면서, 국경 인근 멕시코 원주민들이 하나둘 아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자 원주민들의 대우에 더욱 신경 쓴 것으로 기억하고.”
“맞습니다. 다른 지역의 원주민들도 아국으로 이주할 길이 열린 셈이니까요.”
물론 에스파냐가 북미왕국으로 이주를 허용한 것은 북미왕국에 고용되어 일했던 원주민들과 그 가족들에 한정했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북미왕국으로 이주한 이들의 먼 친척이라고 주장하면 그걸 무슨 수로 확인하겠는가.
거기에 이미 누에바 에스파냐에 북미왕국에 관한 정보가 어느 정도 알려진 상황이라,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는 것이 고향에서 지금처럼 사는 것보다 훨씬 나아 보였고.
그렇게 누에바 에스파냐의 원주민들이 동요하자 안토니오 부왕은 이들을 달래기 위해 이전과는 다른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해서 누에바 에스파냐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과다한 인두세나 부역을 점차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 때문에 당장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거둘 수 있는 이익은 줄어들었지만, 이전보다 더 나은 대우를 해주자 원주민들도 만족해하면서, 누에바 에스파냐의 통치에 협조하기 시작했기에, 누에바 에스파냐를 통치하는 데 들어가던 비용을 줄일 수 있었고, 원주민들의 경제 활동이 늘어나면서 누에바 에스파냐의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해 자연히 거둘 수 있는 세금이 많아졌기에 원주민들을 대우해주는 정책은 누에바 에스파냐 입장에서 손해는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거기에 본토에서 안토니오 부왕의 정책을 못마땅해할까 걱정되어, 우리가 누에바 에스파냐에 투자하기도 했으니까.”
안토니오 부왕이 북미왕국으로의 이주를 고려하는 원주민들을 달래기 위해, 원주민들에게 부과하는 세금과 부역을 줄이기 시작하자 자연히 에스파냐 본토에서는 이런저런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에스파냐의 재정은 고갈된 상태였고, 그나마 에스파냐가 파산하지 않고 버틸 수 있던 이유가 바로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흘러들어오는 수입이었다.
헌데, 안토니오 부왕이 원주민들을 대우해주기 시작하면서 에스파냐로 흘러들어오는 수입이 줄어들 것이 보였으니 어찌 말이 나오지 않겠는가.
다만, 안토니오 부왕은 보고서를 통해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원주민들을 대우해줌으로써 북미왕국의 호의를 얻을 수 있으니 장기적으로는 이득이라고 주장했고, 실제로 시간이 흐를수록 북미왕국과 누에바 에스파냐의 교류가 깊어지며 더 많은 교역품을 거래함으로써 에스파냐의 재정이 나아지고 있었으니 마냥 헛소리라고 일축할 수도 없었다.
해서 에스파냐 본토에서도 의견이 엇갈렸고, 이 사실을 파악한 정성국이 안토니오 부왕을 지지하기 위해 누에바 에스파냐에 투자하기도 했고.
어차피 누에바 에스파냐의 각종 자원이 필요하기도 했을뿐더러, 비록 북미왕국 때문이라지만, 원주민들을 대우해주는 안토니오 부왕이 오랫동안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으로 통치해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음흉한 여우의 말에서 이를 떠올린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자, 음흉한 여우가 그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그래서 누에바 에스파냐의 관리들 역시, 이제는 이러한 안토니오 부왕의 원주민 정책이 성공적인 정책이었다고 평가하고 있고요. 헌데 멜키오르 부왕의 생각은 전혀 다른 모양입니다.”
“그래? 원주민들을 대우하는 정책이 쓸모없는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습니다. 멜키오르 부왕은 누에바 에스파냐의 경제 발전이 안토니오 부왕의 원주민 정책 때문이 아니라 북미왕국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더군요. 아니. 오히려 안토니오 부왕의 원주민 정책 때문에 누에바 에스파냐의 성장이 더뎌졌다고 주장했답니다.”
“거참...”
정성국은 음흉한 여우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물론 멜키오르 부왕의 저런 언행은 이전에도 있어왔다.
안토니오 부왕이 북미왕국과 맺은 이주 협정이나 원주민 고용 협정을 철회하면서 비슷한 소리를 했었으니까.
다만, 누에바 에스파냐가 두 협정으로 경제적으로 이익을 본 것과는 별개로 멕시코 북부 지역이 텅 빈 것은 사실이었고, 외무청에서는 멜키오르 부왕의 발언을 20년 넘게 누에바 에스파냐를 통치한 안토니오 부왕의 잔재를 지우기 위한 수작이라고 판단했었고.
정성국도 그러한 추측이 맞는 것 같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 이후 멜키오르 부왕은 북미왕국과의 외교 관계를 신경 쓰는 모습을 보였기에, 멜키오르 부왕의 언행은 북미왕국에 반감을 품은 것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공적을 세운 전임자를 깎아내리려는 수작이라는 외무청의 분석이 맞다고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았었다.
헌데, 뒤늦게 저런 말을 했다고 하니, 그 의도는 뻔했기에 정성국이 입을 열었다.
“허면, 멜키오르 부왕은 안토니오 부왕의 원주민 정책을 전면 폐기한 건가?”
“그렇습니다. 이전보다 더 막대한 세금과 부역을 부과했습니다.”
“뭐?! 이전보다 더?”
자신이 잘 못 들은 것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되묻는 정성국을 보고 음흉한 여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성국은 기가 찬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허. 이전으로 되돌린 것만으로도 원주민들의 반발이 심할 텐데 그보다 더하다면야...반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겠군.”
“그렇지요. 다행히 아직까지는 별다른 충돌이 없기는 한데...제가 보기엔 시간문제 같습니다. 해서 전하께 직접 보고를 올리고 전하의 뜻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음흉한 여우의 말에 정성국이 멈칫했다.
“내 뜻?”
“예. 전하께서는 유럽의 식민지 정책을 썩 좋게 평가하지 않으시잖습니까.”
물론 정성국은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었고, 그렇기에 대부분은 정성국이 유럽의 식민지 정책을 잘못된 정책이라고 평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음흉한 여우는 정보기관의 대외 정보수집을 맡았기에, 각 지역에 정보원들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떠오르자, 정성국은 굳은 얼굴로 음흉한 여우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설마...이번 일에 자네들이 개입한 것은 아니지?”
이에 음흉한 여우는 펄쩍 뛰며 바로 손을 내저었다.
“전혀 아닙니다. 전하의 명령도 없이 어찌 개입하겠습니까.”
“그래?”
정성국이 조금 미심쩍다는 듯 바라보자 음흉한 여우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습니다. 이미 안토니오 부왕의 정책으로 이전보다 더 나은 생활을 했던 원주민들입니다. 헌데 이제 와서 예전으로, 아니 예전보다 더 열악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렇기야 하지.”
음흉한 여우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기에 정성국이 수긍하자, 음흉한 여우는 슬쩍 정성국의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다만...갑자기 뒤바뀐 누에바 에스파냐의 정책에 분개한 이들 중에는 아국의 정보원들도 있고, 이들이 북미왕국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도움? 무슨 도움?”
“당연히...누에바 에스파냐군에 대항할 수 있도록 아국에서 무기를 지원해주길 바라더군요.”
“우리에게 무기를 지원받아 반란을 일으키고, 에스파냐 세력을 물리치겠다?”
“그렇습니다. 특히, 정보원들은 앙골라 장가가 어떻게 건국되었는지를 알기에...”
“허. 이것 참...”
북미왕국의 지원을 받아 독립해 포르투갈 세력을 물리치고 브라질 지역을 차지한 앙골라 장가처럼, 반란을 일으키고 에스파냐에 독립할 테니, 이를 지원해 줄 수 있겠느냐는 정보원들의 요청을 전달받은 정성국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이건 나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로군. 조용한 곰과도 의논을 해봐야겠어. 그러니, 일단 자네는 당분간 새한성에 머물면서,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특이 사항이 발생하면 바로 보고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