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9
정성국이 웨스트민스트 사원에서 찰스 2세를 조문한 다음 날, 공식적으로 찰스 2세의 성대한 장례식이 열렸다.
그리고 정성국은 다시 하얀 들꽃과 함께 이 장례식에 참석했고, 그렇게 찰스 2세의 관이 웨스트민스트 사원에 안장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새한성의 궁전에 따로 왕실 묘역이라도 조성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보통 유럽의 궁전에는 왕실 묘역이 따로 존재하거나, 혹은 커다란 종교 건물 내에 안장하곤 하는데, 종교의 영향력이 확대될까 늘 경계하는 정성국이 새한성의 궁에 종교 건물을 만들 이유가 없었고, 왕실 묘역도 없었기에, 후대를 생각하면 자신이 미리 준비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건강에는 자신이 있긴 한데, 사람의 앞날은 확실할 수 없었으니.
해서 정성국은 돌아가면, 가족들과 이 문제를 따로 이야기해봐야 겠다고 생각하면서, 마지막으로 찰스 2세에게 묵념한 후 발걸음을 옮겼고.
그 후, 정성국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귀족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바로 빠져나왔다.
어차피 곧 있을 제임스 2세의 대관식 축하연에서는 빼지 못할 텐데 괜히 지금부터 진을 뺄 이유가 없었기에.
이에 잉글랜드 귀족들은 무척 아쉬워했지만, 정성국이 굳이 장례식장에서 떠들썩하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그의 의사나, 제임스 2세의 눈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그리고, 찰스 2세의 장례식이 모두 마무리되고 3일 후에, 다시 웨스트민스트 사원에서 제임스 2세의 대관식이 열렸다.
이 대관식에도 당연히 정성국도 하얀 들꽃과 함께 참석했다.
그리고 대관식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마침내 국교회의 최고 성직자인 캔터베리 대주교가 제임스 2세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광경에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의례적인 박수를 보내던 정성국은, 문득 옆에 있는 하얀 들꽃의 반응이 조금 이상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고.
하얀 들꽃이 묘한 표정으로 대관식을 바라보고 있자,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을 던졌다.
“표정이 왜 그래?”
“아...아니에요.”
정성국의 말에 정신을 차린 하얀 들꽃은 표정을 관리하고 환하게 웃으며 제임스 2세에게 박수를 보냈고.
그 후 제임스 2세의 대관식이 모두 끝나고, 축하연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화이트홀 궁전으로 돌아가는 길에 정성국이 한숨을 내쉬자, 옆에 있던 하얀 들꽃은 정성국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축하연에 참석해 귀족들에게 시달릴 것이 두려우신 거죠?”
“아무래도 그렇지. 특히, 제임스 2세 덕분에 요 며칠 무척 편하게 지냈지만, 그만큼, 귀족들은 안달이 났을 테니 더욱 걱정되고.”
제임스 2세는 대관식이 진행되기 전까지, 귀족들이 개인적으로 정성국에게 접근하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아직 귀족들의 피아식별이 제대로 안 되다 보니, 잘못하면 몬머스 공작을 지지하는 귀족들이 정성국을 만날 것을 우려한 것이다.
물론, 정성국이 자신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했고, 제임스 2세는 그런 정성국의 약속을 굳게 믿지만, 몬머스 공작을 지지하는 귀족들이 개인적으로 정성국을 만난 후, 정성국이 몬머스 공작을 지지하기로 했다는 거짓 소문을 퍼트리기라도 하면, 여러모로 곤란했으니 말이다.
해서, 정성국이 약속한 대로 대관식 이후 축하연에서 제임스 2세를 지지한다는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철저히 귀족들의 접근을 막은 제임스 2세였고, 덕분에 요 며칠간 푹 쉬긴 했다.
다만, 이제는 이러한 휴식에 대가를 치러야 했고, 그렇기에 정성국이 한숨을 내쉬자 하얀 들꽃이 빙그레 웃으며 그를 위로했다.
“그래도 딱 3일만 버티면 되잖아요?”
“...3일씩이나 버텨야 하는 거지.”
“에이.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면, 더 힘들 거에요. 그러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
“...그래. 그래야겠지.”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차라리 즐기는 것이 낫겠다 싶었던 정성국은 하얀 들꽃의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그때 하얀 들꽃이 질문을 던졌다.
“헌데 전하.”
“응?”
“아까 제임스 2세의 대관식을 보다가 생각난 건데...전하께서는 즉위식이나 대관식을 따로 치르지 않으셨지요?”
생각지도 못한 하얀 들꽃의 질문에 정성국은 눈을 깜박이다가 겨우 대답했다.
“...아마 그럴걸?”
북미왕국의 역사 교과서나 여러 책에는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써놓기야 했지만, 실제로 북미왕국의 건국은 다분히 편의를 위해 결정된 것이었다.
당시에 원주민들은, 유럽 국가들 때문에 나라라는 개념을 강대한 대부족보다 상위의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형식적으로나마 나라를 건국하는 것이 원주민들을 설득하는 데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되었고, 이미 합류한 원주민들과 조선인들의 통합에도 도움이 될 거라 여겼다.
여기에, 아이누인들과 막부와의 관계가 한창 험악했던 시점이었고, 계속 세력을 확장하다 보니, 몇 년 안에 에스파냐와도 충돌할 것 같은데, 이들과 전쟁을 치르고 협상하려면, 형식적으로나마 나라를 만들어두어야 대등하게 협상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고.
해서, 정성국은 청장들과 논의해 청장 회의에서 형식적으로 나라를 건국했는데, 이때는 새김포에서 정착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시점이라 정말 정신없이 바빴고, 제대로 그럴싸한 행사를 치를 여력도 없었다.
거기에, 정성국은 그런 의례를 썩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고.
그러니, 즉위식은 나중에 나라 이름대로 북미 대륙을 모두 확보하면 치르자고 미뤘고, 건국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 같은 것도 모두 생략해 버렸다.
물론, 막상 프랑스를 물리치고 명목상이나마 북미 대륙을 모두 장악했을 때는, 정성국도, 그리고 청장들도 수많은 업무에 치여 예전에 미뤄둔 즉위식 따위는 떠올리지도 못했고.
“전하께서 이런 국가적인 행사를 썩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이번에 제임스 2세의 대관식을 참석해보니, 나름대로 필요한 행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흠...”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는 하얀 들꽃의 말에 정성국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
정성국은 굳이 이런 의례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원래 이런 의례들은, 결국 왕이 자신의 권력과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인데, 정성국은 굳이 자신의 권력이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애를 쓸 이유가 없었으니까.
이미 정성국은 북미왕국에서 살아있는 신과도 같았다.
북미왕국 덕분에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된 수많은 백성들이 정성국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정성국은 굳이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의례들에 신경 쓰지 않았고.
허나, 하얀 들꽃의 말마따나, 이런 의례를 잘만 이용하면 백성들의 통합에도 도움이 될 테고, 건국왕인 정성국 각종 왕실 의례를 미리 만들어 둬야 후대에 잡음이 없을 것 같았기에 정성국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청장들과 상의해서 각종 의례를 만들도록 할게.”
정성국의 긍정적인 대답에 하얀 들꽃이 빙긋 웃으며 슬쩍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진작에 말씀드리고 싶었던 문제기는 한데, 언제쯤 폐하라는 경칭을 쓰실 생각이세요?”
“어?”
“전하라는 경칭을 쓴 것은 어디까지나 청나라와의 관계 때문에 쓰신 것 아니었나요? 헌데 이미 아국은 청나라보다 강력하잖아요? 그런데 계속해서 전하께서는 폐하라는 경칭보다 한 단계 낮은 전하라는 경칭을 계속 쓰시니 조금 그래요.”
이에 정성국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미 이 문제는 조용한 곰이 슬쩍 이야기하긴 했었다.
북미왕국의 단어에는 전하라는 경칭보다 높은 폐하라는 경칭이 분명 존재했다.
헌데 북미왕국에서 이 경칭으로 부르는 존재는 청나라의 황제뿐이었고.
다만, 처음에 유럽의 외교관들은 그냥 넘어갔다.
청나라가 강력하다는 사실이나, 청나라의 체급이 다른 나라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그리고, 유럽의 외교관들은 북미왕국이 자신들의 국왕은 전하라고 부르고, 청나라의 황제는 폐하라고 한 단계 높여 부르는 것을 보고, 내심 북미왕국이 강력하기는 해도, 아직 청나라에는 안된다고 생각했었고.
헌데, 조청전쟁 이후, 청나라보다는 북미왕국이 강력하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자, 그리고 그 이후에도 북미왕국은 계속 청나라의 황제는 북미왕국의 국왕보다 한 단계 높여 부르자 유럽의 외교관들은 당황했다.
여기에, 삼번의 난으로 인해, 청나라가 쪼개지고, 주나라마저 자국의 군주를 황제 폐하로 칭하고 북미왕국에서 이를 인정하고, 비슷한 시기에 레오폴트 1세마저 황제 폐하라는 경칭을 붙이면서 유럽의 외교관들은 혼란스러워했고.
또한, 유럽의 외교관들은 북미왕국 외교관들이나 정성국에게 자국의 군주를 북미왕국 식으로는 어떤 경칭을 붙여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해서, 임시방편으로 북미왕국 외교관들이나 정성국 앞에서 북미왕국말로 자국 군주의 경칭을 붙일 때는, 동등하게 전하라는 경칭을 붙이고 있기는 한데, 이러다 보니, 청나라와 주나라, 신성로마제국만 한 단계 높이는 꼴이 되는 터라, 그리고 현 청나라나 주나라, 신성로마제국의 사정이 썩 좋지 않았고, 특히 프랑스 같은 경우네는 이들을 만만히 여겼기에, 이런저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또한, 조선에서도 조청 전쟁 이후, 칭제건원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조선 역시 만주 개발이 어느 정도 진척되면, 칭제건원을 하지 않을까 생각되었으니, 조용한 곰은 정성국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전하면서, 단순히 경칭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조선처럼 칭제를 하는 것이 어떨까 이야기하기도 했었고.
칭제라는 것은 황제를 자칭함을 의미했고, 건원이라는 것은 연호를 세움을 의미하는데, 동양에서야 연호를 쓴다 하더라도, 이미 그레고리력에 익숙한 북미왕국에서 굳이 불편하게 연호를 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조용한 곰이 칭제만 권한 것이다.
다만, 이 문제는 고려해야 할 것이 많았고,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었기에, 정성국은 논의를 일단 접어두었었고.
헌데, 하얀 들꽃이 이 문제를 다시 꺼내자 정성국은 고민하다 바로 대답하지 않고, 생각이 많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자동차를 바라보고 환호하고 있는 잉글랜드인들을 바라보았고,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하얀 들꽃이 바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전 다른 나라들보다 북미왕국의 국력이 월등한데도, 전하를 다른 군주들보다 더 낮은 경칭을 붙이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려서...”
“죄송할 것 없어. 확실히, 이 경칭 문제 때문에 외무청이나 유럽의 외교관들이 혼란스러워했을 때부터, 이 문제를 처리해야 했는데, 바쁘다는 이유로 미룬 내 잘못이니까.”
정성국의 대답에 하얀 들꽃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기대하는 시선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허면...”
“다만, 이건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청장들과 이야기해봐야겠지.”
정성국의 말대로 이런 중요한 문제는 청장들과 논의하는 것이 마땅했기에 하얀 들꽃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전하. 뭐 이 문제가 시급한 일은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