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795화 (795/850)

#795

그 이후로도 정성국은 청장들과 회의를 계속했고.

해가 떨어진 지 한참이 지난 후에 정성국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청장들을 보고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후우. 많이 늦기도 했고 다들 피곤해 보이는데, 일단은 여기까지 하지.”

정성국의 회의 종료 선언에 청장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정성국에게 인사하고 하나둘 회의실을 떠났고.

정성국은 청장들을 배웅하다, 조용한 곰을 보고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아. 잠깐.”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

조용한 곰이 정성국에게 다가와 묻자 정성국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신성 동맹과 오스만 제국 간의 협상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신성로마제국이 네덜란드에 있는 북미왕국 대사관에 전권대사를 파견해 신성 동맹과 오스만 제국 간의 중재를 요청했었고, 정성국은 떠나기 전에 오스만 제국 역시 이번 전쟁을 끝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이번 중재를 받아들였다.

다만, 북미왕국이 이번 중재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몰랐던 신성로마제국은 슬슬 봄이 오자 다시 전쟁이 시작될 것 같아 급한 마음에 정성국이 칼 11세와 울리카의 결혼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정성국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말뫼 항으로 다시 한번 사절단은 보냈고.

이때 정성국은 신성로마제국의 사절단에게, 북미왕국은 신성로마제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신성 동맹과 오스만 제국 간의 중재를 기꺼이 맡겠노라고 말해 주며 오스만 제국과의 협상을 위해 새한성으로 가라고 이야기했었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오스만 제국과의 협상을 위해 신성 동맹의 전권을 위임받은 외교관이 새한성에 도착했을 것 같아 조용한 곰에게 묻자, 조용한 곰이 답했다.

“아. 4일 전에, 신성 동맹의 대규모 사절단이 새한성에 도착해 저희의 중재로 오스만 대사와 협상 중입니다.”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기겁하며 급히 되물었다.

“응? 대규모 사절단? 설마 신성 동맹에 속한 모든 국가가 외교관을 보낸 건가?”

이에 조용한 곰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전하께서 대규모 호위 함대와 호위 병력을 대동하고 유럽을 방문해 아국의 위엄을 널리 알리셨으니, 그동안 아국과 별다른 교류가 없었던 신성 동맹에 속한 국가들이 이런 기회를 어찌 놓치겠습니까.”

신성 동맹에 속한 나라들은 가톨릭 국가이다 보니, 교황청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그동안 이들 국가는 북미왕국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었다.

물론, 이는 이들 국가들이 북미왕국과 직접 교류하지 않았기에 북미왕국의 국력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해 발생한 일이었고.

또한, 이는 북미왕국이 북미 대륙에 존재하는 국가이기에 발생한 일이기도 했다.

만약 북미왕국이 유럽 국가라거나, 혹은 유럽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국가였다면, 아무리 교황청이 북미왕국을 껄끄러워하더라도, 북미왕국과의 관계에 나라의 명운이 걸린 셈이니 어떻게든 북미왕국과 우호적으로 지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유럽에 퍼진 소문만 보더라도 교황청이 북미왕국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으니까.

허나, 북미왕국은 유럽과는 멀리 떨어진 북미 대륙에 존재하는 국가이다 보니, 북미왕국의 국력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가까이 있는 교황청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고.

헌데 그렇게 교황청의 눈치를 보며 북미왕국과 적당히 거리를 둔 결과, 전장에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신식 소총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대규모 전투에서 더 많은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오스만 제국에 밀려버렸다.

그러니 신성 동맹에 속한 국가들은 전장에서 순식간에 머스킷병이나 기병들을 격파하는 신식 소총의 위력에 치를 떨며 후회할 수밖에 없었고.

더불어, 앞으로 신식 소총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나라를 보전하기 어렵겠다는 공포감마저 생길 정도였다.

헌데 정성국이 칼 11세의 결혼식에 대규모 호위 함대와 호위 병력을 대동해 북미왕국의 강력함을 과시하고, 전차와 장갑차의 시범 사격을 통해 신식 소총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자, 신성 동맹에 속한 나라들은 강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또한, 북미왕국이라면 자신들을 지켜줄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저렇게 강력한 무기로 무장한 대규모 병력을 곧바로 유럽까지 파병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물론, 북미왕국의 보호를 받으려면, 북미왕국과 동맹을 맺어야 하고, 그러면 확장은 불가능해지지만, 어차피 강대국들의 틈새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약소국들은, 확장을 포기하더라도 북미왕국의 보호를 받는 것이 훨씬 나아 보이기도 했고.

그렇기에 북미왕국이 이번 전쟁의 중재를 맡겠다고 선언하고, 이번 협상이 새한성에서 진행된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신성 동맹에 속한 국가들은 이 기회에 북미왕국을 방문해, 북미왕국의 정보를 수집하고, 또, 북미왕국과 교류를 쌓기 위해 즉각 사절단을 보낸 것이고 말이다.

다만, 정성국은 이러한 설명에도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이었고.

그때, 조용한 곰이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해서 오스만 제국과의 협상을 참관도 하고, 아국과 정식으로 외교 관계도 맺을 겸, 신성 동맹에 속한 모든 나라에서 외교관을 파견했습니다.

“어? 참관이라고?”

이에 조용한 곰은 왜 정성국의 표정이 떨떠름했는지를 눈치채고 바로 답했다.

“그렇습니다. 저들은 이번 협상에 개입할 아무런 권한이 없는 단순한 참관입니다. 저들도 협상의 주체가 여럿이면 협상이 제대로 진행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으니까요. 해서 신성로마제국의 전권대사인 호에나우 백작이 신성 동맹을 대표해 오스만 대사와 협상하고, 신성 동맹의 외교관들은 참관만 하고 있습니다.”

“휴. 다행이로군. 난 또...”

신성 동맹에 속한 나라들이 모두 외교관을 파견했다는 이야기에 정성국이 기겁한 것은 조용한 곰의 말마따나 협상에 참여하는 이들이 많을수록 협상이 제대로 진행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유럽의, 아니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국가 협약으로 평가되는 베스트팔렌 조약의 경우, 유럽의 16개 나라와 66개의 제국령에서 135명에 달하는 대표를 파견했고, 이렇게 외교관들이 많다 보니 협상은 무척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협상이 길어지고, 협상이 진행되는 도중에도 전투가 계속되어, 전투의 결과에 따라 요구 조건이 계속 뒤바뀌니 협상은 더욱 복잡해지고, 늘어질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베스트팔렌 조약은 협상이 시작된 후 5년 후에야 겨우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고.

굳이 베스트팔렌 조약이 아니더라도, 최근에 북미왕국이 중재했던 청나라, 주나라, 동녕국 간의 협상 역시, 협상의 당사자가 고작 하나 더 추가되었을 뿐인데, 그동안 북미왕국이 중재한 협상 가운데 가장 오래 걸리기도 했었고 말이다.

그러니 정성국으로서는 신성 동맹에 속한 나라에서 모두 외교관을 파견했다는 소리에 기겁하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하하하. 어차피 신성 동맹이나, 오스만 제국이나 전쟁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는데, 협상이 길어지는 것을 원하겠습니까.”

협상이 길어지면, 당연히 비용도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번 전쟁에 동원된 병력은 양 진영을 합쳐 30만 명에 가깝다 보니, 그만큼 매일 소모되는 비용도 무시무시할 수밖에.

물론, 전쟁을 계속할 거라면야 어떻게든 감당해야겠지만,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내기로 마음먹은 이상, 최대한 빠르게 협상을 끝내는 편이 서로에게 좋았고. 직전까지 프랑스와의 전쟁 때문에 재정이 거의 고갈되어 부담이 큰 신성로마제국에서 나서서 미리 교통정리를 했다는 조용한 곰의 설명에 정성국은 역시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돈이라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하긴...그럼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겠군?”

“그렇습니다. 아마 신성 동맹이 오스만 제국에 약간의 배상금을 지급하는 선에서 협상이 끝날 것 같습니다.”

“신성 동맹이?”

이에 정성국이 조금 의아하다는 기색으로 조용한 곰을 바라보았다.

물론 헝가리 지역에서의 전투로 신성 동맹군이 약세를 보여 빈까지 후퇴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오스만 제국군이 엄청나게 우세한 상황인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런 정성국의 의문에 조용한 곰이 빙긋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예. 이번 전쟁은 원래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4세가 대규모 군을 동원한 목적은 신성로마제국이 약화된 사이 빈을 점령해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을 중부 유럽까지 넓히기 위해서였고요. 헌데 오스만 제국은 결국 빈을 점령하지 못했으니...”

“아. 어떻게 보면 오스만 제국의 패배나 마찬가지군. 그러니 오스만 제국의 체면을 조금 세워줘야 한다 이거지?”

정성국의 대꾸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여 말했다.

“그렇습니다. 물론 보통 전쟁 배상금은 패전국이 승전국에 지급하는 만큼, 오스만 제국에 전쟁 배상금을 주게 되면 이번 전쟁에서 신성 동맹은 오스만 제국에게 패배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되긴 하는데...어차피 신성 동맹은 오스만 제국의 유럽 진출을 다시 한번 막아낸 셈이잖습니까?”

이에 정성국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아하. 그 점을 강조해 유럽 내에 알린다면, 신성 동맹 측에서도 이번 전쟁을 신성 동맹의 패배가 아닌 승리라고 주장할 수 있겠군?”

“맞습니다. 그리고, 이 배상금은 신성로마제국에서 대부분 감당하기로 했기에 신성 동맹 측에서도 오스만 제국에 배상금을 지급하는 것 자체를 크게 문제 삼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가장 빨리 협상을 진행하는 방법은 오스만 제국의 체면을 적당히 세워주는 것이다.

그리고 빈 인근에 주둔한 신성 동맹군이 매일매일 소모하는 물자들을 생각하면, 오스만 제국에 배상금을 주어서라도 하루라도 빨리 오스만 제국과 종전 조약을 체결해 신성 동맹군을 해산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고.

문제는 배상금을 각출하면, 어떻게든 배상금을 적게 내기 위해 협상을 질질 끌 것이 분명했고.

해서 레오폴트 1세는 아예 신성로마제국에서 배상금 대부분을 감당하는 조건으로 신성 동맹에 속한 나라들이 배상금 지급에 반대하지 못하도록 설득하라고 호에나우 백작에게 지시한 것이다.

아무리 신성로마제국의 재정이 고갈되었다고 해도, 약간의 배상금 정도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러한 설명에 정성국이 잠깐 턱을 매만졌다가 중얼거렸다.

“흠. 그럼 생각보다 빠르게 협상이 완료되겠군.”

이에 조용한 곰은 씩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협상이 완료된다면, 아국은 각국과 협상해 이번 중재에 대한 대가를 챙기면 되겠지요.”

그 말에 정성국은 피식 웃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헌데...딱히 챙길 것이 있기는 한가?”

중재의 대가를 받는 것은 좋다.

헌데 정성국이 생각하기에는, 이번 협상을 중재한 대가로 챙길 것은 많지 않아 보였다.

오스만 제국도 그렇고, 신성 동맹에 속한 나라들도 그렇고.

특히, 한쪽이 무척 열세한 상황이었다면, 북미왕국이 중재한 덕분에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으니 그 대가로 많은 것을 챙길 수 있겠지만, 이번 경우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이번 중재로 인해 어느 진형이 크게 이득을 보았다고 말하기가 조금 어려웠던 것이다.

거기에 오스만 제국은 몰라도, 신성 동맹에 속한 나라들은 재정이 엉망이라 돈을 받기도 애매했고, 그렇다고 유럽 본토의 땅을 받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해서 정성국이 약간 회의적으로 중얼거리자, 조용한 곰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주 중요한 것을 챙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

“예. 바로 이주민 말입니다.”

“음?”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이 눈을 크게 뜨자, 조용한 곰이 설명을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최근 아국으로 이주하는 유럽인들은, 주로 중부 유럽과 동유럽 출신들입니다. 주로 신성로마제국을 비롯한 독일 지역의 소국들, 그리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의 백성들이었지요. 그리고 저희는 그동안 이들과 외교 관계를 맺지 않았기에, 굳이 이들의 이주를 막지 않았고요.”

“아. 그럼 이들 국가와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으면...”

“예. 분명 이들도 서유럽 국가들처럼 자국민들의 이주를 받지 말아 달라고 요청할 공산이 큽니다.”

조용한 곰이 여기까지 말하자 정성국도 조용한 곰의 생각을 눈치채고 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럼 외무청에서는 중재의 대가로 이들 국가에 이주 협정을 맺을 생각인 건가?”

“그렇습니다. 일본국과 이주 협정을 맺은 것처럼 1년에 이주하는 수에 제한을 둔다면, 저들도 거절하지는 못할 겁니다.”

이에 정성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흠...나쁘지 않아. 다만, 너무 노골적으로 이주민을 확보하려 들지는 말게. 그럼 저들이 반발할 테니까.”

정성국의 허락에 정성국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물론입니다. 믿고 맡겨주십시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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