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786화 (786/850)

#786

그 후로도 정성국은 제임스 2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때, 정성국은 은연중에 제임스 2세에게 난 네 편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고.

그렇게 계속해서 호의적으로 나오는 정성국을 보고 제임스 2세는 조금 고민하고, 또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다가, 곧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보다...조금 불편한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불편한 부탁이라면?”

정성국이 제임스 2세의 말에 호기심을 보이자, 제임스 2세는 단어 선택에 신중을 기하며 입을 열었다.

“북미왕국 국왕 전하께서 이렇게 런던에 방문하셨으니, 아마 수많은 이들이 친분을 쌓기 위해 접촉하려 들 겁니다. 그나마, 대관식이 열리기 전까지는 조금 자제하겠지만, 그 이후에는...”

북미왕국의 호위 함대가 런던 근교의 선착장에 정박한 이후, 유럽의 귀족들은 어떻게든 정성국을 만나기 위해 애를 썼다.

특히, 북미왕국 대사는 오랫동안 런던에서 지내면서, 북미왕국을 위해 수많은 귀족들과 연을 맺어왔기에, 정성국의 런던 방문 소식이 알려진 직후, 엄청나게 시달릴 정도였고.

그러나 정성국은 이를 보고받고, 일단은 조문 사절단을 표방한 만큼, 찰스 2세를 조문하는 것이 먼저 아니겠냐는 이유로, 귀족들의 인사를 미루었다.

그러니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눈치를 보고 자제하겠지만, 장례식이 끝나고 대관식이 열리는 순간 스웨덴이나 덴마크에서처럼 수많은 잉글랜드 귀족들이 정성국과 접촉하려 들 것은 정성국도 예상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정성국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짐작한다고 대꾸하자, 제임스 2세가 설명을 계속했다.

“헌데, 개중에는 단순히 친분을 쌓는 것 이상의 목적으로 북미왕국 국왕 전하와 만나려는 이도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정성국은 제임스 2세가 무엇을 우려하는지, 또, 무슨 부탁을 할지 대충 짐작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집안일이다 보니, 정성국에게 이야기하기 조금 난감해 보이는 제임스 2세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그가 말을 편히 할 수 있도록 도울 겸 정성국이 먼저 입을 열었다.

“친분을 쌓는 것 이상의 목적이라...흠. 혹시 몬머스 공작이 접근해 저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을 우려하시는 겁니까?”

“...아시고 계셨습니까?”

정성국이 몬머스 공작을 언급하자 제임스 2세는 움찔하며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고.

정성국은 그런 제임스 2세의 반응에 뭘 그리 놀라느냐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잉글랜드 대사가 새한성에 주재하며 북미왕국의 동향을 살피는 것처럼, 이곳 런던에 주재하는 아국의 대사가 잉글랜드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 의외의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제, 제가 런던 근교에 도착하자, 선착장에서 절 기다리고 있던 아국의 대사가 간략하게 런던의 동향을 보고해주더군요. 그때 런던의 분위기나 몬머스 공작에 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편히 말해보라는 시선을 보내는 정성국이었고.

이에 제임스 2세는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후우. 뭐 형님이 병 때문에 칩거하신 이후, 조카 녀석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야 알만한 이들은 다 아는데, 런던의 일에 빠삭한 북미왕국 대사가 모를 리가 없겠지요. 맞습니다. 조카 녀석이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공을 세우고 귀족들이 조카 녀석에게 모여들어 영향력이 올라가자, 정말 많이 변해버렸습니다.”

제임스 2세의 이야기에 정성국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 몬머스 공작이 여론을 조성해 당시 요크 공작이었던 제임스 2세를 공격한 적도 있었고, 또, 암살 모의까지 했었기에, 제임스 2세가 몬머스 공작을 격렬히 증오하고 있을 거라 여겼는데, 의외로 제임스 2세의 표정이나 말투를 보니, 그보다는 안타까운 감정이 더 커 보였기에.

“음? 그리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예전에는 조카분과 무척 친하셨던 모양이군요?”

해서 정성국이 이를 묻자, 제임스 2세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예전엔 제 휘하에서 군 복무를 하기도 했으니까요.”

“아...”

생각해보면, 제임스 2세는 해군 총사령관으로 해군을 지휘했었고, 몬머스 공작 역시 처음 군 생활을 해군에서 했었으니, 접점이 있었겠다 싶어 정성국이 탄성을 질렀을 때, 제임스 2세는 과거를 회상하는지 그리운 눈빛으로 먼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때만 해도, 조카 녀석이 전장에서 공을 세우면 귀족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으며 당당히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나름대로 챙겨주었지요. 해서 조카 녀석이 순탄히 공을 세울 수 있었고, 형님께서는 그 공을 바탕으로 조카 녀석에게 여러 직위를 내려주어 귀족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호오. 그렇습니까?”

정성국은 단순히 몬머스 공작이 무척 유능한 인물이라 공을 세운 줄 알았는데, 그게 다 그가 공을 세울 수 있도록 제임스 2세가 뒤에서 지원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깨닫고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제임스 2세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탄식하듯 이야기했다.

“헌데...그게 잘못이었어요. 조카 녀석이 사교계의 명사가 되면서 귀족들이 하나둘 조카 녀석에게 몰려들고, 그들이 바람이라도 집어넣었는지, 귀여웠던 조카 녀석이 어느 순간 변해버렸더군요. 탐욕에 물든 괴물이 되어 버렸어요.”

“...그렇습니까?”

“예. 조카 녀석이 어느 순간부터 적법한 계승권도 없으면서 왕위를 탐내 거짓말을 일삼고, 여론을 움직여 형님을 압박하려 들더군요.”

이에 정성국은 손으로 매끈한 턱을 매만지면서 의아하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흠. 여론을 움직인다고 그게 가능합니까? 동양이라면, 모를까 서양이라면 사생아는 왕위 계승권이 아예 없지 않습니까?”

동양의 경우 축첩제도가 존재했기에, 첩에게 태어난 자식은 서얼로 분류되어 신분에 차등을 받을지언정 정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물론, 정식으로 인정받는다는 것과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동의어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러하기에 동양의 왕가에서는 서자들도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고.

하지만, 서양은 달랐다.

기독교의 영향으로 간통을 죄악시 여겼고, 그렇기에 사생아나 그 어머니들은 법적으로 어떠한 지위도 받지 못했고, 그러니 당연히 왕위를 계승할 수도 없었다.

물론, 사생아가 왕위를 계승한 경우가 아예 없지는 않은데, 무척 드물었고, 적법한 자녀나 계승자가 있는 경우에는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그렇기에 찰스 2세는 마음 놓고 사생아들을 키워준 것이다.

이들은 가문의 혈연이지만, 신분적으로는 법적 후계권이 아예 없어서, 가문의 계승이나 군주 자신에게는 도전할 수 없고, 오히려 자신들을 두둔해줄 수 있는 군주에게 충성을 바칠 수밖에 없으니,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정성국은 그렇기에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고, 이에 제임스 2세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그렇습니다. 해서, 조카 녀석은 예전에 부모님이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고, 그러니 자신은 왕위를 계승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허어...”

“물론, 나중에 형님께서 이러한 소문이 돌자, 자신은 캐서린을 제외하면 누구와도 결혼한 적이 없다고 밝히며 이러한 소문을 일축하긴 했습니다만...오히려 그래서 조카 녀석은 형님에게까지 원한을 품은 것 같더군요.”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짐작한 정성국이 혀를 찼다.

아마도 적당한 성직자를 하나 매수했으리라.

그리고 자신을 적법한 계승자로 포장해 더 많은 귀족들의 지지를 확보한 것일 테고 말이다.

다만, 이런 수를 쓸 거라면, 오히려 인내하고 기다렸다가, 찰스 2세가 사망한 이후에 움직여야 하지 않은가 싶었지만, 그만큼 몬머스 공작이 마음이 급했다는 것을 짐작한 정성국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그러다 라이하우스 사건을 떠올린 정성국이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흐음...그래서 그...”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제임스 2세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하고 어두운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형님과 저를 암살하려고까지 했지요. 뭐 본인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고 주장하긴 했습니다만...”

제임스 2세는 그 말을 하면서 감정이 격해졌는지, 다시 심호흡하며, 다시 한번 찰스 2세의 관을 쓰다듬었고.

“아무튼, 조카 녀석은 왕위에 집착하고 있고, 제 신앙 때문에 조카 녀석을 지지하는 귀족들도 꽤 됩니다. 다만, 아무리 많은 귀족들이 조카 녀석을 지지한다고는 해도, 저들이 당장 극단적으로 행동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게 다 북미왕국 덕분이지요.”

“예? 그게 무슨...아. 신식 소총?”

“그렇습니다. 조카 녀석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에, 형님께서는 북미왕국으로부터 사들여 육군에 배치했던 신식 소총을 모두 회수하셨습니다. 해서, 현재 잉글랜드에서 신식 소총은 오직 왕실 근위대만 보유하고 있기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겠지요.”

몬머스 공작은 한때 육군의 총사령관이었다.

물론 라이하우스 사건 이후로, 모든 공직을 내려놓았지만, 몬머스 공작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확신하긴 어려웠고.

그 때문에 찰스 2세는 만약을 대비해 바로 일부 부대에 배치한 신식 소총을 모두 회수해버렸다.

그러니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병력은 오로지 왕실 근위대뿐이고, 이미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병력의 전투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유럽에서 벌어진 여러 전투에서 증명되었기에, 몬머스 공작이 섣불리 군사를 일으킬 수도 없는 것은 당연했고.

이러한 사실을 이해한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이다 중얼거렸다.

“아. 그러면...?”

“맞습니다. 저들에게 남은 방법이라고는, 저를 암살하거나, 혹은 북미왕국 국왕 전하를 설득해 신식 소총을 확보하는 방법뿐이지요. 그러니...”

어떻게 보면 집안싸움에 정성국을 끌어들이는 꼴이라 면목이 없다는 얼굴로 말을 흐리는 제임스 2세였고, 그런 제임스 2세의 반응에 정성국이 괜찮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하하하. 걱정하지 마시지요. 북미왕국에서 반란을 계획하는 이에게 무기를 팔아 우호국인 잉글랜드를 혼란케 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약속드리지요.”

이런 정성국의 대답에 제임스 2세가 안도했다.

물론 제임스 2세 역시 정성국이나 북미왕국을 믿기는 했다.

다만, 왕위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한 조카였고, 쓸 수 있는 수가 많지 않다 보니, 왕위를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 북미왕국이 혹할만한 조건을 내걸 수도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면, 카리브 해의 섬들을 북미왕국에 넘긴다거나, 다른 식민지를 넘긴다거나 하는.

그리고, 그 정도 조건이라면 북미왕국도 구미가 당길 수 있다고 보았고, 제임스 2세와 그 측근들은 이 점을 걱정했다.

특히, 런던에 주재하는 북미왕국 대사는 정치적인 문제에는 끼어들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넌지시 밝혔음에도, 몬머스 공작과 자주 어울리는 귀족들이 북미왕국 대사관을 걸핏하면 드나들었으니, 아무래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고.

헌데, 정성국이 이렇게 확답해준 이상, 상황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제임스 2세는 안도하며 정성국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런 제임스 2세의 반응에 정성국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마땅히 그래야지요. 다만, 제가 거절하면, 저들에게 남은 방법은 하나뿐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몬머스 공작은 전적도 있잖습니까.”

북미왕국에서 신식 소총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남은 방법은 제임스 2세의 암살뿐이었고, 몬머스 공작은 이전에도 암살을 모의한 적이 있었기에 정성국이 제임스 2세의 안전을 걱정하자, 제임스 2세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부분은 저도 생각해둔 것이 있으니, 너무 염려치 않으셔도 될 겁니다.”

이에 정성국은 잠시 제임스 2세를 바라보았지만, 제임스 2세가 비록 정치적인 능력은 떨어지더라도, 젊었을 때부터 수많은 전장에 참여한 만큼, 제 한 몸 건사하지 못할 위인은 아니라는 판단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이로군요. 허나,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시지요.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도와드릴 테니 말입니다.”

이런 정성국의 대답에 제임스 2세는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한 가지 부탁을 더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엇입니까?”

“대관식 이후, 북미왕국의 영향력을 조금 빌리고 싶습니다.”

어차피 제임스 2세가 정성국을 초대한 것은 그와 북미왕국의 영향력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점차 잉글랜드에서 친북미왕국 성향의 귀족, 상인, 지식인들이 많아지는 만큼, 은연중에 정성국과의 친분을 과시하면서, 이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물론, 이는 북미왕국이 예전부터 자국의 영향력이나 이름값을 타국이 이용하는 것을 경계했기에 이런 방식을 생각한 것이고.

헌데, 이번에 정성국과 직접 대화를 나눠보니 의외로 정성국은 자신에게 무척 호의적인 만큼, 정성국에게 미리 양해를 받고, 북미왕국의 영향력을 빌릴 수 있다면, 더 쉽고 빠르게 친북미왕국 세력을 품에 안을 수 있을 테고, 그렇게 되면 대세가 기울어 더욱 손쉽게 잉글랜드의 혼란을 잠재우고 내부를 안정시킬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원래 침몰하는 배에 끝까지 남길 원하는 자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해서 제임스 2세가 터놓고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제임스 2세의 생각은 짐작하고 있었고, 그런데도 대관식까지 참석하기로 한 것은 제임스 2세의 뜻대로 이용당해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고, 해서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시지요.”

“오. 그게 정말입니까?”

그리고 이런 정성국의 즉답에 제임스 2세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되묻자 정성국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예. 잉글랜드는 아국의 중요한 교역국이니만큼, 잉글랜드 내부가 혼란스러운 것은 아국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돕겠다고 이야기한 것이고요. 그러니, 대관식 이후에 자리나 만들어 주시지요. 제가 잉글랜드 국왕 전하를 지지하는 발언을 해드릴 테니 말입니다.”

“하아...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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