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0
정일신 3함대 사령관은 시간을 때울 겸 투로시노의 집무실을 들렀다가, 투로시노가 다른 지역을 방문할 때 항상 들고 다니는 여행용 가방을 챙기는 모습을 보고 의아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응? 자네 어디 가나?”
“아. 오셨습니까.”
정일신의 목소리가 들리자, 여행용 가방에 이런저런 물건을 집어넣던 투로시노는 들고 있던 여행용 가방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청나라, 동녕국, 주나라에 잠깐 들러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음? 자네가 직접? 대체 무슨 일로?”
최근 투로시노는 포로나이에서 일을 처리했지, 직접 타국을 방문하는 일은 드물었다.
이는 투로시노의 위상이 무척이나 높아졌기 때문이다.
원래 외교관의 위상은 그 나라의 국력과 직결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이전까지는 아시아의 중심이자 가장 강력한 국가로 알려진 청나라 외교관들의 위상이 무척이나 대단했고.
허나, 청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예상과는 달리 청나라가 이 반란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면서, 그리고 결국엔 청나라가 북미왕국과 유럽 각국의 중재로 반란 세력들을 하나의 나라로 인정하면서, 중국 대륙이 셋으로 쪼개지자,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청나라의 국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자연히 청나라의 대외 영향력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청나라의 위상 역시 수직 낙하했다.
그에 반면, 북미왕국은 조청전쟁 당시, 청나라보다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고, 해외 영토를 통해 아시아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으며, 특히, 동남아시아에서 거침없이 횡포를 부리는 유럽인들마저 북미왕국의 깃발이 보이면 숨을 죽이자, 자연스레 북미왕국의 위상은 급격히 올랐고.
그렇게 북미왕국의 위상이 오르자 당연히 아시아 지역의 외교를 총괄하는 투로시노의 위상도 수직으로 올라갔다.
다만, 그렇게 투로시노의 위상이 오르다 보니, 이전처럼 타국을 직접 방문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나마 예전에 잘나가던 시절을 기억하는 청나라나, 혈맹이자 특별한 관계라는 이유로 자주 조선을 방문했기에, 어느덧 투로시노에게 익숙해진 조선을 제외한다면, 아시아 국가들은 아시아 지역의 외교를 총괄하는 투로시노를 자국의 국왕과 동격이거나 살짝 아래로 대우하다 보니, 그가 직접 타국을 방문하면, 투로시노를 대접하겠답시고 난리를 피우는 통에 오히려 투로시노가 여러모로 불편했던 탓이다.
그리고 북미왕국이 이전과는 달리 동남아시아 지역에 진출하고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넓히기 시작하면서, 투로시노가 감당해야 할 업무도 폭증하다 보니, 섣불리 포로나이를 비우기도 어려웠고.
해서, 최근엔 조선도 거의 방문하지 않을 정도인데, 갑자기 청나라, 동녕국, 주나라에 방문한다고 하니, 정일신은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러나 싶어 질문을 던지자 투로시노가 어깨를 으쓱했다.
“본국에서 명령이 내려왔거든요.”
“명령? 무슨 명령?”
“중국 대륙의 세 나라와 협상해 북미왕국에서 일할 외국인 노동자들을 확보하라는 명령이지요.”
투로시노가 본국에서 전해진 명령을 정일신에게 말해주자, 정일신은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투로시노를 바라보았다.
“응? 외국인 노동자?”
“예. 아시지요? 현재 잉글랜드, 프랑스, 에스파냐와 협상을 맺어 약 50만 명에 달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북미왕국의 발전을 위해 곳곳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물론 알지. 헌데 50만 명에 달하는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고도 부족하대?”
50만 명의 이주민이라면, 그 안에서 실제로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성인 남성은 기껏해야 10만 내외였다.
보통 북미왕국으로의 이주는 가족이 함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이 시대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성인이 채 되지 못하고 죽는 아이들이 워낙 많아 대를 잇기 위해, 그리고 아동 인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시절이라, 10대 중반만 되더라도 노동력을 제공해 가족 경제에 기여할 수 있다 보니, 이 노동력을 위해 아이를 많이 낳았기에, 실제 이주민의 숫자에 비해 성인 남성의 수가 적었던 탓이다.
허나, 외국인 노동자들은 순수하게 성인 남성들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50만 명에 달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제공하는 노동력은 어마어마한 수준인데, 그렇게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해놓고도 아직도 노동력이 부족한 것인가 싶어 정일신이 중얼거리자, 투로시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모양입니다. 뭐 북미왕국 본토는 엄청나게 발전하고 있으니, 전혀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지요. 거기에 본토 인구가 대폭 늘어나면서, 수많은 시설과 건물들을 부족함 없이 지어야 하는 만큼...”
아시아 지역의 외교를 총괄하는 투로시노도 그렇고, 정일신 역시 동아시아 지역의 해역을 책임져야 하는 터라, 포로나이를 쉽게 비우긴 어려웠다.
기러기급, 두루미급 비행기들이 배치되어, 이전보다 더 빠르고 편안히 본토를 오갈 수 있다 한들 말이다.
해서 정일신은 북미왕국, 특히 본토가 급격히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이야 북미신문을 통해 파악했지만, 제대로 실상을 알지 못했고.
그나마 투로시노는 본토에서 파견되는 관리들이나, 본청을 방문하기 위해 새한성을 오가는 휘하 관리들을 통해 현재 본토가 얼마나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지를 들었기에 정일신에게 이를 대략적으로 설명하자, 정일신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 그 정도였나? 이거 조만간 휴가를 내서라도 본토를 한 번 방문해봐야겠는데?”
“하하하.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요.”
“헌데...북미왕국의 사정상 외국인 노동자가 더 필요하더라도 가까운 유럽에서 구하는 것이 낫지 않나? 중국 대륙에서 본토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설사 청나라, 동녕국, 주나라에서 아국의 제의를 받아들이더라도, 외국인 노동자들을 본토까지 실어나르는 일이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대서양 방면의 관문 도시 중 하나인 뉴펀들랜드 섬의 세인트 존스 항에서 유럽 대륙까지 직선거리만 대략 4000km인 반면, 태평양 방면의 관문 도시인 새김포에서 중국 대륙까지는 직선거리만 하더라도 거의 1만km에 달했다.
그러니 이들을 대거 수송하는 것도 일이라 정일신이 지적하자 투로시노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본청에서 증기기관 제작 기술을 미끼로, 동유럽 국가들과 협상해 외국인 노동자들을 확보 중이랍니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인력을 확보하기엔 부족하다고 여기는지, 더 많은 인력의 확보를 위해 청나라, 동녕국, 주나라와도 접촉하라는군요. 그리고 이번 일은 전하께서 직접 챙기시는 일이라, 어떻게든 협상을 성사시켜야 하니 제가 직접 움직이는 게 낫다 싶어...”
“잠깐. 그럼 청나라, 동녕국, 주나라에도 증기기관 제작 기술을 넘긴다는 건가?”
“아. 그건 아닙니다. 동유럽이야 인구가 풍부한 편은 아니라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성인 남성이 대거 빠져나가는 것을 꺼리기에 저들을 설득할만한 미끼가 필요하기도 하고, 어차피 서유럽 여러 나라에 증기기관 제작 기술을 넘긴 터라 언젠가는 증기기관 기술이 동유럽으로 흘러 들어갈 거라 여겼기에 미끼로 사용하는 거지만, 중국 대륙이야 인구가 차고 넘치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요. 돈이나 약간의 군사 물자로 설득할 생각입니다.”
투로시노의 대답에 정일신은 안도했다.
물론 북미왕국의 기술력은 압도적이었기에, 고작 기초적인 증기기관 제작 기술이 중국 대륙의 세 나라에 흘러 들어간다고 한들, 크게 위협적이지는 않긴 했다.
다만, 가장 인구가 적다는 동녕국조차 북미왕국보다 인구가 많다 보니, 정일신은 세 나라의 잠재성을 꽤나 높이 평가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기술 개발의 단초가 될 증기기관 기술이 넘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거 괜찮네. 솔직히 중국 대륙에 증기기관 기술이 알려지는 것은 최대한 늦어졌으면 해서 말이야.”
“그렇긴 해요. 넓은 영토와 막대한 인구를 생각해보면, 저들이 발전을 시작한다면 무섭게 발전할 것 같으니까요. 물론, 그게 쉽지만은 않겠지만요.”
투로시노 역시 정일신의 우려에 어느 정도는 공감했다.
다만, 투로시노는 청나라나 동녕국, 주나라에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기에, 내부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먼 미래에는 몰라도 당장 청나라, 동녕국, 주나라가 발전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보았다.
일단 청나라와 주나라는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청나라는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이 각기 다른 민족이다 보니, 이로 인해 발생하는 혼란이 생각보다 컸다.
청나라가 한창 잘나갈 때야 지배 계층인 만주인들의 통치를 별다른 불만 없이 받아들였던 한족들이었지만, 청나라가 결국 반란 세력을 진압하지 못하고 저들과 타협하자, 청나라가 흔들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해서 청나라는 곳곳에 병력을 배치하고 반란을 진압하는 데 여념이 없었고.
주나라의 경우는 오삼계가 죽은 이후 내부로부터 분열되기 시작했지만, 북미왕국에서 주나라의 황제인 오세번에게 힘을 실어준 이후, 내부 분열이 봉합되었었다.
다만, 이는 임시변통에 불과했고, 그렇기에 삼국 협상이 끝나고 청나라와 화친을 맺어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사라지자 내부에서 다시 분열되기 시작했다.
오세번은 할아버지인 오삼계에게는 충성했을지언정, 자신에게는 이를 드러냈었던 장군들을 논공행상에서 제외하는 등 노골적으로 배척했고, 장군들은 그런 오세번의 처사에 분개하면서 분란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 청나라와 주나라는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할 테고, 그 이후에 발전한다 한들 한계가 있을 거라 보았다.
마지막으로 동녕국의 경우에는, 국왕인 정경이 권력을 틀어쥐고 있었기에 내부의 정치적인 혼란은 없었지만, 문제는 삼국 협상으로 동녕국의 땅으로 인정받은 광동성이었다.
명목상으로 광동성은 청나라의 소유였고, 이를 동녕국에 넘겼지만, 실제로는 강서성을 잃은 이후 광동성과의 연락이 끊기면서, 청나라는 광동성의 지배력을 잃었다.
그리고 북경과의 연락이 끊긴 광동성의 관리들은 독자적으로 세력을 키웠고.
이렇게 독자적으로 세력을 키워 왕처럼 지내던 이들이 이제와서 순순히 동녕국에 머리를 숙이겠는가.
해서 처음에는 숨을 죽이고 돌아가는 사정을 확인하던 광동성의 세력들은, 동녕국이 본격적으로 광동성을 장악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하기 시작하자 서로 손을 잡고 동녕국에 대항하기 시작했고.
생각외로 이들의 기세가 강해 동녕국은 광동성의 장악에 꽤나 애를 먹고 있었다.
특히, 동녕국은 아직 강서성, 복건성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지는 못했기에, 이곳에도 병력을 상당수 배치해야 했으니, 광동성을 장악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고.
그러니 투로시노가 보기엔 청나라, 동녕국, 주나라의 잠재력은 인정하지만, 당장 그 잠재력을 폭발시키기엔 어려워 보였고, 여기에 지금껏 북미왕국을 급격히 발전시켜 온 정성국의 존재까지 생각하면, 기술이 넘어가더라도 큰 의미는 없지 않을까 싶었다.
해서, 투로시노가 정일신의 말에 공감하듯 이야기하면서도 쉽지는 않을 거라는 한마디를 덧붙이자, 정일신은 그건 그렇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그건 그렇지. 그보다, 자네 다음 달에 조선을 방문하기로 하지 않았나? 송림 제철소 완공식에 참석한다며?”
조선은 계속해서 철도 노선을 늘려나가고 싶어했지만, 북미왕국은 당장 북미 대륙에 철도를 부설하는 것이 바빴기에, 이러한 조선의 요청을 들어주기 어려웠다.
해서 조선은 차선으로 자체적으로 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일단 강철을 안정적으로 뽑아낼 수 있는 시설인 제철소 건설과 운영 기술을 이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북미왕국은 고민하다 허락하고, 제철소는 아예 북미왕국에서 지어주기로 결정했고, 이렇게 건설이 시작된 제철소가 다음 달이면 완공된다.
그렇기에 투로시노는 이를 축하하기 위해 완공식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고, 이를 알고 있는 정일신이 이를 언급하자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휴우. 그렇죠. 해서 최대한 빠르게 협상을 끝내야 하고요. 그래서 말인데...”
투로시노가 정일신을 바라보자 정일신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자네가 최대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도록, 쾌속선을 준비해 두지.”
“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