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0
대관식이 끝난 후, 화이트홀 궁전에서 제임스 2세의 대관식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그리고,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모두 이 연회에 참석했다.
물론, 제임스 2세를 축하하려는 목적보다는 그동안 접근이 어려웠던 정성국과 친분을 쌓을 목적이 컸다.
정성국과 친분을 쌓을 수 있다면, 충분히 자랑거리가 되었을뿐더러, 왕실 상단이 계속해서 잉글랜드의 광산업에 투자하고 있는 만큼, 정성국과의 친분을 이용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정성국이 하얀 들꽃과 함께 연회장에 들어오자, 잉글랜드 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정성국에게 몰려들었고.
이런 상황은 정성국이 연회장에 입장한 후, 뒤이어 연회장에 제임스 2세와 왕비인 메리가 들어온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시종장이 제임스 2세와 메리의 입장을 알리자, 귀족들은 일단 예법에 따라 새로운 국왕과 왕비에게 무릎을 꿇고 인사했지만, 제임스 2세가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본격적으로 연회의 시작을 알리자, 일부 귀족들과 타국에서 보낸 축하 사절단들이 제임스 2세에게 접근했을 뿐, 대부분의 잉글랜드 귀족들은 제임스 2세에게 조금 떨어져 있는 정성국에게 몰려들었다.
이에 제임스 2세나 메리는 예상은 했지만, 그 이상으로 냉담한 귀족들의 반응에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보통 유럽에서는 대관식을 치러야 정통성 있는 군주로 인정받았고, 제임스 2세는 대관식까지 치렀으니,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새로운 권력자인 제임스 2세에게 몰려들어야 했다.
새로운 권력자의 신임을 얻는다면, 단박에 권력의 중추에 입성하는 것도 가능했으니까.
다만, 제임스 2세의 개인적인 신앙 때문에 귀족들은 오히려 찰스 2세의 사생아인 몬머스 공작을 은연중에 지지했고. 이런 귀족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몬머스 공작이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었으며, 제임스 2세가 즉위한 이후에도, 몬머스 공작이 쉽게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것은 잉글랜드 귀족이라면 누구나 짐작했고.
여기에, 제임스 2세가 신식 소총을 모두 확보해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은 사실인데, 몬머스 공작이 제임스 2세보다 훨씬 많은 병력을 동원한다면, 상대하지 못할 것도 없어 보였다.
물론, 그러려면 몬머스 공작이 귀족 대다수를 끌어들여야겠지만, 현재의 분위기로 볼 때 이게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고.
그러니, 지금 제임스 2세의 신임을 받았다간, 나중에 곤란해질 수 있다 보니, 원래부터 제임스 2세를 지지하던 소수의 귀족이나, 위험을 감수하고 권력을 노리는 몇몇 귀족들 외에는 일단 제임스 2세에게 거리를 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광경을 멀리서 보고 있던 몬머스 공작과 그 측근들은 지그시 미소지었고.
다만, 이들의 미소는 곧 사라졌다.
제임스 2세를 무시하고 자신에게 몰려들어 어떻게든 말이라도 건네는 잉글랜드 귀족들의 행동에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던 정성국이 발걸음을 옮겨, 제임스 2세의 곁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인사하고 말을 건네는 잉글랜드 귀족들과 대화하면서, 간간이 제임스 2세에게 말을 걸어, 제임스 2세도 대화에 낄 수 있도록 도왔고.
제임스 2세가 정성국의 배려로 대화에 낄 때마다, 잉글랜드 귀족들은 조금 떨떠름한 기색이었지만, 일단 정성국과 친분을 쌓는 것이 우선이라 함께 대화를 나누었고, 그렇게 제임스 2세가 대화에 참여하자, 은연중에 제임스 2세의 공을 이야기하며 귀족들 앞에서 제임스 2세를 추켜세웠다.
더불어, 정성국은 제임스 2세가 북미왕국을 방문했을 당시, 북미왕국의 발전에 무척 감명을 받고, 잉글랜드도 북미왕국처럼 발전시키기 위해 찰스 2세에게 여러 제안을 하며 노력해왔다는 사실과 그런 제임스 2세가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었으니, 앞으로 잉글랜드의 발전이 기대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자, 친북미왕국 성향의 잉글랜드 귀족들은 아까와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제임스 2세를 바라보기 시작했고.
이렇게 잉글랜드 귀족들이 제임스 2세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며 연회장의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자,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몬머스 공작과 그 측근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왜 북미왕국 국왕이 자꾸 숙부를 치켜세우는 거지? 거기에 북미왕국 국왕의 말을 들어보니, 마치 숙부가 계속해서 잉글랜드의 국왕이어야, 북미왕국과 잉글랜드의 교류가 확대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한참을 당혹스러운 얼굴로, 정성국과 제임스 2세, 그리고 잉글랜드 귀족들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던 몬머스 공작이 겨우 입을 열었고.
이에 몬머스 공작 옆에 있던 한 측근 귀족이 어두운 얼굴로 답했다.
“...아무래도 저희가 한발 늦은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몬머스 공작은 주변을 살폈지만, 어차피 이 주변에는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이 전부라는 사실을 깨닫고 측근 귀족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숙부가 먼저 북미왕국 국왕을 설득해 북미왕국 국왕이 숙부를 지지하기로 한 것 같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북미왕국 국왕이 계속 저런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에 한 풍채 좋은 노귀족이 측근 귀족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끼어들었다.
“거기에 저들 좀 보십시오. 지금 제임스 2세의 곁에서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는 이들은 북미왕국에 호의적인 이들이었지, 결코 제임스 2세에 호의적인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헌데 정성국이 계속해서 제임스 2세와 친분을 과시하고, 또, 제임스 2세가 새한성을 방문했을 때, 열정적으로 자신을 설득한 덕분에 잉글랜드에 투자를 확대하고, 잉글랜드 유학생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고 이야기하니, 어느덧 제임스 2세에게도 호감을 표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러다 만약 저들이 제임스 2세를 지지하기라도 한다면...”
“...숙부에게서 왕위를 되찾기는 현실적으로 힘들어지겠지요.”
특히,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 중 상당수가 친북미왕국 성향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자신의 지지세력이 제임스 2세의 지지세력이 된다는 뜻이니, 그만큼 자신이 받는 타격은 컸다.
그나마 자신이 제임스 2세보다 우위에 있는 부분이 바로 귀족들의 지지였는데, 이 부분이 사라지는 셈이었으니까.
그리고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면, 손익에 민감한 귀족들은 바로 자신을 멀리할 것이 뻔했고.
해서 몬머스 공작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몬머스 공작 주변에 있던 귀족들의 안색도 자연스레 심각해졌다.
이들은 이미 몬머스 공작의 최측근으로 알려져 있으니까.
해서 이들은 저 멀리서 정성국이 찰스 2세를 추켜세우자, 그 곁에 있던 귀족들이 탄성을 지르며 손뼉을 치는 모습에 위기감을 느꼈고, 그때 풍채 좋은 노귀족이 입을 열었다.
“송구하지만 그렇습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북미왕국 국왕을 설득해, 북미왕국에 호의적인 귀족들이 제임스 2세를 지지하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설득한단 말입니까? 저렇게 북미왕국 국왕이 노골적으로 숙부의 편을 들어주는 것을 보면...”
상황은 이미 끝난 것이 아니냐는 시선으로 풍채 좋은 노귀족을 바라보는 몬머스 공작이었고, 그런 몬머스 공작의 반응에 노귀족이 침묵했을 때, 한 측근 귀족이 끼어들었다.
“분명, 지금까지 북미왕국은 타국의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무척 꺼렸습니다. 그리고 북미왕국의 그러한 정책은 결국 북미왕국 국왕의 뜻이겠지요. 또한, 북미왕국 국왕이 런던 근교에 도착한 직후, 북미왕국 대사가 늘 붙어 다녔으니, 북미왕국 국왕 역시 현 런던의 정세를 모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원래 북미왕국 국왕의 성향이라면, 제임스 2세와는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것이 맞을 겁니다.”
“그건...그렇지. 헌데 지금 북미왕국 국왕은 노골적으로 숙부를 지지하고 있지 않나?”
“맞습니다. 지금 북미왕국 국왕의 모습은 무척 비정상적이고, 이는 제임스 2세가 북미왕국 국왕이 저렇게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게 만들 정도로 대단한 조건을 내걸었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니...”
“그보다 더한 조건을 걸어서라도 북미왕국 국왕을 설득하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허. 말은 쉬운데...”
이에 몬머스 공작은 난감한 얼굴로 말을 흐렸다.
숙부인 제임스 2세가 정성국에게 어떤 조건을 걸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보다 더한 조건을 걸어서라도 북미왕국 국왕을 설득해야 한다니.
대체 어떤 조건을 걸어야 할지 막막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 때, 측근 귀족이 강렬한 눈빛으로 몬머스 공작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희는 끝장입니다.”
“으음...”
* * *
연회는 길었고, 쉬지 않고 계속해서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야만 했던 정성국은 피곤함을 느꼈다.
이런 정성국의 피곤함을 눈치챈 북미왕국 대사가 슬쩍 입을 열었다.
“전하. 연회장 옆의 휴게실을 확보해 두었습니다. 허니 그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정성국은 잠깐 연회장 전체를 둘러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러도록 하지.”
정성국의 노력 덕분에, 제임스 2세는 어느덧 이번 연회의 주역이 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제임스 2세가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경원시하며, 그가 국왕인 이상 잉글랜드는 발전보다는 혼란으로 인해 퇴보할 거라 여겼다.
그렇기에, 귀족들은 대부분 몬머스 공작을 은연중에 지지했던 것이다.
다만, 이번에 정성국이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 대화에 제임스 2세를 참여시켰고, 간간이 그가 앞으로 어떤 식으로 잉글랜드를 통치해 나갈지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제임스 2세가 잉글랜드 귀족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잉글랜드를 발전시킬지 말할 기회를 주었고.
제임스 2세는 이렇게 정성국이 마련해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특히, 제임스 2세는 자신이 북미왕국을 방문했을 당시, 북미왕국 백성들이 누리던 신앙의 자유에 강한 인상을 받았기에, 자신은 절대로 잉글랜드인 개인의 신앙을 강제할 생각이 없다고 명확히 밝히고, 강제 개종이나 종교 탄압은 결코 없을 거라고 선언하면서, 이를 우려하던 귀족들을 안도시켰고.
물론, 제임스 2세가 나중에 말을 번복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정성국 앞에서 그러한 말을 꺼낸 이상, 섣불리 이를 번복하기는 어려울 거라 여긴 것이다.
거기에 정성국의 말마따나, 북미왕국을 직접 방문하며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한 제임스 2세라면 잉글랜드를 잘 발전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이기도 했고.
해서 북미왕국의 발전을 내심 부러워하며, 잉글랜드도 북미왕국처럼 더욱 발전하려면, 제대로 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여긴 일부 귀족들이 제임스 2세에게 호의적인 시선으로 말을 걸기 시작했고, 지금도 제임스 2세 곁에는 꽤 많은 귀족이 몰려 있었다.
그렇기에, 정성국은 잠시 자리를 비워도 상관없겠다고 여겨 하얀 들꽃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고.
하얀 들꽃은 이미 메리 왕비와 함께 수많은 귀족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담소를 나누고 있었기에, 굳이 부를 필요가 없겠다 싶은 정성국은 화장실을 핑계로 잠시 연회장 밖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바로 북미왕국 대사가 미리 마련해 둔 휴게실로 이동하려는 데 누군가가 정성국에게 다가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몬머스 공작인 제임스라고 합니다.”
제임스 2세의 조카이자 정적인 몬머스 공작의 이름 역시 제임스였다.
제임스라는 이름이 잉글랜드에선 흔한 편이고, 또, 유럽에서는 조상의 이름을 물려받는 경우가 많은데, 제임스 2세나 몬머스 공작 역시 같은 핏줄이니 같은 조상의 이름을 물려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북미왕국 대사의 보고를 통해 미리 알고 있었던 정성국은 당황하지 않고 그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반갑습니다.”
북미왕국 대사가 옆에 있었기에, 정성국은 연회장에 들어와서 바로 몬머스 공작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기에, 조금 의외라고 여겼는데, 자신이 연회장에 나오자 따라 나와 말을 거는 것을 보니, 이러한 기회를 기다렸다는 것을 직감했고.
해서 정성국은 무슨 말을 할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몬머스 공작을 바라보았는데, 몬머스 공작은 일단 정성국과 친근감을 쌓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고, 이에 정성국은 대충 대꾸하면서,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몬머스 공작이 눈을 빛내며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제가 알기로 북미왕국 국왕 전하께서는 네덜란드 그림을 무척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하하하. 소문이 와전된 모양이군요. 꼭 네덜란드 그림만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좋아하는 화가 몇 명의 국적이 네덜란드다 보니 그런 소문이 도는 모양이군요.”
정성국의 대답에 오히려 몬머스 공작은 슬쩍 미소지으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아. 그럼 국왕 전하께서 루벤스와 렘브란트의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하신다는 이야기는 사실인가 보군요?”
“그렇습니다. 왕실 상단에서 사들인 그림 중에 몇 점이 계속 눈에 들어와서 알아보니, 루벤스와 렘브란트의 그림이더군요. 루벤스의 그림은 화려한 색채와 역동적인 구도가 마음에 들었고, 렘브란트의 그림은 정교한 구도와 세밀한 인물의 묘사, 그리고 강렬한 명암의 대비가 마음에 들었다고 해야 할까요?”
원래 정성국은 전생의 기억 때문에 처음에는 훗날을 생각해 일종의 투자 개념으로 이들의 그림을 사들였었다.
하지만 계속 그림을 수집하면서, 어느덧 이들의 그림에 매료된 것이 사실이라 정성국이 빙긋 웃으며 대답하자, 몬머스 공작이 정성국을 추켜세웠다.
“오. 놀랍군요. 유럽의 화풍에 익숙하지도 않으실 텐데, 바로 거장들의 그림을 알아보다니요. 역시 국왕 전하께서는 예술품을 보는 안목도 대단하신 모양이군요.”
“하하하. 내 안목이 뛰어나다기보다는, 아직 유럽의 화풍에 익숙하지 못한 내 눈길을 끌 정도로 두 화가의 실력이 경지에 도달했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요. 헌데 갑자기 그건 왜...”
이에 몬머스 공작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 저 역시 그림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취미가 있어서 말입니다.”
“어? 그렇습니까?”
“예. 그러다 보니 루벤스와 렘브란트의 그림도 몇 점 보유하게 되었고요. 헌데 북미왕국 국왕 전하께서 이들의 그림을 좋아하신다고 하니, 한번 보여드리고 싶어서 말입니다. 해서, 저 휴게실에 그림이 있는데...”
몬머스 공작의 말에 정성국은 그의 속셈을 눈치채고 피식 웃으며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그가 보유한 그림이 궁금하긴 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흠. 좋습니다. 그런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요. 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