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4
봄바람이 한창 불어오는 5월에 정성국은 조용히 항공기 연구소로 향했다.
그리고 항공기 연구소에 도착했을 때, 정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하얀 수리를 보고 혀를 찼고.
항공기 연구소는 한창 신형 비행기 연구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정성국은 자신의 방문으로 이 연구에 지장을 줄 것을 우려해 항공기 연구소의 소장인 하얀 수리에게만 자신의 방문 사실을 알리고, 굳이 의전을 준비할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했는데, 저렇게 기다리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기에.
해서 정성국은 자동차에서 내려 자신을 보고 인사하는 하얀 수리를 보고 타박하듯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오랜만이네. 하얀 수리. 헌데, 내가 이야기하지 않았나. 의전을 준비할 필요는 없다고.”
이에 하얀 수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의전이 아닙니다. 한창 연구하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어 바람을 쐴 겸 나왔는데, 때마침 전하께서 도착하신 거지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하얀 수리의 대답에 정성국이 피식 웃으며 하얀 수리의 등을 밀며 말했다.
“그럼 바람도 적당히 쐬었을 테니, 일단 연구실로 가지. 여기서 이야기해봐야 다른 연구원들이 불편해할 테니.”
“그러시지요.”
그렇게 정성국은 하얀 수리와 함께 그의 연구실로 향했고.
연구실의 냉장고에서 냉차를 꺼내 정성국에게 건넨 하얀 수리는 일단 개인적인 담소를 잠깐 나누었다.
“호오. 안사람이 임신했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하하하. 정말 축하하네. 솔직히 자네는 너무 연구에 매달려서 내심 걱정이었는데, 그래도 결혼도 하고, 또 아이까지 갖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이로군.”
“다 전하의 은덕입니다.”
이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그럼. 자네는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자네 안사람을 보좌관으로 붙여준 것이 나니까.”
하얀 수리는 하늘을 나는 것에 매료되어 비행기 연구에 매달렸었다.
그리고 이건 하얀 수리급 비행기를 만들고 난 이후에도 여전했고.
그러다 보니 정성국은 하얀 수리의 건강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정성국은 항공기 연구를 맡을 적임자는 하얀 수리밖에 없다고 생각했기에, 하얀 수리가 오랫동안 북미왕국 항공기 개발을 이끌어주길 바랐고.
해서, 만날 때마다 더 좋은 성능의 비행기를 개발하기 위해서라도 건강을 챙기라고 열심히 잔소리한 덕분에 조금은 나아졌지만, 자주 항공기 연구소를 방문하는 박기동의 말을 들어보니 여전히 무언가 연구할 것이 떠오르면 식음을 전폐하고 연구에만 매달린다고 하니 정성국으로서는 하얀 수리의 건강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해서 정성국은 하얀 수리에게 보좌관을 붙여주었다.
그것도 참한 여인으로.
물론 하얀 수리가 자신이 붙여준 보좌관과 눈이 맞아 가정을 꾸린다면 좋고,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이 직접 하얀 수리의 건강을 위해 보낸 보좌관이니만큼, 하얀 수리 역시 보좌관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을 테고, 자연스레 하얀 수리의 폭주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여긴 것이다.
그리고 정성국의 짐작대로 하얀 수리는 이런 보좌관이 무척 귀찮았지만, 정성국이 자신의 건강을 우려해 보낸 보좌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이전처럼 식음을 전폐하고 연구에 매달린다거나, 날을 세면서 연구에 매달릴 수 없었고.
그러면서 정이 들었는지, 기러기급, 두루미급 비행기의 시범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는 결혼식마저 올렸기에, 정성국이 하얀 수리의 말에 젠체하자 하얀 수리가 빙긋 웃으며 이야기하는 동안 반쯤 비운 냉차를 단숨에 들이켜고 정성국에게 질문을 던졌다.
“헌데 전하. 항공기 연구소엔 갑자기 어인 일로 오신 겁니까?”
이에 정성국은 하얀 수리의 시간을 오래 뺏을 생각은 없었기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 박기동과 이야기를 나눴을 때, 여기서 꽤 재미있는 연구를 한다고 들어서 말이지.”
“재미있는 연구요? 아. 설마 신형 비행기 연구에 대해 들으신 겁니까?”
하얀 수리는 정성국의 말에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가, 이전에 만난 박기동에게 신형 비행기에 관해 이야기한 것을 떠올리고 묻자 정성국이 고개를 저었다.
“어? 아. 물론 자네들이 5년 안에 개발한다는 목표를 세운 신형 비행기 역시 무척 기대하고는 있네. 50명 내외의 승객을 태우고 4500km나 이동할 수 있는 비행기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잘 아니까. 다만, 아직 연구 초기라고 들었으니, 제대로 된 시제품도 없을 텐데, 굳이 신형 비행기 문제로 내가 여길 방문할 이유는 없지.”
“허면...?”
이에 하얀 수리는 의아하다는 듯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현재 항공기 연구소는 정성국이 말한 것처럼 5년 안에 이 신형 비행기를 개발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기에, 이 신형 비행기 외에는 정성국이 굳이 방문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이런 하얀 수리의 반응에 정성국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박기동에게 듣자니 일부 연구원들이 회전익기라는 것을 연구 중이라면서? 시제품도 막 생산했고?”
“어? 회전익기 때문에 오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정성국이 회전익기 때문에 항공기 연구소를 방문했다는 대답에 하얀 수리는 무척 놀란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았고.
그런 하얀 수리의 반응에 회전익기에 관한 하얀 수리의 생각을 대충 짐작한 정성국이 피식 웃었다.
“의외인가 보군?”
“예. 일부 연구원들이 새로운 형태의 비행체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회전익기를 연구하고 있기는 한데, 제가 보기엔...”
하얀 수리가 말을 흐리자 정성국이 그 말을 받았다.
“쓸모가 없어 보인다?”
이에 하얀 수리는 진지한 얼굴로 정성국을 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전하. 회전익기는 그 구조상 비행기보다 느릴 수밖에 없어서 말입니다.”
일단 이 연구소는 비행기 연구소가 아닌 항공기 연구소였고, 그렇기에 일부 연구원들이 새로운 구조의 비행체를 만들고 싶다면서 회전익기의 설계도를 가져왔을 때, 하얀 수리는 굳이 이를 막지는 않았지만, 크게 의미는 없다고 보았다.
하늘을 나는 항공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속도였는데, 회전익기는 그 구조상 비행기보다 빠를 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만, 자신에게 회전익기의 설계도를 가져온 연구원들은 비행기보다는 회전익기에 개발에 강한 흥미를 보였고, 비록 회전익기가 쓸모는 없다 하더라도, 회전익기의 연구를 통해 확보한 기술을 이용하면 더 나은 성능의 비행기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회전익기의 연구를 허락했을 뿐이었고.
헌데 정성국이 회전익기에 관심을 보이고, 정성국의 통찰력을 생각해보면, 미처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하얀 수리가 정성국의 대답을 기다리자, 정성국이 입을 열었다.
“자네 말이 맞아. 회전익기는 비행기보다 느릴 수밖에 없지. 이는 기술이 발전한다 해도 바꿀 수 없을 테고. 다만, 회전익기는 거대한 회전날개를 이용해 양력을 확보할 수 있으니, 이착륙하는 데 활주로가 필요 없다는 장점이 있지 않나.”
“그렇기야 합니다만...”
하얀 수리도 그 점을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어차피 북미왕국은 넓은 만큼, 활주로야 필요하면 만들면 그만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고.
그런 하얀 수리의 반응에 정성국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아는데, 그것만으로도 회전익기는 충분한 가치가 있네. 특히, 단거리 이동수단으로는 충분하지.”
“단거리 이동수단이라...”
하얀 수리가 정성국의 말에 무언가 생각하는 눈치이자 정성국이 눈앞의 냉차를 단숨에 들이켠 후 말했다.
“그래. 지금도 자동차 생산 공방에서는 수많은 자동차가 생산되어 도로를 누비고 있고, 덕분에 도심 곳곳에선 조금씩 정체가 생기고 있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겠지. 허면, 예전엔 30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나중엔 40분, 1시간이 걸려서 도착할 수 있을 테지.”
“...아. 그렇군요. 자동차는 도로가 비어 있지 않다면 제대로 속력을 내기 어렵지만, 회전익기는 하늘을 나는 만큼, 항상 전속력으로 날 수 있겠어요.”
하얀 수리가 정성국의 말에 수긍하듯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이를 반기며 계속 이야기했다.
“맞아. 그러니 회전익기는 도심에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이동수단으로 꽤나 적합해. 물론, 자동차와 회전익기의 가격과 유지 비용을 생각하면야 자동차가 월등히 효율적이지만, 때로는 효율보다는 시간을 선택해야 할 필요도 있는 거니까.”
“그야 그렇지요.”
“그리고 회전익기는 적당한 공터라면 어디서든 이착륙할 수 있고, 또 하늘에서 가만히 떠 있을 수도 있으니, 꼭 도심뿐만 아니라, 다양한 지형에서 다양한 목적으로 무척이나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테고.”
그러면서 정성국은 전생에서 다양한 목적으로 이용되었던 헬기들을 떠올리며 하얀 수리에게 이를 이야기했고.
정성국의 말을 들어보니, 회전익기는 비행기와 경쟁하는 항공기가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는 항공기라는 사실을 이해한 하얀 수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으음...전하의 말씀을 들어보니, 회전익기는 회전익기 나름대로 수요가 있겠군요.”
하얀 수리가 회전익기의 가능성을 완전히 이해한 듯 하자 정성국은 반색했다.
하얀 수리의 얼굴을 보아하니, 앞으로는 신형 비행기 연구뿐만 아니라, 회전익기의 연구에도 신경을 쓸 것 같았기에.
“그렇지. 해서 박기동에게 항공기 연구소에서 회전익기를 연구한다는 말을 듣고 바로 오려다가, 한창 회전익기의 시제품이 제작 중이라는 소리에 시제품이 완성되기만을 기다린 거고.”
정성국의 말에 하얀 수리는 정성국이 왜 오늘 항공기 연구소를 방문한 것인지를 이해하고 조금 난감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허나 이번 회전익기의 시범 비행은 실패할 가능성이 무척 큰데...”
그 말에 정성국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실패 좀 하면 뭐 어떤가. 실패를 통해 얻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니고.”
물론 실패를 통해 얻는 것은 꽤 많았다.
다만, 정성국이 보는 앞에서 자신들이 만든 시제품이 실패한다는 것은 연구원들이 압박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해서 하얀 수리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통해 시간을 확인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전하. 그럼 일단 가시지요. 곧 회전익기의 시범 비행이 시작될 예정이니까요.”
“오. 그래? 그럼 빨리 가야지.”
하얀 수리의 말에 정성국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 항공기 연구소에 딸린 여러 활주로 가운데 제3 활주로 방면으로 이동했고.
한창 회전익기의 첫 시범 비행 때문에 정신없을 연구원, 기술자, 조종사들을 배려해 정성국은 멀리서 발걸음을 멈추고, 제3 활주로 한가운데에 놓인 북미왕국에서 최초로 개발한 회전익기의 모습에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게 이번에 개발한 회전익기인가?”
“그렇습니다.”
“흐음...모양이 독특하군.”
“하하하. 그렇지요?”
하얀 수리의 대답에 정성국은 팔짱을 끼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일반적인 테일로터 방식이 아니라 병렬로터 방식이라니...’
원래 헬기는 회전하는 로터로 양력을 얻어 하늘을 나는데, 중심에 있는 로터만 돌아가면, 작용-반작용의 법칙에 의해 로터가 도는 만큼, 동체가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게 된다.
영화에서 꼬리날개가 망가졌을 때, 헬기가 빙빙 회전하다 추락하는 것이 다 그 때문이고.
해서 이 반동을 해소하기 위해 수많은 방식의 헬기가 있는데, 일반적인 방식은 바로 꼬리에 로터를 달아 반동을 상쇄시키는 테일로터 방식이다.
헌데 항공기 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회전익기는 하얀 수리급 비행기와 비슷한 모양의 동체의 날개 양쪽에 회전날개를 2개 부착한 것을 보니, 헬기 개발 초창기에나 사용했다는 병렬로터 방식인 것으로 보였고.
그리고 이런 병렬로터 방식이 사라지고 테일로터 방식이 헬기의 주류가 된 것은, 그만큼 테일로터 방식이 안정적이라는 생각에 정성국은 이번 시범 비행이 끝나면 슬쩍 이를 말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하얀 수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막 실험 비행이 시작되는 모양입니다.”
이에 정성국은 생각을 멈추고 회전익기에 시선을 집중했고.
2개의 회전날개가 빠르게 회전하자, 점차 동체가 들썩이는 모습에 정성국을 비롯해 주변의 사람들은 다들 탄성을 질렀고, 곧 동체를 들썩이던 회전익기가 천천히 뜨기 시작하자 정성국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오! 뜨는군! 하하하. 이거 놀라운데? 저게 첫 실험기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하하하. 이거 비행이 한 번에 성공할 줄은 몰랐는데...”
그때 약 10m 상공까지 올라갔던 회전익기가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하자, 정성국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이번 시험 비행은 단순히 회전익기의 이착륙 정도인가?”
“그렇습니다. 듣기로 회전익기의 제어가 그리 쉽지 않아서, 최대한 안전하게 실험하라고 명령했거든요.”
하얀 수리의 말에 정성국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비틀거리면서도 다시 안전하게 활주로에 착륙한 회전익기를 보고 씩 웃으며 말했다.
“잘 했네. 그리고 저걸 보니 충분히 가능성 있어 보이니...”
“물론입니다. 회전익기의 개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그래. 자네만 믿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