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798화 (798/850)

#798

정성국이 한참 집무실에서 보고서를 살피고 있을 때, 누군가가 집무실의 문을 두드린 후 안으로 들어왔고.

이에 고개를 들자, 전아라가 정성국을 보고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오라버니. 바쁘세요?”

“어? 여긴 웬일이야? 요샌 바쁘다고 잘 안 왔잖아?”

원래 전아라와 하얀 들꽃은 종종 간식을 들고 집무실을 찾아왔었다.

다만, 아무래도 집무실에서 가까운 곳에서 일하는 하얀 들꽃과는 달리, 전아라가 주로 머무는 곳은 궁 내에 만들어 놓은 개인 연구실이나 아니면 궁 밖의 연구소이다 보니, 집무실을 찾아오는 빈도가 하얀 들꽃보다는 적었고.

여기에 최근에 전아라가 맡고 있는 여러 연구로 인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에, 예전처럼 집무실을 방문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전아라였다.

해서 정성국이 오랜만에 집무실을 찾은 전아라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자, 전아라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

“보고드릴 것도 있고, 오라버니 말씀처럼 최근엔 연구하느라 바빠 집무실을 방문하지 않은 것 같아서 겸사겸사 온 거죠.”

“하하하. 그래. 잘 왔어. 아침, 저녁에 보는 거랑 낮에 집무실에서 보는 건 또 느낌이 다르니까. 일단 앉아.”

정성국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오랜만에 집무실로 찾아온 전아라에게 대접하기 위해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고.

정성국이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방긋방긋 웃으며 바라보고 있던 전아라는 슬쩍 정성국의 책상을 확인하고 말을 건넸다.

“그보다 밀린 보고서는 다 처리하신 모양이네요?”

“아. 그래. 겨우 처리했지 뭐.”

“그래도 다행이네요. 이제 저녁도 같이 먹을 수 있고,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테니까요.”

오랫동안 새한성을 비웠기에 밀린 보고서가 어마어마했고, 이 밀린 보고서들을 처리하느라, 정성국은 새한성에 복귀한 후, 계속해서 야근을 해왔다.

당연히, 저녁도 가족들과 함께 먹기보다는 이곳 집무실에서 간단히 때웠었고.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까지 이동하는 시간조차 아까웠달까.

다만, 이런 경우가 종종 있긴 했었다.

주로 보고서들이 몰리는 연말이라던가, 정성국이 새한성을 잠깐 비웠을 때라던가 등등.

그리고 그때마다 전아라는 정성국이 무리하는 것을 걱정했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고.

해서 정성국은 잠깐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탄식하듯 말했다.

“아...그러고 보면 네가 조금 적적하긴 했겠구나. 안문이도 없고, 나도, 하얀 들꽃도 새한성에 복귀한 후론 밀린 보고서를 처리하느라 계속 늦게 들어갔으니까.”

평소에는 왕실 가족 전체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며 자기 전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었기에, 항상 떠들썩했었다.

헌데 정성국과 하얀 들꽃은 밀린 보고서 때문에 매일 밤늦게 돌아왔고, 그동안 품 안의 자식이라 여겼던 정안문은 군사대학에 입학하면서 기숙사에 들어가 버렸으니, 이전과는 달리 전아라의 마음은 적적했을 것이 분명했고.

이를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밀린 보고서를 처리하는 데에 정신이 팔렸었던 정성국은 그제야 무척 미안한 표정으로 전아라를 바라보았고, 이에 전아라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조금 그렇죠? 그래도 나리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음?”

“안문이가 대학교 기숙사에 들어간 이후에 제가 조금 적적해하는 눈치이자 나리가 이전보다 더 살갑게 다가와 제 마음을 달래주더라고요.”

“하하하. 녀석 참...”

아무래도 이런 섬세함과 눈치는 왕실 가족 중에 정나리를 따라갈 자가 없긴 했다.

해서, 정성국은 웃으며 나중에 정나리에게 칭찬 겸 보상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고.

더불어 아무리 정나리라 해도 전아라의 마음을 완전히 달래주지는 못했으리라 여기고, 어느새 내려진 커피를 건네며 그동안 바빠서 나누지 못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보다 오라버니.”

“음?”

“너무 놀라지 마세요?”

전아라가 정성국을 보고 빙긋 웃으며 이렇게 이야기하자 정성국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응?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전아라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드디어 페니실린의 대량 생산에 성공했어요.”

“뭐? 그게 정말이야?!”

전아라의 말에 정성국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약 4년 전, 김 의원과 의학 연구소의 연구원들이 항균작용을 하는 푸른곰팡이를 발견한 후, 꾸준히 연구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 끝에, 이 푸른곰팡이에서 세균을 죽이는 작용을 하는 물질인 페니실린을 추출하고, 이를 정제해 마침내 항생제를 만들어낼 수 있었고.

이는 정말 대단한 성과였다.

지금 시대에는 살짝 다치기만 하더라도, 세균 감염으로 인해 상처 부위 전체를 도려내거나, 아니면 사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시대였다.

헌데 항생제를 만들어냄으로써, 이전까지는 치료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던 이런 세균성 질환들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리고 전생에서도 이 항생제의 개발로 수억 명의 생명을 구했다고 이야기할 정도이니 정성국이 처음 항생제가 개발되었다는 소리에 얼마나 기뻐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하리라.

허나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 항생제를 대량생산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연구원들이 실험실에서 배양한 푸른곰팡이에서 채취한 페니실린으로는 항생제를 얼마 만들지 못했고, 들어가는 비용도 생각보다 커서, 제대로 써먹을 수가 없었달까.

그리고 전생에서도 처음 이 페니실린을 발견하고, 실제 효능을 확인한 후, 화학공학자들이 대량생산하는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제대로 써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기에, 정성국은 김 의원에게 화학자들과 함께 연구해보라고 권유했었고.

해서 전아라가 이 일을 맡아 진행하고 있었지만, 큰 성과는 없었었다.

헌데 드디어 페니실린의 대량 생산에 성공해, 항생제를 마구 만들어낼 길이 열렸다고 하니 정성국은 잔뜩 흥분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전아라는 정성국에게 조금 진정하라는 듯 손짓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정말이죠. 항생제의 대량 생산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페니실린의 원료라 할 수 있는 푸른곰팡이의 배양 문제였던 것은 오라버니도 잘 아시죠?”

“그랬지. 푸른곰팡이를 배양하는 것이 무척 까다롭다고 네가 한탄을 했었잖아. 그리고 발효 후 페니실린을 추출하는 공정도 생각보다 까다롭다고 했었고.”

전아라가 이 일을 맡았으니, 당연히 정성국도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해서 정성국이 전아라의 말에 바로 대꾸하자 전아라는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살포시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맞아요. 배양하는 도중에, 그리고 발효하는 도중에 걸핏하면 푸른곰팡이가 죽어버렸으니까요. 해서 수율이 무척이나 낮았고, 항생제가 필요한 세균성 질환에 걸린 수많은 환자들에게 사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어요.”

이에 정성국이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그랬지. 그래서 김 의원이 무척 한탄했었고. 항생제라는 기적의 약을 개발해놓고도, 생산을 제대로 하지 못해 환자를 치료하지 못하고 죽는 것을 봐야 했으니까.”

실제로 처음 항생제 개발에 성공하고, 실제 이렇게 개발한 항생제를 사용해서, 그동안은 치료하지 못했던 여러 세균성 질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되자 김 의원을 비롯한 수많은 의원들은 무척 고무되었었다.

세균성 질병에 걸린 환자들은 많았는데, 이 항생제만 있다면 이들을 모두 치료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해서, 의원들은 이 항생제를 기적의 약이라고 부를 정도였고.

헌데, 항생제를 이용해 치료할 환자는 많은데, 실험실 수준에서 기존의 방식으로 페니실린을 추출해봐야 그 양이 얼마 되지 못하다 보니, 의원들은 탄식할 수밖에 없었고.

왕실 주치의인 김 의원과 자주 만났기에 이에 관한 푸념을 가끔 들었었던 정성국이 이를 언급하자 전아라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죠. 해서, 어떻게든 항생제를 대량 생산하기 위해 연구청뿐만 아니라 연구청 산하 연구소들, 그리고 세균이나 미생물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모두 초청해 푸른곰팡이를 안정적으로, 그리고 대량으로 배양하는 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동시에, 화학자들은 인공적으로 페니실린을 합성할 방법과, 푸른곰팡이에서 더 효과적으로 페니실린을 추출해 항생제를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고요.”

“어? 그럼 설마 인공적으로 페니실린 합성을...?!”

전생에서도 초창기에야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추출해 항생제를 만들었지만, 이후 과학이 발전하면서는 인공적으로 페니실린을 합성했기에, 정성국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전아라를 바라보자, 전아라가 쓴웃음과 함께 손을 내저었다.

“아쉽게도 그건 아니에요. 일부 성과가 있긴 한데...아직 페니실린을 인공적으로 합성하지는 못했어요”

“아...그래?”

혹시나 했었지만, 전아라의 대답에 정성국은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었고.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전아라가 슬쩍 덧붙였다.

“예. 그나마 푸른곰팡이에서 추출한 페니실린을 항생제를 만드는 공정을 최대한 개선해 항생제의 효능과 수율을 올릴 수 있긴 했지만요.”

“허어...그것만 해도 대단한 건데?”

정성국이 보기엔 항생제를 만드는 공정을 개선해 항생제의 효능과 수율을 올린 것도 대단하다 여겨 감탄했지만, 전아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역시 항생제의 원료가 되는 푸른곰팡이의 대량 배양이나, 페니실린의 인공적인 합성이니까요. 아무튼, 해서 계속 연구하는 도중에 한 연구원이 기발한 발상을 떠올렸어요.”

“기발한 발상?”

“예. 아예 커다란 발효조에 전동기를 장착해 배양액을 휘저으며 공기를 불어 넣어준다면, 푸른곰팡이를 대량으로 배양하고 발효해 페니실린을 손쉽게 추출할 수 있다는 거지요.”

그 말에 정성국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기억해보니, 전생에서도 페니실린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진 것은 딥 탱크 발효법으로 인해 가능했었다는 글귀를 본 기억이 있었지만, 이게 정확히 어떤 방법인지는 몰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끙끙대는 전아라를 보고도 아무런 조언도 해주지 못했었는데, 전아라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저 연구원이 떠올린 방법이 바로 전생의 딥 탱크 발효법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호오. 그럴싸하게 들리는데?”

“그쵸? 해서 바로 연구청에 말해 전동기가 장착된 커다란 발효조를 만들어 실제 실험을 해 보았는데...효과가 있었어요. 대량으로 페니실린을 추출할 길이 열린 거죠.”

“그럼...”

정성국이 전아라를 바라보자, 전아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제는 항생제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고, 지금처럼 세균성 질병으로 인해 죽는 환자들은 대폭 줄어들 거에요.”

전아라의 선언에 정성국은 활짝 웃다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있는 전아라를 강하게 껴안으며 말했다.

“하하하. 정말 고생했다. 고생했어.”

전아라가 정성국을 통해, 이 페니실린의 대량 생산이 가지는 의미를 깨닫고, 그동안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척 애썼다는 사실을 알기에 정성국은 전아라의 노고를 위로했고.

그런 정성국의 위로에 전아라는 그동안의 고생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오히려 더 빨리 이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지요.”

“에이. 그렇게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고.”

전아라의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저으며 전아라의 등을 몇 번 더 쓰다듬어준 후 포옹을 풀고 전아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보다, 그럼 빨리 움직여야겠다. 지금도 항생제가 없어서 죽어가는 환자가 있을 테니까.”

“알겠어요. 오라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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