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
정성국은 예정도 없이 급히 집무실을 찾아온 조용한 곰을 보고 용건을 물었고.
신성 동맹과 오스만 제국 간의 협상이 마무리되어 오늘 자로 종전 조약에 서명했다는 조용한 곰의 보고에 정성국이 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흠. 드디어 신성 동맹과 오스만 제국 간의 협상이 모두 끝났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이에 정성국은 자신의 존재로 다시 한번 역사가 제대로 틀어졌음을 실감했다.
원래 전생에서는 오스만 제국이 빈을 공격했다가 패배하면서, 이 패퇴한 오스만 제국군을 추격하기 위해 신성 동맹이 결성되고, 신성 동맹군이 동유럽에 진출해 17년간의 전쟁 끝에 오스만 제국은 결국 헝가리를 비롯한 동유럽 영토 상당수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면서 오스만 제국의 쇠퇴가 시작되었고 말이다.
허나, 지금은 신식 소총 덕분에 신성 동맹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었기에, 큰 손해 없이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전생보다 오스만 제국의 수명이 길어질 것 같았기에, 그리고 자신이 개입한 덕분에 발칸 반도는 계속해서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남을 것 같아 조금 묘한 표정을 지었고.
다만, 어차피 이런 일은 북미왕국을 세우면서 비일비재했기에, 정성국은 바로 감정을 털어버리고 조용한 곰에게 말했다.
“그럼 이것으로 유럽에 평화가 찾아온 셈인가?”
이에 조용한 곰은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은 그렇습니다만...뭐 유럽이야 걸핏하면 전쟁을 벌이니 또 모르는 일이지요. 다만...”
“다만?”
“당분간은 조용할 듯싶습니다.”
“그래?”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이 왜 그런 예상을 하느냐는 눈빛을 보내자 조용한 곰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예. 신성로마제국은 연이은 전쟁에 당분간은 전쟁할 여력이 없고, 신성 동맹에 속한 다른 나라들도 상황은 비슷하니까요. 그리고 오스만 제국도 상황을 쉽게 보고 전쟁을 일으켰다가 고생 좀 했으니, 당분간은 자제하지 않을까 싶고요.”
“흐음...”
물론 동유럽 국가들은 확실히 조용한 곰의 말대로 상황이 썩 좋지는 않았기에, 당분간은 전쟁보다는 내실을 가할 것 같기는 했다.
다만, 문제는 프랑스였다.
루이 14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둘러싸인 현 상황을 무척 거슬려 했기에, 연이은 전쟁으로 체력이 고갈난 신성로마제국을 과연 두고 볼까 싶었기에.
‘특히, 아국과 잉글랜드가 중재해 체결한 종전 조약에는 신성로마제국이 빠져있는 것이 영 걸리는데...’
한창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던 신성로마제국은, 오스만 제국이 빈을 향해 진격하자 기겁해 급히 교황청에 도움을 요청해, 교황청의 중재로 프랑스와 종전 조약에 서명했다.
물론 프랑스 역시 가톨릭 국가인 만큼, 교황청의 중재로 맺은 종전 조약을 섣불리 파기할까 싶기는 한데, 전생에서도 루이 14세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신성 동맹을 결성하고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주도하는 신성로마제국의 뒤통수를 때렸던 적이 있었기에.
해서, 정성국은 조금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을 때, 조용한 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유럽의 분위기가 그렇습니다.”
“음? 분위기?”
“전하께서 유럽을 방문하셔서 아국의 힘을 과시하셨잖습니까. 그 때문에 아국의 국력이 다른 유럽국가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지요. 그러니 지식인들 사이에선 역량을 집중해 어떻게든 아국과의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해야 할까요?”
“호오. 그래?”
정성국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유럽의 동향을 이야기하는 조용한 곰이었고.
이에 정성국이 흥미를 보이자, 조용한 곰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물론, 유럽인들도 아국이나 전하의 성향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고, 그 때문에 그렇게 군사력에서 차이가 심하게 난다 하더라도, 아국이 유럽 나라들을 점령하겠다고 나서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는 있습니다. 허나, 만에 하나라도 아국의 정책이 바뀐다면? 과연 북미왕국을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지 않습니까.”
일단 정성국은 유럽을 침공할 의사가 없다는 사실은 유럽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처음 북미왕국이 에스파냐와 전쟁을 치르며 등장했을 때만 하더라도, 유럽국가들은 북미왕국을 꽤 호전적인 국가라고 여겼지만, 북미왕국이 북미 대륙을 완전히 장악한 이후에는, 북미 대륙의 개발에 집중할 뿐이지, 대외 확장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으니까.
물론, 최근에 북미왕국이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지역에 진출하긴 했지만, 이는 네덜란드의 요청에 의한 것이기도 했고, 북미왕국의 배들이 움직이려면 연료를 보급받을 수 있는 항구가 필요했기에, 교역을 위해 전 세계 곳곳에 항구를 확보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러나 북미왕국은 왕정 국가였고, 특히 국왕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 국가였다.
그러니 정성국 사후에는 북미왕국 국왕의 성향에 따라 북미왕국의 정책이 바뀔 수 있었고.
특히, 유럽의 경우엔 이런 일이 많았기에, 유럽의 지식인들은 이 부분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고, 조용한 곰의 설명에서 이를 이해한 정성국이 매끈한 턱을 매만지면서 중얼거렸다.
“흠. 아국의 힘을 제대로 보여줘서 유럽에 영향력을 확대한 것은 좋은데, 그만큼 저들에게 두려움도 심어준 건가?”
“비슷합니다. 아무리 북미왕국이나 전하께서 유럽을 공격할 의사가 없다 하더라도, 맹수와 한 울타리에서 지내야 하는 초식 동물들은 벌벌 떨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우리가 맹수고, 다른 나라들은 초식 동물이라는 소린가?”
이에 조용한 곰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얼굴로 대답했다.
“솔직히 아국이 마음만 먹는다면, 유럽 전체를 점령하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잖습니까. 물론 점령한다고 해도 딱히 이득이 없으니 두고 볼 뿐이지요. 그러니 아국은 맹수, 다른 나라들은 초식 동물이 맞긴 한 것 같습니다만...”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쓰게 웃었다.
물론, 북미왕국이 마음만 먹는다면 유럽국가 한 둘은 충분히 점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미왕국이 유럽을 침공하면, 분명 유럽국가들은 모두 동맹을 맺고 거세게 저항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무리 북미왕국이라 하더라도, 유럽 전체를 점령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무기만 우월하다고 해서 모든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전생의 미국은 참여한 모든 전쟁에서 승리했어야만 하니까.
다만, 이 문제를 논의해봐야 의미가 없었기에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난 조금 생각이 다르지만, 중요한 것은 아니니 일단 넘어가도록 하고. 아무튼, 상황이 그러하니 유럽국가들이 당분간은 아국과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애를 쓰느라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저들도 잘 알거든요. 기술을 개발하는 데에 막대한 비용이 소모된다는 것을 말이지요.”
처음 북미왕국과 접촉 후, 북미왕국의 기술이 자신들보다 월등하다는 사실을 파악한 서유럽 국가들은 북미왕국의 기술을 따라잡기 위해 학자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허나, 북미왕국과 유럽국가 간의 기술 격차는 무척이나 커서, 이를 따라잡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그러다 보니 연구 인력은 더 늘어나고 연구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만큼 더 많은 비용이 소모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유럽인들은 잉글랜드가 유럽국가들 가운데 최초로 증기기관을 상용화할 수 있었던 이유가 전쟁 때문에 재정을 소모해야 했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섬이라 유럽의 전쟁에서 한발 비켜나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여기고 있었고.
여기에 북미왕국에서는 자신들의 발전이 북미왕국 특유의 교육 체계 덕분이라고 설명했고, 이 때문에 일부 유럽국가의 경우 기술 발전을 위해 전 백성을 가르치는 북미왕국 특유의 교육 체계를 이식하고자 했는데, 그러려면 막대한 비용이 소모될 수밖에 없으니, 섣불리 전쟁을 결정하지는 못할 거라는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을 하려면 정말 막대한 돈이 전비로 소모되었으니.
다만, 정성국은 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지. 헌데, 저들이 노력한다고 해서 과연 아국과의 격차를 줄일 수 있을까?”
이에 조용한 곰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북미왕국은 미친 듯이 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겨우 걸음마를 떼고 있는 유럽국가들이 무슨 수로 따라잡겠는가 싶었기에.
“물론 불가능하겠지요. 그러니, 당분간은 평화가 계속되지 않겠습니까?”
“정말 그랬으면 좋겠는데...”
유럽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아무래도 북미왕국의 수출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북미왕국의 백성들은 부유하기에 내수 시장의 규모가 무척 큰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유럽에 판매하는 사치품을 비롯한 각종 수출품이 북미왕국의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았기에.
‘젠장. 이래서 하루라도 빨리 북미왕국의 인구가 늘어났으면 좋겠는데...아?!’
“그보다, 신성 동맹과 오스만 제국 간의 협상이 끝났으니, 이를 중재한 대가를 받아내야 하잖나.”
일전에 조용한 곰이 신성 동맹과 오스만 제국 간의 협상을 중재한 대가로, 이주 협정을 맺어 더 많은 이주민을 확보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었다는 것이 떠올라 정성국이 눈을 번뜩이며 조용한 곰을 바라보자, 조용한 곰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그렇지요. 해서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신성 동맹 각국과 이주 협정을 맺기 위해 협상을 진행 중입니다.”
“혹여 저들이 반발하지는 않고?”
이에 조용한 곰은 정성국이 무엇을 우려하는지를 깨닫고 괜찮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무제한으로 이주를 허용하는 방식이라면야 당연히 반발하겠지만, 각국이 크게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정도로 제한을 두었기에, 별다른 반발은 없습니다.”
“호오. 그래? 수가 얼마나 되길래?”
“아직 협상이 진행 중이기는 합니다만, 아마 다 합치면 1년에 대략 10만 명 정도의 이주민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에 정성국의 표정이 조금 애매해졌다.
1년에 10만 명이라는 숫자는 분명 적지 않은 숫자이기는 했다.
하지만, 신성 동맹에 속한 나라들과 정식으로 이주 협정을 체결하면, 그동안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던 이들 중 상당수는 다시 돌려보내야 했으니, 유럽에서 유입되는 이주민의 수가 확 줄어들 것이 분명했고.
여기에, 이번에 정성국이 잉글랜드를 방문해서, 제임스 2세와 합의한 덕분에, 계속해서 아일랜드인들을 북미왕국으로 이주시킬 수 있었지만, 그동안 꾸준히 아일랜드인들을 북미왕국으로 이주시킨 덕분에, 이제 아일랜드에 아일랜드인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까지 고려하면, 이번 이주 협정에 꽤 기대하고 있었던 정성국은 아쉬울 수밖에 없었고.
“흠. 신성 동맹에 속한 나라들을 다 합쳐서 말이지? 생각보다는 조금 적은 것 같은데?”
이런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너무 많은 백성이 유출되는 것은 경계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해서 저들의 반발을 줄이기 위해 이주민의 수를 확 줄였습니다. 대신, 20년짜리 협정이니, 유럽에서만 200만에 달하는 이주민을 확보할 수 있고, 이 정도면 나쁘지 않잖습니까.”
이에 정성국이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아쉬움을 털어버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 정도면 나쁘지 않네. 그리고 아국의 출산율이 나날이 높아지면서 계속해서 아이들이 태어나고 있으니...뭐 그 정도로 만족하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