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796화 (796/850)

#796

정성국이 한창 집무실에 처박혀 밀린 보고서를 처리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며 집무실로 들어왔고.

“부르셨습니까. 스승님.”

오랜만에 듣는 제자인 박기동의 목소리에 정성국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 왔구나. 저기 앉아서 잠깐만 기다려라. 이것만 확인하고.”

이에 박기동은 고개를 끄덕이며, 티테이블에 앉아 정성국을 잠시 기다렸고.

잠시 후, 읽고 있던 보고서에 서명한 정성국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기동이 앉은 티테이블 쪽으로 이동하면서 중얼거렸다.

“어후. 죽겠네. 아주.”

정성국이 무척이나 피곤한 기색으로 목덜미를 주무르며 이렇게 중얼거리자, 박기동이 그런 스승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거의 한 달 가까이 새한성을 비우셨으니 일이 밀려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죠. 그리고 유럽에서 편히 쉬고 오셨으니 이 정도는 감수하셔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에 정성국은 막 커피를 내리고자 준비하다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박기동을 바라보았다.

“엥? 내가 유럽에서 편히 쉬었다고?”

이 무슨 황당한 소리냐는 정성국의 반응에 박기동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 아닙니까? 북미신문에는 스승님께서 덴마크와 잉글랜드에서 휴식을 취하셨다고 쓰여 있던데요?”

당연히 북미신문은 이번에 정성국이 유럽을 방문한 것을 밀착 취재했다.

북미왕국에서 정성국만큼 북미왕국 백성 전체의 관심과 지지를 한 몸에 받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정성국이 딱히 좋은 취재 대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대외적인 활동을 아예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로 집무실에 처박혀 업무만 보다 보니, 쓸만한 기삿거리를 제공해주지 않는 편이었으니까.

거기에 북미신문은 왕실 소유이다 보니, 정성국의 사생활에 관한 기사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막상 기삿거리로 쓸 만한 내용이 딱히 없기도 했고.

헌데, 이번에 정성국이 동맹인 스웨덴 국왕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직접 유럽을 방문한다고 하니 북미왕국 백성들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고, 특히, 정성국의 호위를 위해 대규모 호위 함대와 호위 병력까지 대동한다고 하니, 북미신문에서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특히, 북미왕국의 대규모 호위 함대, 호위 병력을 보고 유럽인들이 놀라고, 감탄하고, 경악하는 모습을 가감없이 내보내기만 해도, 북미신문의 판매량이 급격히 증가할 것이 뻔히 보이는데.

해서 북미신문에서는 정성국에게 요청해 허락을 받고 이번 유럽행에 함께 따라간 것이다.

그리고, 외무청의 연락망을 통해 이번 정성국의 유럽행 기사를 본토로 보냈고.

덕분에 북미왕국 백성들은 북미신문을 통해 며칠의 시차를 두고 정성국의 행보를 상세히 파악했고, 당연히 정성국이 칼 11세와 울리카의 결혼식, 그리고 찰스 2세의 장례식, 제임스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덴마크나 잉글랜드에서 관광하며 잠시 휴식했다는 파악하고 있었다.

해서 박기동이 이를 언급하자, 정성국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뭐 중간에 잠깐씩 쉬기는 했지. 다만 그래 봐야 며칠 정도에 불과했고, 그 전까지 계속 유럽 귀족들에게 시달렸었다고.”

“오우. 며칠씩 쉬셨다고요? 그럼 보고서가 밀린 것은 감수하셔야죠. 암요.”

그러나 며칠이라도 쉰 것이 어디냐는 박기동의 반응에 정성국은 쓰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거참. 보고받기로는 연구청 소속 연구원들의 숫자가 대폭 증가하기도 했고, 연구청에 들어온 신입 연구원들이 슬슬 제 몫을 한다고 들었는데...여전히 제때 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바쁜 거냐?”

연구청 산하 연구소는 북미왕국의 기술 개발과 발전을 이끄는 심장이었다.

그러니 수많은 연구로 미친 듯이 바쁠 수밖에 없긴 했고.

특히, 이들은 연구 개발뿐만 아니라, 인재들도 키워야 하니. 제때 휴식을 취하기 어려울 정도로 바쁠 수밖에.

다만, 대학교에서 졸업한, 북미왕국에서 똑똑하기로 소문난 이들이 점차 연구청 산하 연구소에 유입되면서, 그리고 이들이 연구소 생활에 익숙해지고 경험을 쌓으며 점차 제 몫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일전에 연구청장에게 들었었기에, 정성국은 상황이 조금 나아졌으리라 생각했고.

헌데 박기동의 반응은 어째 조금 달랐기에, 이를 묻자 박기동이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연구청 산하 연구소의 현재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럼요. 물론 스승님 말씀대로 그동안 어리바리하던 신입 연구원들이 경험을 쌓고 제 몫을 하면서, 그동안 이들이 제 몫을 할 수 있게끔 가르치고, 관리하느라 신경 쓰고, 시간을 소비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조금 여유가 생긴 것은 맞아요. 이때는 참 좋았고요. 헌데 이 신입 연구원들이 본격적으로 연구에 투입되면서, 기술 개발에 속도가 붙기 시작하자, 오히려 더욱 바빠져 버렸거든요.”

“아...”

물론 휴식은 중요했다.

연구를 하루 이틀 할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막상 연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데, 그런 분위기에서 흐름을 끊고 휴식을 취할 수 있겠는가.

특히, 연구청 산하 연구소에 들어갈 정도면, 소위 천재들이었고, 이들의 집중력이나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인정받겠다는 집념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휴식보다는 연구에 매진했으리라.

박기동의 말로 이런 연구소 내 상황을 이해한 정성국은 연구원들의 희생에 고마움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탄성을 내뱉었고.

더불어 꽤나 복잡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연구에 갈려 나가는 연구원들의 처지가 너무 안타깝고, 미안하긴 한데, 이들의 희생 덕분에 북미왕국의 기술이 급격하게 발달하고 있었으니, 이런저런 규정을 신설해서라도 이들의 연구를 꼭 막아야 하는 건가 하는 고민이 들 수밖에.

해서 정성국이 한창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릿속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박기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제가 맡은 분야 중에 동력 기관이나 발전기 체계 쪽은, 북미왕국의 발전과 직결되어있는 만큼, 연구원들이 모두 사명감으로 죽어라 연구하고 있다 보니...”

이에 정성국은 자신이 박기동을 부른 까닭을 떠올리고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고민은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박기동을 호출한 용건을 해결하기 위해 박기동을 보고 말했다.

“그래? 그거 잘 되었구나.”

“예?”

한창 연구원들이 어떻게 갈려 나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 때문에 자신도 갈려 나가는 상황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던 박기동은 정성국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고.

“내가 널 부른 이유가 바로 그거였거든. 각종 기관의 연구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정성국의 대답에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엥? 갑자기요?”

“갑자기라기보다는...너도 알지? 이번에 북미 서해안, 북미 동해안 철도 공사가 모두 끝나서, 새남포에서 보스턴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럼요. 아마 북미왕국 백성들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다 알지 않을까요? 어제자 북미신문 1면에 이번 철도 부설이 성공적으로 완료되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으니...”

철도의 유용성은 북미왕국 백성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 철도 부설 공사의 완공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북미왕국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도 다들 짐작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북미신문은 이 역사적인 순간을 당연히 놓치지 않았고, 이번에 부설된 북미 서해안 철도와 북미 동해안 철도가 기존의 철도와 연결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었다.

정성국은 이를 보고 전생에서 미국 대륙횡단철도 하면, 서쪽과 동쪽, 양쪽에서 부설한 철도가 마침내 유타 주에서 연결된 것을 기념하며 찍은 사진과 무척 흡사하다는 생각에 피식 웃기도 했었고.

해서 박기동의 말에 이 기억이 다시 떠오른 정성국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아무튼, 주요 도시들이 대부분 철도로 연결되었는데...생각해보니 기차가 아직은 느린 편이잖아? 철도국장에게 물어보니 새남포에서 보스턴까지 이동하는 데, 빨라야 7일 정도 걸린다면서?”

“예. 그쯤 걸릴 겁니다. 중간에 연료와 물을 보충하느라 소모되는 시간이 있으니까요. 그래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거리가 있잖습니까.”

박기동의 반박에 정성국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노선 자체가 빙 돌아가는 노선이니까. 다만, 아직 비행기가 대중화되지 못한 시점에서, 대규모의 승객을 대량으로 이동시키는 데는 철도만 한 것이 없는데, 조금 느린 것 같아서 말이야. 너도 알잖아? 빨라야 7일이라는 소리지, 일반적으로는 그 이상이 걸린다는 것을?”

정성국이 왕실 전용 기차로 움직인다거나, 철도국에서 특별 기차를 편성해 운용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철도 상황 때문에, 보스턴의 주민이 새남포로 이동하려면 아마도 그 배인 14일, 어쩌면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릴 수도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박기동은 정성국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기야 하지요. 그럼 더 빠른 기관차를 만들란 말씀이시군요?”

“그래야 할 것 같아.”

물론 지금도 썩 나쁜 것은 아니었다.

원래라면 배에서 기차로, 다시 배를 타고 이동해야 했기에 훨씬 번거로웠고 시간도 더 걸렸으니까.

그리고 이미 비행기가 양산되어 계속 배치되고 있는 만큼, 현 상황을 그냥 내버려 두어도 되었다.

빠르게 움직일 사람은 비행기를, 아니면 기차를 타면 그만이었으니.

원래 비행기는 장거리, 기차는 중거리에 적합한 이동 수단이기도 하고.

하지만, 북미왕국에서 열심히 기러기급, 두루미급 비행기를 양산해서 배치한다고 하더라도, 이 두 기체는 태울 수 있는 승객의 수가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러니 대량의 승객을 한 번에 태우고 하늘을 날 수 있는 대형 비행기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장거리 여객 수송 역시 철도가 일정 부분 감당해야 하는 만큼, 더 빠른 기차의 필요성을 느낀 정성국이었고.

해서 며칠 전 청장회의에서 철도국장에게 이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그리고 새로운 기관차의 개발은 연구청이 전담하고 있었기에 이렇게 정성국이 박기동을 부른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박기동은 정성국의 명령에 크게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바로 진행하도록 하지요.”

이에 정성국은 묘한 표정으로 박기동을 바라보다 물었다.

“어라? 바로 대답을 하는 것을 보니 기대해도 되나?”

“예. 새로운 기관차를 여럿 개발해두긴 했거든요.”

“새로운 기관차를?”

박기동의 대답에 정성국이 놀란 표정으로 되묻자, 박기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금 양산되는 기관차보다 훨씬 고출력의 증기 기관차도 개발해두었고, 또 경유기관으로 만든 기관차도 개발해두었으니까요.”

“허. 그래?”

지금 양산되는 기관차보다 훨씬 고출력의 증기 기관차라면, 훨씬 빠른 속도를 자랑할 테니, 정성국이 생각한 장거리 여객 운송에 적합한 고속 기차의 기관차로서 적당했다.

그리고 경유기관으로 만든 기관차라면, 증기 기관차의 가장 큰 단점인, 물과 연료를 보급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해결할 수 있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었고.

해서 정성국은 왜 그런 기관차들을 개발해두고도 양산하지 않았느냐는 시선을 보내자, 박기동이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경유기관을 채용한 기관차의 경우는...그걸 채용하면 연료 보급 문제 때문에 아무래도 번거로워져서 철도국에서 좀 꺼리더군요.”

“아. 모든 역에 석탄뿐만 아니라 석유도 대량으로 보관해야 하니까?”

“그렇죠.”

이에 정성국은 철도국의 생각은 이해하면서도, 조금 아쉽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흐음. 그래도 그 정도면 충분히 감수할 만한데...그럼 경유 기관차는 그렇다 치고, 고출력의 증기 기관차는?”

“생산단가가 무척 높으니까요. 거기에 운용 비용도 훨씬 많이 들고요.”

이에 정성국이 쓰게 웃었다.

“아. 역시 돈 문제였나?”

“예. 돈 문제이지요. 특히, 저희가 개발한 고출력의 증기 기관차는 기존의 기관차에 비해 양산하는 데도 더 손이 가는 터라 양산 속도도 떨어져요. 그러니...”

“당장 대량으로 기관차가 필요한 철도국에서 채용하긴 어려웠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박기동의 대답에 정성국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결정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흠. 그래도 장거리 여객 운송을 위한 고속 여객 기차가 필요한 상황이니...”

“그럼 양산 준비를 할까요?”

“그래. 일단 철도국장과 상의해, 두 기관차 가운데 적합한 녀석을 선택할 테니, 바로 양산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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