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1
이제 막 여름이 시작되었을 뿐인데도 더위가 심상치 않아, 혹여 작물이 폭염에 타들지는 않을까 우려되어 각지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를 유심히 살피던 정성국은, 아직은 별다른 피해가 없을뿐더러, 이미 행정청에서 가뭄이나 폭염을 대비해 이런저런 조치를 취해 두었다는 보고서 내용에 자신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때 조용한 곰이 집무실을 방문하자, 정성국은 들고 있던 보고서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기며, 방문한 용건을 물었고, 조용한 곰이 그동안 신성로마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과 진행해오던 인력 협상이 성공적으로 끝나, 정식으로 조약을 체결했다는 대답을 하자 정성국이 눈을 빛냈다.
“오. 이렇게 빨리 협상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처음에 저희가 두 나라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고 싶다는 말을 꺼냈을 때는 꽤나 떨떠름한 기색이었지만,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증기기관 제작 기술을 미끼로 내거니, 태도가 180도 바뀌더군요.”
협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조용한 곰의 말을 듣던 정성국은 웃음을 터트렸다.
정성국이 유럽을 방문한 뒤로, 정보기관은 전 유럽에 정보원들을 보내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고, 그동안 교류하지 않았던 동유럽 국가들과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고 각국에 대사관을 설립하면서 합법적으로 정보를 수집할 수 있게 되자 더욱 적극적으로 현지의 동향을 살폈다.
그렇기에 정성국은 정보기관을 통해 동유럽 국가들의 동향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었고.
동유럽 국가들은 자신들이 북미왕국과 거리를 두고, 최근에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집중한 사이, 어느덧 서유럽 국가들은 북미왕국처럼 증기선을 건조하거나, 공방이나 광산에서 증기기관을 이용해 이전보다 생산량을 늘리는 등, 본격적으로 증기기관을 이용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강한 위기감과 조바심을 품기 시작하며 어떻게든 북미왕국의 증기기관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정성국은 신성로마제국 대사나 폴란드-리투아니아 대사가 결코 자신들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으리라 여겼고, 조용한 곰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역시나 였기에,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물론 그랬겠지. 저들도 증기기관의 유용성을 모르지 않을 테니까. 거기에 서유럽 국가들마저 하나둘 증기기관을 이용하기 시작하니, 동유럽 국가들은 자칫하면 서유럽 국가들이 발전하는 동안 자신들은 제자리걸음을 할까 봐 조바심이 나기도 했을 테고.”
“정확하십니다. 해서 어떻게든 증기기관 제작 기술을 확보하려 했기에, 협상이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해서 방금 외무청 협상장에서 신성로마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 대사와 정식으로 조약을 체결했고요.”
“허면?”
어떤 조건으로 두 나라와 조약을 체결했느냐고 묻는 정성국을 보고 조용한 곰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신성로마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 모두 증기기관 제작 기술을 받는 조건으로 아국이 각각 20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할 수 있게 허용하기로 했습니다.”
“오. 그럼 총 40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를 추가 확보한 셈인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두 나라 모두 아국이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돕기로 했고요.”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증기기관 기술을 넘긴다 하더라도, 헐값에 넘기지는 않겠다더니만...정말 잘 했네.”
원래 정성국은 이번에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은 모든 유럽 국가들과 협상을 하라고 이야기했었다.
다만, 조용한 곰은 신성로마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 정도를 제외하면, 유럽의 소국들은 인구가 적어 협상을 진행해봐야 증기기관 기술을 헐값에 넘기는 꼴이 될 테고, 이는 신성로마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과의 협상에도 영향을 미쳐 오히려 전체적인 외국인 노동자 수가 줄어들 거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여긴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덕분에 조용한 곰은 신성로마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 이렇게 두 나라와만 인력 협상을 진행하면서 북미왕국 입장에선 별다른 가치가 없는 증기기관 기술을 넘겨주며 두 나라에 뜯어낼 수 있는 것은 다 뜯어낸 것으로 보이니,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수완을 칭찬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조용한 곰이 빙긋 웃으며 겸양했다.
“아닙니다. 전하. 아무튼, 두 나라가 아국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로 한 만큼, 아마 올해 말에서 내년 초부터는 두 나라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아국으로 유입될 겁니다.”
“흠. 그럼 외국인 노동자들의 수송은...”
“이미 운수국장에게 이야기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운수국장은 운수국의 역량으로 충분히 외국인 노동자들을 수송할 수 있으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말라고 장담하더군요.”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조금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전에 잉글랜드, 프랑스, 에스파냐 삼국에서 50만 명에 달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북미왕국으로 수송했을 때, 운수국만으로는 단기간에 50만 명에 달하는 인력을 수송할 수 없어서, 국영 상단, 왕실 상단의 배마저 차출해 겨우 외국인 노동자들을 실어날랐는데, 아무리 이전보다 10만 명 정도가 줄어들었지만, 운수국 혼자서 감당할 수 있나 싶었기에.
“음? 운수국의 역량으로 단기간에 40만 명에 달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수송할 수 있다고? 물론, 유럽 이주민들의 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아. 그게 원래 북미왕국의 백성들은 먼 거리를 이동할 때, 주로 여객선을 이용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점차 생활이 안정되고 관광을 위해 다른 지역을 방문하는 백성들이 늘어나면서, 운수국은 계속해서 여객선을 건조해 연안에 배치함으로써 백성들의 이동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노력했고요.”
“그랬지. 아. 설마...?”
다 아는 내용을 설명하는 조용한 곰의 말에 건성으로 대꾸하던 정성국이 문득 그가 이런 설명을 하는 이유를 눈치채고 눈을 크게 뜨자, 조용한 곰은 정성국이 자신이 할 말을 눈치챈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여객선을 늘려왔는데, 해안가를 따라 철도가 깔리자, 먼 거리를 이동하려는 백성들이 여객선보다는 기차를 주로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여객선의 수요가 확 줄어든 겁니다.”
“흠. 아무래도 먼 거리를 이동할 때는 여객선보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기차가 더 낫긴 하겠지.”
정성국의 중얼거림에 조용한 곰이 맞장구쳤다.
“예. 거기에 여객선은 비록 연안으로 이동한다 하더라도, 암초 등을 피하고자 해안가에서 상당히 거리를 두고 이동하는 터라, 선착장에 정박할 때를 제외하면 제대로 아국의 경치를 구경하기 어렵지만, 기차는 다르잖습니까.”
“아. 그건 그렇겠네. 특히, 아국의 땅덩이가 워낙 넓어 이동하면서 주변의 경치가 확 바뀔 테니 보는 맛도 있을 테고...아. 거기에 배와는 달리 속도감도 느낄 수 있을 테니, 백성들이 여객선보다 기차를 더 선호하는 것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군.”
“그렇지요. 거기에 여객선을 주로 이용했던 백성들에게 있어 기차란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갔을 때나 이용할 수 있던 특별한 이동수단이잖습니까. 그러다 보니 어지간하면 기차를 이용하려 하는 터라, 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항상 사람을 가득 태우고 연안을 돌아다녔던 여객선이, 철도가 개통된 후로는 한산하답니다. 해서, 운수국에서는 연안에 투입된 여객선들을 수송선으로 개조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고요. 그러니...”
조용한 곰이 여기까지 설명하자 상황을 완전히 이해한 정성국이 그 말을 받았다.
“연안에 투입된 여객선 상당수를 돌리면 외국인 노동자들을 수송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렇다더군요.”
북미 동해안 지역은 잉글랜드 시절부터 어느 정도 개발이 되어 있던 땅이었고, 다른 지역보다 일찍 북미왕국의 영토가 되었던 땅이었으며, 일부 잉글랜드인들이 남아 북미왕국의 백성이 되면서,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인력이 비교적 풍부한 지역이었다.
그러다 보니 북미 동해안 지역은 북미왕국의 영토가 된 후로도 계속해서 발전했고, 이렇게 북미 동해안 지역이 발전하면서 수송량이 폭증하자 북미왕국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꾸준히 수송선과 여객선을 건조해 투입했었다.
특히, 북미신문을 비롯한 언론이 발전하면서, 그리고 정성국이 이를 이용해 관광 산업을 키우면서, 늘어나는 여행객들을 위해 더 크고 화려한 여객선들이 대거 건조되어 북미 동해안 지역에 투입되었었고.
이를 떠올리자 운수국장의 장담대로, 충분히 운수국만으로 감당할 수 있어 보였기에, 정성국은 한시름 놓았다는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야...외국인 노동자들의 수송 문제는 해결된 셈이고. 허면 이들의 관리는?”
단기간에 북미왕국으로 50만 명에 달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유입되면서, 그리고 이들이 북미왕국의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하기까지, 이들을 관리하는 데 꽤 애를 먹었었고, 그 때문에 수많은 보고서가 올라왔었던 것이 떠오른 정성국은 여기서 40만 명에 달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추가되는 것이 걱정스러워 묻자, 조용한 곰이 바로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신성로마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과 협상을 진행하면서 실질적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을 관리해야 할 개발청, 도로국, 철도국, 통신국에 미리 이야기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개발청이나 도로국은 기존에 외국인 노동자들을 관리하면서 쌓은 경험이 있기에, 이들을 관리하는 데 자신을 보였고요.”
“허면 철도국과 통신국은?”
“개발청에서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처럼 군사청뿐만 아니라, 치안국에서도 외국인 노동자들의 관리를 돕기로 했고요. 거기에 기존에 북미왕국의 생활에 적응한 외국인 노동자들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이에 정성국이 흥미를 보였다.
“흠? 어떻게?”
“기존의 외국인 노동자 가운데 외국말을 할 줄 아는 이들을 중간 관리자로 삼는 거죠.”
“아하.”
물론 건설 노동자로 고용된 이가 과연 외국말을 할 수 있을까 싶긴 한데, 의외로 북미왕국에 건설 노동자로 지원한 이들 중 상당수가 도시 출신이었고, 유럽의 경우 좁은 지역에 여러 나라가 존재했기 때문인지 주변국의 말을 할 줄 아는 이들도 꽤 되었기에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니 이전과는 달리 외국인 노동자들의 관리 문제로 전하께서 신경 쓰실 일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조용한 곰의 장담에 정성국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거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이야기로군. 허면 내년 초부터는 본격적으로 그동안 개발에서 소외되었던 지역들을 발전시킬 수 있겠군?”
“그렇습니다. 듣자니 개발청에서는 전하께서 둘러보시고 너무 낙후된 것 아니냐고 한탄하셨던 미시간, 오지브와 지역뿐만 아니라, 그동안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발전이 더뎠던 알래스카 지역, 알칸사스 지역, 미주리 지역과 대평원 지역까지 이번에 대대적으로 개발할 생각이라고 하니, 얼마 안 있으면 다른 지역의 백성들도 충분히 북미왕국의 문명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어? 그게 정말인가?”
이전에 오대호 연안 항구를 돌아다니면서 개발청장을 질책한 이후, 개발청장은 무척이나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터라 최근엔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기에,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말에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고.
이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개발청 연구소에서 예전에 세워두었던 각 지역의 개발 계획을 모두 진행한다더군요. 해서 외국인 노동자가 추가로 배정되기 전까지, 지역 개발을 위한 각종 물자와 설비들을 생산하고 수송하는 문제로 개발청장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고요.”
“아. 그래서 최근에 얼굴도 보기 힘든 거군.”
“하하하. 그렇지요.”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딱히 세세한 지시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이는 청장들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역시 가끔은 채찍질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