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5
항공기 연구소에서 처음 회전익기의 실험 비행을 먼발치서 참관한 정성국은 그동안 회전익기 연구에 매달렸던 연구원들에게 칭찬과 포상을 약속하면서, 더 좋은 회전익기의 개발을 격려했다.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면서 은근슬쩍 그가 기억하고 있는 전생의 헬기에 관한 지식을 흘려, 은연중에 꼬리날개로 반동을 제어하는 방식을 연구하게끔 유도했고.
그 일까지 마친 정성국은 새한성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연구청 산하 연구소로 향했다.
박기동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항공기 연구소에서 회전익기를 연구했던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전생에서 헬기는 대부분 터보 샤프트 엔진을 사용했다는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터보 샤프트 엔진은 기관 내부에서 연료를 연소시켜 그 폭발력으로 터빈을 돌려 회전력을 얻는 가스터빈 형식의 내연 기관 중 하나인데, 크기에 비해 출력과 신뢰성이 높고, 왕복 엔진과는 다르게 진동이 적어 헬기 엔진으로 무척 적합했다.
그러니, 박기동이 이 터보 샤프트 엔진을 만들어야 제대로 된 회전익기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정성국은 연구소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박기동을 찾았고.
물론 바로 터보 샤프트 엔진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일전에 정성국은 더 나은 성능의 비행기 개발을 위해, 박기동에게 제트 엔진에 관한 개념을 알려준 바가 있었고, 이 제트 엔진에서 더 발전한 것이 바로 터보 샤프트 엔진이었기에 일단 제트 엔진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확인차 들른 것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나 제트 엔진의 개발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묻는 자신의 스승을 보고 박기동은 당황하면서, 현재 정성국이 이야기한 기관을 연구 중이지만, 아직 써먹을 정도는 아니라고 대답했고.
이에 정성국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며, 일단 더 많은 연구 인력을 투입해, 이 제트 엔진의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라고 명령한 후, 새한성의 궁으로 복귀했다.
* * *
청장 회의에 참석한 정성국은 청장들의 보고를 듣고 있었고.
몇몇 청장들의 보고가 끝난 후, 개발청장이 보고를 시작하자, 정성국은 이를 듣다 엉덩이를 들썩거릴 정도로 반색했다.
“오! 그게 정말인가?”
이에 개발청장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전하. 2주 후면 모든 공사가 완료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개발청장의 대답에 다른 청장들도 탄성을 터트렸고, 특히 관리청장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오오! 그럼...?!”
“맞습니다. 2주 후부터는 나이아가라 운하를 이용할 수 있게 되고, 내륙의 발전이 한층 가속화될 겁니다.”
5년 전 개발청에서는 내륙 발전을 위해 수로 정비 사업을 시작했다.
내륙 발전을 위해서는 원활히 물류를 운반할 수단이 필요했고, 아무리 북미왕국이라 하더라도, 당장은 해안가의 주요 도시들을 연결하는 것이 우선이지, 내륙 지역까지 철도를 깔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내륙의 물류를 운반할 수단은 선박 외엔 없었다.
헌데, 미시시피 강은 강폭이 넓고 수량이 무척 많았기에 어지간한 크기의 수송선들은 어려움 없이 드나들 수 있었지만, 일부 지류의 경우 큰 선박이 드나들기 힘든 구간도 있었고, 특히 미시시피 강의 지류에서 오대호로 흐르는 구간이나, 오대호를 자유롭게 배가 드나들기에는 몇몇 장애물이 있었기에, 북미왕국에서는 내륙 발전을 위해 대대적으로 수로를 정비한 것이고.
정성국의 명령으로 개발청에서 수로 정비 사업에 전력을 다했기에, 대부분의 구간 공사는 끝났지만, 이리 호와 온타리오 호를 연결하기 위해 나이아가라 폭포 인근에 건설 중인 나이아가라 운하의 경우, 파나마 운하와 맞먹는 대공사였기에, 다른 구간 공사와는 달리 오랜 시간이 소모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나이아가라 운하 공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러, 오대호와 대서양이, 그리고 북미 내륙에서 대서양까지 뱃길로 연결되어, 내륙의 물류가 더욱 빠르고 손쉽게 북미왕국의 주요 도시가 밀집해 있는 북미 동해안 지역까지 운반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통해 북미왕국 내륙 지역과 북미 동해안 지역의 발전이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정성국을 비롯한 청장들은 개발청장의 보고에 반색할 수밖에 없었고.
“하하하. 정말 고생했네. 고생했어.”
정성국이 무척 만족스러운 얼굴로 박수를 쳐가면서 그동안 수로 정비 사업을 별 탈 없이 진행해 온 개발청장의 노고를 위로하자, 개발청장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겸양했다.
“아닙니다. 전하.”
그리고 개발청장의 겸양에 정성국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5년에 걸친 수로 정비 사업은 대규모 국책 사업이었는데, 이걸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한 것은 다 개발청의 노력 덕분이나 다름없지. 그러니...음.”
한창 개발청장을 칭찬하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에 잠긴 정성국의 모습에 다른 청장들은 고개를 갸웃했고.
그때 정성국의 인근에 앉아 있던 행정청장이 슬쩍 말을 걸었다.
“왜 그러십니까? 전하?”
이에 정신을 차린 정성국이 잠깐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아. 갑자기 생각난 건데...상훈제도를 좀 개편해야겠어.”
“예? 상훈제도를요?”
이런 정성국의 말에 청장들은 뜬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성국은 나라를 운영하는 데 있어 신상필벌이 엄격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마땅히 공을 세운 자에게 상을 주지 않고, 죄를 지은 자에게 벌을 주지 않는다면,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있겠는가.
해서, 정성국은 공을 세운 이에게 충분히 포상해 주었고, 관리들은 이에 만족하고 있었다.
헌데 이러한 상훈제도를 개편하겠다는 정성국의 말에 청장들은 뭐하러 그러느냐는 시선을 보냈고.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도 썩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정성국이 상훈제도를 개편해야겠다고 생각한 원인을 제공한 개발청장이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슬쩍 입을 열자, 정성국은 회의실 안에 있는 청장들을 한 번 둘러보고 입을 열었다.
“그래. 뭐 지금도 썩 나쁜 것은 아니지. 다만...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이들에게 내릴 수 있는 포상이 단순히 승진이나 휴가, 포상금뿐이라는 것이 조금 아쉬워서 그러네.”
이러한 정성국의 대답에 옆에 있던 행정청장이 끼어들었다.
“허나 그것 외에 줄 것이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조선처럼 공신으로 임명해 토지나 노비를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유럽처럼 작위를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리고 행정청장의 의견에 교육청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자, 정성국이 대답했다.
“그렇긴 하지. 해서 말인데...명예를 주도록 하자고.”
정성국의 말에 청장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명예요? 대체...어떻게 말입니까?”
“훈장을 주는 거지.”
“훈장?”
그동안 북미왕국의 관리, 그리고 연구청에 소속된 연구원들은 북미왕국의 발전을 위해 수많은 공을 세웠다.
그리고 정성국은 이들이 세운 공에 승진과 휴가, 그리고 포상금으로 보답했고.
다만, 정성국이 조금 아쉬운 것은 이들이 어떻게 나라에 헌신하고, 공을 세웠는지 다른 이들은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언론을 통해 알린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었고 말이다.
해서 정성국은 전생의 훈장을 떠올렸다.
훈장을 수여함으로써 이들의 공을 널리 알릴 수 있었고, 또 훈장을 수여한 기록이 남기에, 이들의 이름이 북미왕국의 역사에 남으니, 충분한 포상이 될 거라 여긴 것이다.
그렇기에 정성국은 청장들에게 그가 기억하는 전생의 훈장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고.
정성국의 설명이 끝나자, 법무청장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흐음. 그러니까 훈장은 일종의 표식에 불과하지만, 공을 세웠다는 것을 나라에서 인정해준 것이나 다름없군요? 그러니 훈장을 받음으로써 명예를 얻을 수 있고요?”
“그렇지. 어떤가?”
법무청장의 말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른 청장들을 바라보자, 다른 청장들도 정성국이 말한 훈장이 괜찮아 보였던지 긍정적으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괜찮은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확실히 아국의 백성들은 부유한 터라, 돈보다는 명예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지요. 그러니 훈장의 가치는 생각보다 높을 테고, 아마 훈장을 주기 시작하면 관리들은 공을 세우기 위해 더욱 노력할 것 같군요.”
청장들의 긍정적인 대답에 정성국이 만족하며 고개를 돌려 관리청장에게 말했다.
“그렇지? 그러니...관리청에서 상훈제도 개편에 관한 연구를 좀 맡아 주게.”
“알겠습니다. 산하 연구소에 맡기도록 하지요.”
* * *
청장 회의가 끝나자, 정성국은 동생인 정평국을 호출했고.
정평국이 오기 전까지, 열심히 보고서를 처리하던 정성국은 정평국이 집무실에 도착하자 커피를 내어주며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때 방금 전 청장 회의에서 논의되었던 훈장에 관해 이야기하자 정평국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훈장이라...그거 생각보다 괜찮은 생각인데요?”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
이에 정평국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훈장을 받으면 아국의 역사에 이름이 남는 셈 아닙니까?”
“아. 그런 셈이지. 거기에 훈장을 수여 받은 이들은 국립묘지에 안장시킬 생각이니...”
“어? 국립묘지에요?”
현재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는 이들은 나라를 위해 순직 된 이들뿐이었다.
그렇기에 죽어서 북미왕국에서 국립묘지에 안장된다는 것은 대단한 영예였고.
다만, 규정이 그러하기에 본청에서 일하는 관리라던가, 연구소에 틀어박혀 연구만 하는 연구원들의 경우에는, 죽더라도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헌데, 정성국이 훈장을 수여 받은 이들을 위해 이러한 규정을 바꿀 생각이라고 하니, 정평국이 놀란 얼굴로 급히 되묻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훈장을 받을 정도라면, 그만큼 아국에 공을 세웠다는 의미이니, 충분히 국립묘지에 묻힐 자격이 있지.”
생각해보면, 정성국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정성국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엄격한 심사를 통해 대단한 공을 세웠을 때만 훈장을 수여한다고 했으니, 훈장을 받을 정도라면 북미왕국의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는 의미이니 충분히 국립묘지에 묻힐 자격이 있으리라.
해서 정평국은 정성국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이 훈장을 도입함으로써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짐작이 되었기에 감탄사를 토해냈다.
“와...그럼 관리들도, 연구원들도 훈장을 받기 위해 더욱 일에 매달리겠네요?”
“하하하. 그래. 그러길 바라고 훈장을 주는 거지.”
정성국의 대답에 정평국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서로 바쁜 처지에 형인 정성국이 자신을 부른 이유가 이 훈장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흠칫하며 입을 열었다.
“헌데 형님께서 갑자기 절 부르셔서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을 보니...조금 불안한데요? 설마...왕실에서 그 일을 맡으라는 소리는 아니죠?”
“처음엔 그럴까 했는데, 따로 행정기관을 설립해서 그쪽에 맡기는 것이 나아 보이더구나. 아니면, 훈장을 받은 이에게 연금까지 지급하면서 아예 연금 복지국에 맡기던가.”
이에 정평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휴우. 아주 잘 생각하셨습니다. 맞아요.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이들이니 나라에서 관리해야지, 왕실에서 관리하는 것은 조금 아니죠.”
그리고 정성국은 자신의 대답에 무척 안도하고 있는 정평국을 보고 짓궂게 웃으며 그가 기겁할만한 말을 꺼냈다.
“대신, 학문의 발전에 이바지한 이들에게 상을 수여하고 싶은데, 이 일을 네가 좀 맡아줘야겠다.”
가뜩이나 정평국이 맡은 일이 한둘이 아닌데, 여기서 무언가를 또 맡기겠다는 말에 정평국은 기겁했다.
“헉!?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말 그대로다. 뛰어난 학문적 성과를 이룬 이에게 북미왕국 왕실에서 상을 준다면, 이 상을 받기 위해 학자들은 연구에 매진하지 않겠느냐. 그러다 보면 북미왕국의 발전이 더욱 빨라지겠지.”
정성국이 청장 회의에서 청장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기왕 훈장을 도입한 김에, 전생의 노벨상 같은 권위 있는 상을 만든다면, 학문의 발전이 조금 앞당겨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다만, 이 상은 뛰어난 학문적 성과를 거둔 이라면 국적에 상관없이 줄 생각이었기에, 나라에서 주관하기보다는, 왕실에서 주관하는 편이 나아 보였다.
해서 정성국은 전생의 기억을 되살려 정평국에게 자세히 설명하자, 정평국은 걸핏하면 이런저런 일거리를 던져주는 형을 보고 투덜거리듯 말했다.
“어휴. 가뜩이나 바쁜데 이거 너무한 것 아닙니까?”
이에 정성국은 쓰게 웃으며 툴툴거리는 정평국을 달래듯 말했다.
“그래도 어쩌겠느냐. 내가 믿고 이런 일을 맡길 수 있는 녀석이 너뿐인 것을. 그리고 네가 이 일을 주관하되 방금 설명한 것처럼 일종의 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회에서 수상자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하면, 네가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을 게다.”
“휴우.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