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4
정성국이 잉글랜드를 방문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바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정성국과 함께 움직이는 인원들이 있다 보니, 미리 잉글랜드와 협의를 해야 했던 것이다.
해서 정성국이 잉글랜드를 방문하기로 마음을 굳히자, 음흉한 여우는 직접 잉글랜드로 이동해, 협의를 진행하기 시작했고.
그때까지 정성국은 크리스티안 5세의 배려로 덴마크 왕실의 별장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렇게 아름다운 덴마크 왕실의 별장에서 하얀 들꽃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면서 유럽을 방문하는 동안 수많은 귀족과 만나며 쌓은 정신적 피로를 말끔히 푼 정성국은, 때마침 음흉한 여우가 덴마크로 돌아왔다는 보고에 즉각 그를 불렀고.
“그래. 잉글랜드와의 협의가 끝났다고?”
정성국이 막 응접실로 들어오는 음흉한 여우에게 질문을 던지자, 음흉한 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전하. 찰스 2세의 유언에 따라 왕위를 계승해 잉글랜드-스코틀랜드의 국왕이 된 제임스 2세는 찰스 2세를 조문하기 위해 직접 조문 사절단을 이끌고 방문하시겠다는 전하의 제안에 깊은 감사를 표하면서, 아국에서 원하는 대로, 전하의 호위를 위해 호위 함대의 런던항 입항과 모든 호위 병력의 하선 및 런던 입성을 수락했습니다.”
이에 정성국은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응? 모든 호위 병력? 아. 설마 제임스 2세는 내가 데려온 호위 병력의 규모를 모르나?”
그리고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음흉한 여우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북미왕국 대사가 이미 이야기했는걸요.”
“헌데 허락했다고? 거의 1만에 달하는 외국군이 수도에 입성하는 것을?”
이번에 정성국이 대동한 병력은 단순한 호위 병력이라고 하기엔 조금 과했다.
물론, 이는 북미왕국의 강력함을 과시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고.
이는 효과적이었지만, 아무래도 유럽의 군주들은 정성국이 대동한 대규모 호위 병력에 아무래도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북미왕국군은 자신들의 상식을 벗어난 장비로 무장해 전투력도 어마어마하지 않던가.
해서, 칼 11세조차 나중에 정성국이 대동하는 호위 병력의 규모를 알고 나서 당황하고, 또 이를 허락한 스웨덴 대사를 질책한 것이고 말이다.
그나마, 칼 11세는 결혼식이 수도가 아니라, 수도에서 무척 멀리 떨어진 룬드에서 열린다는 점, 정성국이 직접 결혼식에 참석하면 스웨덴과 자신의 위상도 함께 오를 거라는 점, 그리고 이미 전권을 위임한 스웨덴 대사가 북미왕국과 합의한 내용을 뒤늦게 변경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이 크다는 복합적인 이유로 결국 묵인한 것이고 말이다.
이렇게 동맹국인 스웨덴조차, 정성국의 호위 병력에 부담을 느낄 정도인데, 잉글랜드는 아무리 우호적이라고는 하나 동맹국도 아니었다.
그러니, 당연히 정성국과 함께 움직이는 대규모 호위 병력에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제임스 2세는 막 왕위에 올랐기에, 자신의 권위 때문이라도 정성국의 어느 정도 호위 병력을 제한할 거라 여겼고, 정성국 역시 갓 왕위에 오른 제임스 2세의 상황을 생각해 이를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해서, 정성국은 잉글랜드로 떠나는 음흉한 여우에게 최소한 특수군 일부나, 호위대 1천 명 정도를 이야기했었고.
헌데 자신의 예상과는 다르게 제임스 2세가 이를 허용하자, 정성국은 진심으로 당황한 눈치였고,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음흉한 여우가 곧바로 대답했다.
“예. 제임스 2세는 북미왕국 대사를 통해 호위 함대와 호위 병력의 규모를 듣고, 오히려 내심 안도하는 눈치를 보였답니다.”
“응? 안도? 설마...”
외국군이 자국의 수도에 들어오는 데 이를 오히려 반긴다면 그 이유는 하나뿐이었기에 정성국이 얼굴을 흐렸고.
이에 음흉한 여우가 입가의 미소를 지우고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직접 런던을 방문해 확인해 보니 런던의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잉글랜드는 훗날 성공회로 불리는 국교회, 그러니까 개신교 세력이 무척 강했다.
다만, 이렇게 잉글랜드에 개신교가 퍼지기까지 종교 갈등으로 수많은 피가 잉글랜드의 땅에 뿌려졌고.
그 때문에, 개신교 세력은 가톨릭 군주를 무척 경계했다.
가톨릭 군주가 다시 잉글랜드를 가톨릭 국가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의 유럽 외교는 종교가 꽤 큰 부분을 차지했기에, 가톨릭 군주가 즉위하면, 외교 노선도 180도 바뀔 수밖에 없어, 이 부분을 걱정하는 이들도 무척 많았다.
해서, 찰스 2세는 이런 개신교 세력을 다독이기 위해 실제로는 가톨릭 교도였지만, 대외적으로는 국교회 신자라고 이야기하고 다녔고.
허나 찰스 2세의 동생인 제임스 2세는 가톨릭 신자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해서, 잉글랜드의 귀족과 백성들은 찰스 2세에게, 개신교도 왕위 계승자를 요구하기도 했었고 말이다.
물론, 찰스 2세는 적법한 왕위 계승자는 오로지 자신의 동생뿐이라며 제안을 거절했고.
이러한 잉글랜드의 사정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정성국은 음흉한 여우의 대답에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분위기가 좋지 않다라...곧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보는 건가?”
“그렇습니다. 잉글랜드 귀족들은 제임스 2세를 아버지인 찰스 1세와 비슷하다고 여기고 있고, 그 때문에 일부 귀족들은 몬머스 공작의 저택을 자주 드나든다고 하더군요.”
음흉한 여우의 말에 정성국은 잠시 기억을 되짚어보다 손가락을 튕겼다.
“몬머스 공작이면...아. 찰스 2세의 장남이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물론 사생아라 계승권은 없습니다만...아시잖습니까. 욕심이 무척 많은 인물이라는 것을요.”
이에 정성국은 쓰게 웃었다.
북미왕국의 일만으로 바쁜 그가 제대로 된 계승권도 없는 찰스 2세의 사생아의 존재를 어찌 알겠는가.
물론 정성국에겐 가공한 기억력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가 몬머스 공작을 아는 것은 단순히 전생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라던가, 단순히 그가 찰스 2세의 사생아라서가 아니었다.
“라이하우스 사건 말이로군.”
“예. 왕위를 위해 아버지와 숙부를 암살하려 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니 지금 같은 분위기를 어떻게든 이용하려 할 인물이라...”
찰스 2세의 장남인 몬머스 공작은 나름대로 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찰스 2세가 왕정복고로 다시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르고, 자리가 안정되면서 장남을 잉글랜드로 데려와 공작으로 임명했고.
그는 다른 귀족들처럼 군인으로 오랫동안 복무하면서, 혁혁한 공을 세우며 군인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증명했다.
그러자 찰스 2세는 장남이 세운 공에 무척 기뻐하며 몬머스 공작에게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총장 자리와 더불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모든 육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기도 했고.
그러자 몬머스 공작은 잉글랜드 사교계에서 떠오르는 샛별이 되었다.
비록 그가 찰스 2세의 사생아이기는 해도, 왕의 맏아들이었으며, 높은 작위와 공적마저 지니고 있었으니 말이다.
여기에 몬머스 공작은 국교회 신자이기도 했으니, 많은 귀족들은 몬머스 공작을 지지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귀족들의 지지에 몬머스 공작은 야심을 품기 시작했다.
해서, 몬머스 공작은 귀족들을 움직여 잉글랜드에 반 가톨릭 여론을 조성해, 귀족들과 대중들이 개신교도 왕위 계승자를 원하게 만들어 왕위 계승자 자리를 확보하려 했고.
이에, 찰스 2세는 자신이 신뢰하는 동생을 공격하고, 자신을 압박해서라도 왕위를 노리는 장남의 행동에 불쾌감을 느꼈고, 이러한 부자간의 마찰은 정치적인 문제로 번졌다.
그러다 3년 전쯤, 일부 귀족들이 찰스 2세와 요크 공작의 암살 모의를 벌이다 발각되는데, 이게 바로 라이하우스 사건이고, 이들은 몬머스 공작을 잉글랜드의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이런 암살 모의를 벌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런던에 때아닌 피바람이 불었고.
이때 자세한 보고서가 외무청을 통해 올라오면서 정성국도 몬머스 공작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외무청과 정보기관의 보고로는, 분명 몬머스 공작이 암살 모의를 벌인 귀족들을 뒤에서 지원한 것 같다고 보고했었고.
해서 정성국은 음흉한 여우의 말에 동의하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대규모 호위 병력을 끌고 오는 것을 내심 반긴 건가? 최소한 내가 있을 때는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테니?”
“그렇습니다. 해서, 제임스 2세는 전하께서 조금 길게 잉글랜드에서 머물러주시길 바라더군요.”
음흉한 여우의 대답에 정성국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길게? 그건 조금...”
이에 음흉한 여우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제임스 2세도 전하께서 몇 주 동안 런던에서 머무르는 것까지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전하께서 바쁘시다는 것은 제임스 2세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다만...일주일 정도는 머물러 달라고 요청하더군요.”
“일주일?”
“예. 찰스 2세의 장례식과 자신의 대관식에 참석해 달라는 거지요.”
음흉한 여우의 대답에 정성국은 제임스 2세의 속내를 눈치채고 중얼거렸다.
“흠. 대관식까지 참석해 달라는 것은...”
“전하의 친분을 과시해 잉글랜드 내의 친북미왕국 성향의 이들을 모두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겁니다.”
잉글랜드에는 친북미왕국 성향의 사람들이 꽤 많았다.
처음 북미왕국의 존재를 알게 된 후, 찰스 2세의 판단에 따라 우호적으로 교류하면서, 북미왕국과의 교역에 직간접적으로 끼어들어 돈을 번 이들이나, 최근에 정성국의 명령에 따라 왕실 상단이 잉글랜드 곳곳의 광산에 많은 투자를 하면서, 이 투자로 이득을 본 이들은 당연히 친북미왕국 성향을 띌 수밖에 없었다.
원래 자신에게 돈을 벌게 해주는 이는 좋은 놈인 법이니까.
여기에, 왕실 상단은 정성국의 명령으로 잉글랜드와 투자 계약을 할 때 잉글랜드 광부들을 위해 몇 가지 조항을 삽입했고, 덕분에 잉글랜드 광부들은 이전보다 더 나은 환경과 더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었는데, 이것이 다 관대한 정성국 덕분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알린 왕실 상단과 정보기관 덕분에 작게는 잉글랜드의 광부들, 더 나아가서는 잉글랜드의 백성들도 은연중에 북미왕국을 우호적으로 바라보았고.
또한, 지식인들도 북미왕국의 기술력에 감탄하며, 북미왕국을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제임스 2세가 정성국과의 친분을 과시해, 이들 중 일부만이라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안정적으로 나라를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해서 제임스 2세는 정성국의 방문을 반기며 어떤 조건이라도 허락할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이에 정성국은 잠시 고민했지만, 답은 나와 있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고생하면, 잉글랜드의 내부 사정이 안정될 텐데, 굳이 그걸 마다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더불어, 새한성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았던 제임스 2세는 꽤 괜찮은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다.
엄격한 원칙주의자였지만, 나름대로 관대한 면모가 있었고, 우직하고 충성스러운 인물이었으니까.
해서 정성국은 찰스 2세가 왜 동생을 그렇게 신뢰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고.
또, 그는 무척 유능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젊을 때부터 육군에서 복무해 수많은 공을 쌓았고, 또 해군 최고사령관으로서 잉글랜드 해군을 개편, 재건하기도 했고, 또 런던 대화재 당시에는 화재를 진압하기 위한 조직을 설립하고, 직접 화재를 진압해, 당시 혼란스러운 런던의 민심을 수습하기도 했었으니까.
물론, 그의 유능함은 왕의 자질과는 조금 거리가 있긴 했다.
마치 제임스 2세와 비슷한 성향의 찰스 1세는 결국 귀족들에 의해 쫓겨났고, 제임스 2세와 전혀 다른 성향의, 필요에 따라 양심과 원칙마저 저버리고 유리한 선택을 하는 타고난 정치가인 찰스 2세가 안정적으로 잉글랜드를 통치한 것처럼 말이다.
다만, 정성국이 제임스 2세가 바라는 대로, 잉글랜드를 방문해, 그와의 친분을 과시하면서, 자신과 친분을 쌓길 원하는 친북미왕국 성향의 인물들을 제임스 2세와 연결해주고, 이들 중 일부라도 제임스 2세를 지지한다면, 제임스 2세는 전생과는 달리, 안정적으로 잉글랜드를 통치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고.
그가 파악한 제임스 2세의 성격이라면, 그는 은혜에 보답할 인물이라, 북미왕국에 도움이 될 것이 확실했다.
해서 정성국은 한숨을 내쉰 후 대답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의 대관식까지 머무를 테니, 준비하도록 하게.”
정성국의 결정은 음흉한 여우가 내심 바란 것이었기에, 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전하. 이미 호위 함대의 출항 준비는 모두 끝났으니, 바로 이동하시면 될 겁니다.”
“흠. 그러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