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1
보통 이런 연회는 몇 시간 동안 계속된다.
그리고 아무리 연회에 익숙한 귀족이라 해도, 몇 시간 동안 연회를 즐길 수는 없는 법이었다.
또한, 연회는 일종의 정치의 장이니만큼, 은밀히 이야기할 공간이 필요하기도 했고.
그렇기에 보통 연회장 주변에는 휴게실로 쓸 수 있는 방들이 여럿 존재했고, 몬머스 공작이 안내한 휴게실 역시 이런 휴게실 중 하나였다.
“이곳인가요?”
몬머스 공작을 따라 이동한 정성국은 몬머스 공작이 한 방에 멈추자 질문을 던졌고, 이에 몬머스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국왕 전하. 어서 들어가시지요.”
이에 정성국을 뒤따르던 호위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전하. 잠시만 기다려주시옵소서.”
“아. 내부를 확인하게?”
몬머스 공작이 미치지 않고서야 자신을 건드리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 정성국이 굳이 필요가 있느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호위대장은 단호했다.
“그렇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이에 정성국이 뭐라 반응하기 전에, 몬머스 공작이 먼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시지요. 북미왕국 국왕 전하의 안전은 무척 중요할 테니 말입니다.”
호위대장의 말은 어떻게 보면, 몬머스 공작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으니, 내심 불쾌했던 몬머스 공작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정성국을 설득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를 내색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이를 이용해 정성국의 호의를 사기 위해 슬쩍 아부한 몬머스 공작이었고.
그런 몬머스 공작의 반응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잠깐 밖에서 대기했고, 그사이 빠르게 내부를 수색한 호위대장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정성국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들어가자 보이는, 휴게실 중앙에 전시된 7점의 커다란 그림들을 보고 정성국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허어...”
“어떠십니까.”
정성국의 반응에 몬머스 공작은 방긋 웃으며 말을 건넸고.
이에 그림에 매료되어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정성국이 겨우 입을 열었다.
“허어. 참으로 좋은 그림들이로군요. 이런 작품들을 여기서 구경할 수 있을 줄은...”
물론 정성국도 몬머스 공작이 그림을 언급할 때, 내심 기대하기는 했다.
몬머스 공작이 정말 그림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취미가 있겠는가.
그저 핑계일 것이 분명했다.
몬머스 공작이 왕위를 확보하기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정성국을 설득해 지원을 받는 것인데, 제임스 2세의 방해로 정성국과 제대로 이야기조차 하기 어렵다 보니, 따로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다만, 저 그림들이 자리를 만들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더라도, 정성국을 설득해야 하는 몬머스 공작의 입장에선, 정성국이 마음을 사로잡을만한 그림이 필요했을 테고.
해서 왕실 상단이 거래하는 화상들이 섣불리 접근하기도 어려운 고위 귀족들이 소유하고 있던 그림들을 겨우 가져온 것이리라.
그리고 고위 귀족들이 소유하고 있던 그림들은 대부분 당시 화가에게 직접 주문해 얻은 그림들이고, 화가들로서도 아무래도 고위 귀족의 주문을 조금 더 신경 쓸 수밖에 없다 보니, 예상대로 왕실 상단이 사들인 그림보다 조금 더 화려하고 그림의 크기도 훨씬 커서, 그림에 압도당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고.
해서 정성국은 여전히 그림에 눈을 떼지 못하고, 그렇게 대답했고, 이런 정성국의 대답에 몬머스 공작은 첫 단추는 잘 끼웠다는 생각과 함께 두 번째 단추를 끼우기 위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렇게 마음에 드십니까? 그거 참으로 잘 되었군요. 어차피 국왕 전하께 선물로 드릴 생각이었는데 말입니다.”
“예? 그게 무슨...”
몬머스 공작의 말에 정성국이 놀라 고개를 돌려 몬머스 공작을 바라보자, 몬머스 공작은 드디어 자신을 바라보는 정성국을 보고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저도 저 그림들을 무척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고는 있습니다. 허나, 저 그림들로 전하의 호의를 얻을 수 있다면, 선물로 드리지 않을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정성국의 호의를 얻기 위한 선물, 아니 뇌물이라는 것을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서 정성국을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몬머스 공작이었고.
이러한 몬머스 공작의 말에 그림을 보고 꽤나 흥분했던 정성국의 다시 얼굴이 차분해지며 중얼거렸다.
“내 호의라...”
이런 정성국의 반응에 몬머스 공작은 너무 성급했나 라는 후회가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몬머스 공작은 그림에 대한 지식이 없다 보니, 괜히 그림에 관하여 정성국과 길게 대화하다 보면 얕은 지식이 드러날 것이 뻔했기에.
해서 몬머스 공작은 후회를 접고, 정성국에게 고개를 숙이며 간청했다.
“북미왕국 국왕 전하께서도 이미 잉글랜드의 상황을 상세히 파악하고 계실 테니, 괜히 돌려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국왕 전하.”
“도와달라고요?”
“그렇습니다. 숙부에게 빼앗긴 잉글랜드 왕위를 되찾아오고 싶습니다.”
몬머스 공작의 말에 정성국은 헛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허허허. 원래 잉글랜드의 왕위는 제임스 2세의 것이었지, 몬머스 공작의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몬머스 공작이 정당한 계승자인 제임스 2세의 왕위를 탐내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정성국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몬머스 공작은 허리를 펴며 당당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잉글랜드의 왕위는 제 것이어야 했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친자식이자 장남이니까요.”
당당히 대답하는 몬머스 공작을 보고 정성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대답했다.
“글쎄요. 잉글랜드는 혼외자식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잖습니까.”
헌데 몬머스 공작은 정성국이 이 이야기를 해주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반박했다.
“그게 잘못된 것 아닙니까? 그렇기에 북미왕국에서는 혼외자식도 자식으로서 인정하고, 다른 자식과 동일하게 대우받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이에 정성국은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 북미왕국의 법은 혼외자식을 다른 자식과 동일하게 대우하도록 명시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빠져나갈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정성국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흠.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나라마다 사정은 다른 법이고, 이곳은 잉글랜드이니, 잉글랜드의 법을 존중해야겠지요.”
“으음...”
잉글랜드의 문제인데 북미왕국 법을 끌고 와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에 몬머스 공작은 바로 선을 긋는 정성국의 반응에 신음을 흘렸고.
그때 정성국이 다시 입을 열었다.
“거기에 이미 제임스 2세는 대관식을 치러 명백히 잉글랜드의 국왕으로 등극했는데, 내가 몬머스 공작을 지원하면 잉글랜드는 혼란스러워질 겁니다. 그건 북미왕국의 국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러니, 몬머스 공작을 도울 일은 없다는 시선을 보내는 정성국이었고.
헌데, 몬머스 공작은 그런 정성국의 말을 바로 부정했다.
“그건 북미왕국 국왕 전하께서 잘못 생각하시고 계신 겁니다. 제 숙부가 잉글랜드의 국왕이 된 이상 잉글랜드는 계속해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제 숙부는 국교회 신자가 아니니 말입니다.”
“제임스 2세 개인의 신앙 때문에 잉글랜드가 계속해서 혼란해질 거다? 글쎄요. 물론 잉글랜드 귀족들이 우려하는 바는 짐작은 합니다만, 제임스 2세는 자신의 신앙을 타인에게 강권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까 연회장에서 이를 귀족들에게 약속했고요.”
헨리 8세 이후로, 잉글랜드는 종교 문제로 분란이 발생하며 피바람이 불었었기에, 잉글랜드 귀족들이 가톨릭 군주를 모시는 것에 거부감이 있다는 사실은 정성국도 짐작했다.
그리고 정성국은 전생에서 제임스 2세가 결국 이 종교 문제로 인해 잉글랜드 왕좌에서 쫓겨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제임스 2세는 가톨릭의 재합법화를 원했고, 귀족들은 이를 결사반대하면서 서로 충돌한 것이다.
헌데,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 것은 결국 소통의 부재 때문이었다.
전생에서 제임스 2세가 가톨릭의 재합법화를 원한 것은 가톨릭을 다시 국교로 삼아 잉글랜드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가톨릭 역시 합법적으로 잉글랜드의 땅에 존속하길 원한 것이다.
즉, 그가 진정으로 추구한 것은 모든 종파를 위한 종교적인 관용이었달까.
그러나 같은 말을 하더라도, 누가 말을 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다 보니, 잉글랜드 귀족들은 제임스 2세의 말을 가톨릭으로의 희귀로 해석하고 결국 제임스 2세를 축출하고, 개신교 신자인 제임스 2세의 맏딸 메리를 여왕으로 옹립한 것이고.
다만, 북미왕국의 존재로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북미왕국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고, 이 때문에 종교 문제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고, 제임스 2세가 북미왕국을 방문해 많은 것을 느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정성국이 방금의 연회에서 제임스 2세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었을 때, 제임스 2세는 북미왕국을 방문했을 당시, 종교의 자유로 인해 종교 문제가 발생하지 않아 북미왕국에는 여러 종교가 혼재함에도 크게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 같다며, 잉글랜드에도 국교회 신자뿐만 아니라 청교도 신자라 가톨릭 신자가 존재하는 만큼, 북미왕국처럼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 종교 문제로 더는 피를 흘리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자, 잉글랜드 귀족들은 북미왕국이라는 선례가 있기에, 제임스 2세의 말을 오해하지 않았고.
덕분에 그가 연회장을 빠져나오기 전만 하더라도 제임스 2세와 귀족들의 분위기는 무척 좋았고, 그렇기에 정성국은 몬머스 공작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제임스 2세 개인의 신앙 문제로 잉글랜드가 전생처럼 혼란에 빠질 리는 없다고 확신에 차 대답하자 몬머스 공작은 역시 정성국은 외국인이라 잉글랜드 귀족들의 속내를 파악하지 못한다는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예. 저도 멀리서 숙부가 약속한 것을 들었습니다. 거기에 북미왕국처럼 잉글랜드를 발전시킬 거라는 선언도 들었고요. 그리고 그 이후로 귀족들이 숙부를 보는 시선이 조금 달라진 것도 알고 있습니다. 허나, 시간이 흐르면 귀족들은 깨달을 겁니다. 숙부께서 말씀하신 대로 북미왕국처럼 잉글랜드를 발전시키려면, 결국, 숙부에게 권력이 집중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숙부가 절대 권력을 손에 쥐게 된 후에, 약속을 계속 지킬 거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 말에 정성국은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현 유럽의 군주들은 절대 왕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북미왕국의 급격한 발전이 모두 정성국이 절대 왕권 덕분으로 해석하는 유럽의 지식인들 덕분에, 그런 경향이 더욱 가속화되기도 했고.
헌데 다른 나라와는 달리, 잉글랜드는 헨리 8세 이후로 의회의 영향력이 점차 강해졌고, 잉글랜드 귀족들은 자신의 권력을 놓지 않으려 할 것이 분명하니, 어쩌면, 전생과는 달리 이 부분 때문에 문제가 불거질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던 것이다.
다만, 이건 미래의 일이고, 일이 꼭 그렇게 흘러가리라는 보장이 없는데, 몬머스 공작은 확신에 차 이야기하니, 정성국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비약이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설마요. 사람의 속마음을 누가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몬머스 공작의 말은 어떻게 보면 제임스 2세를 못 믿겠다는 말로도 들리고, 또 어떻게 보면 소문을 퍼트려 그런 여론을 조성해 귀족들에게 제임스 2세의 불신을 심어주면 그만이라는 말로도 들렸기에, 정성국은 몬머스 공작의 말에 다시 한번 표정을 찌푸리며 말했다.
“글쎄요.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미래의 일을 우려해, 합당한 지배자인 제임스 2세에게 반란을 획책하는 이에게 도움을 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정성국의 대답에 몬머스 공작이 바로 질문을 던졌다.
“숙부께서 북미왕국의 지지를 받는 대신 약속한 것들 때문입니까? 그 정도는 저도 약속해드릴 수 있습니다.”
“음?”
몬머스 공작의 말에 정성국은 잠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가, 연회장에서 자신이 제임스 2세를 지지하는 발언을 한 것이 제임스 2세가 정성국에게 무언가 이득을 약속했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음을 깨닫고 피식 웃었고.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몬머스 공작은 왠지 모르게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어떻게든 정성국을 설득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제가 국왕이 되면 잉글랜드인들의 북미왕국 이주를 허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북미왕국이 원하는 해외 영토를 내어줄 수도 있고요!”
북미왕국이 최근 해외 진출에 적극적이라는 사실이나, 만성적인 인구 부족 때문에 외국인들의 북미왕국 이주를 무척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몬머스 공작이 회심의 카드를 꺼내듯 정성국에게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솔직히 조금 끌리기는 했다.
해외 영토도 그렇지만, 잉글랜드인들의 이주를 받아들이면, 그만큼 북미왕국의 발전은 빨라질 테니까.
다만, 아무리 북미왕국의 약점인 인구를 늘리기 위해서라지만, 타국의 반란을 지원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다른 나라들이 북미왕국을 내심 경계할 것이 분명했기에, 득보다는 실이 더 컸다.
해서 정성국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굳이 잉글랜드가 보유한 해외 영토가 탐나지도 않고, 출산 장려 정책으로 인해 아국의 인구가 많이 늘어난 터라, 굳이 잉글랜드인들이 이주하지 않더라도 괜찮으니까요.”
정성국의 단호한 표정에서 협상해 볼 여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몬머스 공작은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그런 몬머스 공작을 보고 정성국은 고개를 돌려 휴게실 중앙에 전시된 그림들을 바라본 후 대답했다.
“아무튼, 덕분에 좋은 그림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고맙군요.”
그 말에 몬머스 공작은 정신을 차리고 급히 말했다.
“예? 그래도 저건 선물로...”
“아. 저 그림들을 선물로 받는다면, 나중에 잠자리가 뒤숭숭해질 것 같으니...됐습니다.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