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813화 (813/850)

#813

조선의 왕인 이연은 개항장을 다녀왔던 예조판서가 가져온 아주 자그마한 병을 손에 들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것이 바로...?”

“그렇사옵니다. 전하. 항생제이옵니다.”

예조판서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자 이연은 여러 감정이 뒤섞인 복잡한 얼굴로 항생제가 담긴 병을 만지작거리다 물었다.

“...그럼 이 항생제만 있다면, 설사 종기가 재발하더라도 쉽게 치료할 수 있다는 건가?”

“그렇다 하옵니다. 개항장에 있는 북미왕국 의원에게 몇 번이고 확인했사옵니다.”

“허어...”

예조판서의 대답에 이연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조선에서 종기는 쉽게 치료하기 어려운 난치병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종기로 인해 무척 고생하기도 했고, 이연 역시 젊었을 때부터 피부에 난 종기 때문에 무척이나 고생했었고.

그나마 북미왕국과 교류하면서, 위생에 관한 지식을 습득해 궁 내에 목욕탕을 만들어 깨끗한 물로 매일매일 목욕하면서, 그리고 북미왕국에서 의학을 배워온 어의들의 조언에 따라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 생활 습관을 완전히 바꾼 덕분에 이전과는 달리 피부에 난 종기들은 거의 없어졌지만, 이연은 언제 또 종기가 재발할지 몰라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북미왕국의 의학이 발전함에 따라 외과 시술과 소독 기술이 발전하면서, 종기를 어느 정도 치료할 수는 있게 되었지만, 한계는 있다는 사실을 어의에게 들었기에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고.

여기에 역대 왕들이 종기로 인해 사망한 경우가 꽤 있었고, 특히 이연의 아버지인 효종이 사망한 원인도 얼굴에 난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어의가 침을 놓다 혈관을 찌르는 의료사고가 발생해 사망했으니, 이연이 종기를 내심 두려워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달까.

헌데 지금 자신의 손안에 들린 이 항생제라는 북미왕국에서 새로이 개발한 약만 있으면, 설사 종기가 생기더라도 손쉽게 치료할 수 있다고 하니.

그동안 내심 종기를 두려워했던 이연으로서는 난치병에 가까웠던 종기가 고작 이 조그마한 약으로 치료된다는 사실이 놀랍고, 그동안 종기 때문에 고생했던 것이 떠올라 허탈하기도 했으며, 더는 종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과 이러한 약을 개발해낸 북미왕국 의학 기술에 대한 부러움 등, 수많은 감정이 뒤섞여 잠시 말을 잇지 못했고.

신하들은 그런 이연의 심상치 않은 반응에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북미신문을 통해 처음 항생제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 이런 약이 개발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면서 어떻게든 항생제를 확보하라고 예조판서에게 몇 차례나 당부했었던 이연이었으니, 마냥 기뻐할 거라 여긴 탓이다.

다만, 일부 신하들은 이연이 종기 때문에 사망한 부왕을 떠올린다고 여기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고.

그렇게 대전에는 침묵만이 감돌았고, 잠시 후 감정을 어느 정도 수습한 이연은 잠시 사색에 잠긴 것을 사과하며 항생제를 가져온 예조판서에게 물었다.

“헌데...이 항생제의 수량은 충분한가? 북미신문을 통해 알려지기를, 종기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질병에도 효과가 있다고 하니, 병으로 고통받는 아국의 백성들을 치료하려면 무척이나 많은 숫자의 항생제가 필요할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에 예조판서가 조금 난감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것이...북미왕국에서도 최근에 항생제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기에, 항생제의 수량이 많지는 않다고 하옵니다. 해서 300병이 전부이옵니다.”

“300병? 그럼 300명을 치료할 수 있는 건가?”

“아니옵니다. 증세에 따라 계속 항생제를 투여해야 할 수도 있기에, 북미왕국에서는 1, 200명 정도의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한계일 것이라고 하였사옵니다.”

“어허...그건 너무 적은 것이 아닌가.”

물론 북미왕국이 최근에 대량생산한 항생제이니만큼, 물량이 많지는 않으리라 짐작했지만, 이건 이연이 예상한 숫자보다도 적었다.

그나마 북미왕국과 교류하면서 조선인들도 예전보다 위생에 신경 쓰기 시작했기에, 그리고 북미왕국과 교류하면서 백성들의 식량 사정이 많아 나아졌기에, 전염병이 도는 일이 무척 줄어들긴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염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직 조선은 북미왕국처럼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지 못한 탓에 종종 전염병이 발생하기도 했던 탓이다.

그리고 전염병이 발생한다면 초기에 대처해 출입을 막는다 하더라도 최소 수백 명은 병에 걸려 있을 텐데, 고작 1, 200명을 치료하는 것이 전부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부족해 보였고.

해서 이연이 예조판서의 대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원상과 투로시노의 편지로 대충 북미왕국의 사정을 파악하고 있는 좌의정 유철이 입을 열어 난감해하는 예조판서를 거들었다.

“허나 어쩔 수가 없사옵니다. 전하. 북미왕국 입장에서는 북미왕국 백성들의 치료를 우선시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옵니다.”

“으음...”

조금 안타깝고 또 섭섭하기는 했지만, 이건 유철의 말이 맞았기에, 이연이 신음을 흘리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을 때, 유철이 그런 이연의 반응에 다시 입을 열었다.

“해서 원래는 현재 새양주에 짓고 있는 항생제 생산 공방이 제대로 가동되기 전까지는 외국엔 항생제를 넘기지 않을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항생제만 있으면 그동안 치료하기 어려웠던 상당수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 보니 외국 대사들이 어떻게든 항생제를 구하기 위해 난리를 치자 북미왕국에서 타국과의 우호 관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항생제를 소량 넘긴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니...”

“그럼 당장은 더 구할 방법이 없다는 건가?”

북미왕국의 사정도 이해는 되지만, 북미왕국에서 충분한 수의 항생제를 생산하기까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데, 고작 1, 200명을 치료할 수 있는 분량의 항생제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이연이 안타까워 묻자, 예조판서가 대신 대답했다.

“아.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사옵니다. 항생제는 소모품인 터라, 석 달에 한 번씩은 같은 수량의 항생제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했사옵니다.”

“휴우. 그나마 다행이로군.”

물론, 매 달도 아니고 석 달에 한 번 넘겨주는 만큼, 턱없이 부족하긴 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이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호조판서가 입을 열었다.

“허나 아국의 인구를 생각하면 항생제가 턱없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니만큼...만약을 대비해 항생제를 비축해두는 것이 낫겠군요.”

이에 병조판서가 펄쩍 뛰며 말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북미왕국에서 석 달에 한 번씩 항생제를 넘겨주기로 했으니, 바로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병조판서의 주장에 이조판서가 끼어들어 반박했다.

“전 반대합니다. 그래 봐야 치료할 수 있는 환자는 적고, 항생제를 다 사용했는데 갑자기 전염병이라도 도는 날에는...”

처음 병조판서의 말에 감정적으로 동의했던 다른 조정 신료들은 이조판서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분위기 속에 호조판서가 입을 열어 이조판서의 말에 동의했다.

“맞습니다. 북미왕국에서 더 많은 항생제를 생산하기 전까지는 비축하는 것이 맞습니다. 거기에 그동안 치료하지 못했던 병을 항생제로 치료한다면, 분명 소문이 돌아 더 많은 환자들이 도성으로 몰려들 텐데, 그걸 어찌 감당한다는 말씀입니까.”

“으음...”

병조판서 역시 이조판서나 호조판서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기에, 그저 신음만 흘릴 뿐이었고.

이렇게 논의가 일단락되자, 이연이 상황을 정리하듯 말했다.

“허면, 이 항생제들은 일단 내의원에서 보관하도록 하지.”

“그리하겠사옵니다. 전하.”

내의원 도제조가 이연의 말에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을 때, 이연이 조금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헌데...내의원에서 이런 약을 만드는 것은 어렵겠지?”

“송구하옵니다. 전하.”

내의원 도제조가 면목 없다는 얼굴로 다시 고개를 숙이자, 이연은 쓰게 웃었고.

그때 유철이 입을 열었다.

“아국보다 훨씬 학문과 기술력이 뛰어난 북미왕국이 수많은 의원, 연구원들을 동원한 끝에 만들어낸 것이 바로 그 항생제이옵니다. 헌데 그와 비슷한 약을 어찌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겠사옵니까.”

“하하하. 그건 그렇겠지. 그냥 아쉬워서 물어본 걸세.”

“하오나...우리 조선도 더 많은 인재를 키우고 이들에게 학문의 연구에 매진케 한다면, 언젠가는 성과를 거두지 않겠사옵니까.”

유철의 대답에 이연이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더 많은 인재를 키운다? 허면...”

“그렇사옵니다. 더는 늦추지 말고 북미왕국처럼 종합 대학교를 설립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건축 전문 대학교 같은 전문 대학교를 다수 설립해야 하옵니다.”

“으음...”

유철의 대답에 이연이 신음을 흘릴 때, 이조참판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허나, 지금껏 건축 전문 대학교를 제외한 그 어떤 대학교도 설립하지 못한 까닭은,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선생이 없었기 때문 아닙니까.”

조선의 관리들은 매년 북미왕국을 방문하는 만큼, 북미왕국이 해마다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고, 이러한 발전의 밑바탕은 결국 북미왕국 특유의 교육 체계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전 백성을 가르치는 북미왕국식 교육 체계를 조선에 이식하고 싶었지만, 조선의 사정상 그게 쉽지 않았다.

북미왕국식 교육 체계를 도입하려면 수많은 학교를 세우고 선생들을 고용해야 하는데 당장 그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기엔 동만주 개발 때문에 어려웠던 탓이다.

물론, 북미왕국에서 막대한 차관을 들여오면 가능하긴 한데, 조선의 관리들은 타국에 돈을 빌리는 것을 영 껄끄러워하기도 했고.

해서 관리들은 내심 동만주로 이주한 백성들에 제대로 정착한 이후에나 북미왕국식 교육 체계를 조선에 도입하기로 정하고, 대신 고등 교육 기관인 대학교를 건설하고자 했다.

아무리 당장 조선에 돈이 없다고 한들, 대학교 한두 개 설립하는 것이 뭐 어렵겠는가.

해서 조선의 조정 신료들은 의욕적으로 대학교를 설립하려 했지만, 문제가 있었다.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선생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 조선에서는 북미왕국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당장 북미왕국도 계속해서 대학교를 늘리고 있는 터라 대학생을 가르칠 만한 수준의 선생을 구하는 데 애를 먹고 있는 마당에 무슨 수로 조선에 선생을 보내겠는가.

이에 조선에서는 북미왕국을 방문한 조선 사절단을 통해 북미왕국에서 직접 조선에 신설될 대학교의 선생들을 모집하려 했지만, 편안한 북미왕국에서의 생활을 포기하고, 조선으로 가려는 이들은 전무했다.

해서 대학교 설립은 나중으로 미루었는데, 유철이 다시 이 이야기를 꺼냈기에, 이조참판은 사정을 뻔히 아는 양반이 왜 이를 거론하느냐는 표정으로 대답하자, 유철이 말했다.

“그렇긴 하지요. 허나 최근에 듣자니 아국에도 북미왕국의 학문을 깊은 수준까지 익힌 학자들이 꽤 많다고 들었습니다. 허니 이들을 초빙한다면, 대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더군요.”

“예? 아. 독학으로 익힌 자들을 말입니까?”

그동안 개화파에서 꾸준히 북미왕국의 서적들을 출판했고, 조선 사절단으로 북미왕국을 방문한 이들이나, 북미신문, 세계신문 등을 읽고 북미왕국의 국력과 발전에 감탄한 조선의 선비들은 당연히 북미왕국의 학문에 관심을 보였고.

여기에 조선에서도 증기기관, 증기선 등을 연구하기 위해 북미왕국 학문에 정통한 이들을 관리로 선발하자, 일부는 북미왕국 학문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철은 이들이라면 충분히 대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다면서, 이들을 선생으로 채용하자고 주장하자, 호조참판이 고개를 갸웃하며 끼어들었다.

“글쎄요? 과연 독학으로 학문을 익힌 이들에게 대학교 선생 자리를 맡기는 것이 합당한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천재라면 책을 보고 독학으로 학문을 익히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문제라면, 조선에 출판된 책의 수준이 낮다는 것.

북미왕국에서는 대학교에서 사용하는 교재나 여러 기술 서적들이 유출되는 것을 철저히 막고 있었기에, 조선에 출판된 북미왕국 학문과 관련된 책이라 봐야 가장 수준 높은 것이 고작 고등학교 교과서나 아주 기초적인 내용의 기술서가 전부였다.

그러니, 호조참판은 이들을 고용할 바에는 더 좋은 조건을 내걸어서라도 북미왕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한 이나, 혹은 대학생을 데려오는 것이 맞다고 여겨 반문하자, 유철이 대답했다.

“물론, 많이 부족할 겁니다. 어쩌면 가르칠 것이 많지 않을 수도 있고요. 허나, 북미왕국인들이 조선에 오려고 하지 않으니 어쩌겠습니까.”

“으음...”

“그리고, 조선에서 북미왕국의 학문에 정통한 이들을 대학교 선생으로 고용해 한 곳으로 모은다면, 이들이 머리를 맞대어 학문을 발전시킬 수도 있을 겁니다.”

“흠. 차라리 그게 낫겠군요. 북미왕국의 사정을 들어보니, 한창 인력난이 심해서 난리라고 하니, 북미왕국만 믿고 있다가는 대학교 설립이 무척 늦어질 겁니다.”

“하긴...”

“맞아요. 그게 낫겠어요.”

유철의 말에 호조참판은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고, 다른 조정 신료들은 유철의 말에 동의하자, 이연이 결정을 내렸다.

“알겠네. 대학교를 설립하도록 하지. 허면...”

그렇게 이연과 조선의 조정 신료들은 대학교 설립 문제로 논의하느라 해가 질 때까지 대전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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