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2
그렇게 결혼식과 피로연이 모두 끝나고, 칼 11세는 울리카와 함께 룬드 근교에 마련된 숙소로 이동했고, 정성국과 크리스티안 5세는 가족들과 함께 말뫼 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정성국이 말뫼 항으로 이동하자, 결혼식에 참석한 귀족들은 대부분 정성국을 따라 말뫼 항으로 이동했다.
혹시 정성국이 다시 열지는 않을까 내심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정성국은 요 3일간 연회에 참석해 수많은 귀족들과 인사하고, 가벼운 친분을 쌓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사격 시범 이후에 어떻게든 북미왕국의 무기를 수입하려고 요청하는 사절단이나 귀족들에게 더는 시달리기 싫은 마음도 꽤 있긴 했고.
그래서 정성국은 바로 말뫼 항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지만, 바로 전 함대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말뫼 항의 선착장 시설이 열악해 병력과 물자, 장비들을 하선하는 데 시간이 걸렸던 것처럼, 장비와 물자를 다시 호위 함대에 싣고, 병력을 태우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꽤 걸릴 수밖에 없던 탓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또, 며칠 머무르는 것은 조금 부담스러웠고.
해서 정성국은 호위대장, 김봉길과 상의 끝에 함대를 둘로 나누고, 김봉길이 이곳에서 함대의 출항 준비를 지휘하는 사이, 정성국은 호위대장과 함께 덴마크를 방문하기로 했다.
원래부터 정성국은 기왕 유럽까지 온 김에, 가까운 덴마크에 잠깐 들러 관광을 할 생각이기도 했고, 또, 주목적이 울리카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외국을 방문한다는 사실에 이국적인 풍경을 잔뜩 구경할 수 있을 거라고 내심 기대했던 하얀 들꽃이, 막상 말뫼 항과 룬드를 방문한 후에는 기대 이하라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실망한 기색이 없지 않았기에.
물론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도 그리 볼 것이 없을 것 같긴 했지만 말이다.
해서 정성국이 탄 왕실 여객선과 호위 함대에 속한 3척의 전선은 다음날 수많은 유럽인들의 배웅과 함께 말뫼 항을 떠나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으로 이동했고.
말뫼 항을 떠난 후, 응접실에서 잠시 티타임을 가지며 담소를 나누던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이 보인다는 호위대장의 보고에 감탄사를 토했다.
“와. 1시간도 되지 않아 도착하다니...정말 가깝네요?”
하얀 들꽃의 이야기에, 그 옆에 있던 덴마크의 왕비인 샤를로테가 꽤나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 물론 가깝긴 해요. 헌데...이렇게 일찍 도착할 줄은 몰랐네요. 덴마크의 배를 타고 이동했을 때는 2시간이 넘게 걸렸던 것 같은데...”
“뭐 북미왕국의 배야 워낙 빠르니까. 해서 참 탐나는데 말이야...”
그러면서 크리스티안 5세가 은근히 바라는 눈빛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자, 정성국이 크리스티안 5세의 속내를 눈치채고 바로 손을 내저었다.
“야. 안돼. 그렇게 조선소를 늘렸어도, 아직 우리가 쓸 선박도 부족한 판국에 무슨...”
“끙...”
단칼에 거절하는 정성국을 보고 크리스티안 5세는 시무룩해졌다가, 예전에 북미왕국이 노후한 전선들을 폐기하는 대신, 호주 연합에 판매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이를 거론하며 다시 요청했다.
“아. 예전에 호주 연합에 판매한 것처럼, 새 선박이 아니라 낡아 곧 폐기할 선박들을 판매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아?”
“야. 말도 마라. 안 그래도 노후 선박 문제 때문에 지금 골치인데...”
“응? 무슨 말이야?”
정성국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자, 크리스티안 5세는 호기심을 보였고.
이에 정성국이 얼마 남지 않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키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국의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덕분에 빠르게 발전하면서, 그만큼 아국의 물동량도 폭발적으로 늘어났지. 헌데 아국의 수송량으로는 이를 감당하기 어렵거든.”
“아. 그러고 보니 북미왕국의 도시들은 대부분 해안가에 위치해 있으니...”
“그래. 아직 대부분의 물자는 선박으로 수송하는데, 아국이 보유한 선박들과 매년 건조하는 선박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야. 헌데 이런 상황에서 선령이 오래된 선박들을 폐기하면 아국의 수송량이 더욱 부족해질 수밖에 없지.”
“아...”
정성국의 설명에 크리스티안 5세는 왜 정성국이 노후 선박 문제가 골치라고 했는지 대충 짐작했을 때, 옆에 있던 하얀 들꽃이 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원래 아국은 20년이 넘는 선박들은 폐기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어요. 그 정도의 선령이라면 노후되어 운용하다 안전 문제가 발생할 거라고 여기기 때문이지요.”
“예? 20년이요? 그 정도면 충분히 써먹을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이에 크리스티안 5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얀 들꽃을 바라보았다.
보통 유럽에서는 범선의 수명을 3, 40년 정도로 보지만, 선박의 가격이 꽤 비싼 터라, 어지간한 선주들은 침몰하기 직전까지 최대한 오래 운용하려 했었고, 그 때문에 3, 40년이 넘어서도 바다를 누비는 선박들이 꽤 있었다.
헌데, 북미왕국에서는 선박의 수명을 고작 20년으로 잡는다고 하니 너무 짧은 것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특히, 북미왕국의 선박들은 유럽의 선박들보다 훨씬 튼튼하다고 알려지지 않았던가.
해서, 크리스티안 5세는 혹시 증기선의 경우 수명이 짧은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정성국이 하얀 들꽃 대신 대답했다.
“비록 아국에서 선박을 건조할 때, 선체를 최대한 튼튼히 건조하곤 하지만, 아국의 선박들은 장거리 운항을 자주 하니 수명이 그리 긴 편은 아니야. 그리고 선박이 부족한 것처럼 선원도 부족한 편인데, 그런 노후한 선박을 계속 운용하다가 사고가 나서 귀중한 선원들이 죽으면 곤란하기도 하고.”
이에 크리스티안 5세는 이런 황당한 소리는 처음 듣는다는 얼굴로 정성국을 바라보며 기가 찬다는 듯 중얼거렸다.
“허...선원이 귀중하다니, 그것 참...”
원래 어촌에 가면 널리고 널린 것이 바로 선원이었다.
거기에 이 시대의 선원들은 꽤 거칠기에, 인식도 나쁜 편이었고.
해서 샤를로테는 크리스티안 5세의 말에 동의하며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고, 이들의 반응에 하얀 들꽃이 조금 난감하다는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정성국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나라마다 사정은 다른 법이니까.”
북미왕국이 세계 각지에 해외 영토를 획득해, 교역로를 유지해야 했고, 또, 세계 각국과 활발히 교역하고, 최근엔 적극적으로 각국에 수송선을 보내 직접 교역을 하려다 보니, 그만큼 많은 선원이 필요했다.
헌데, 선원의 경우, 오랫동안 배에서 생활해야 했기에, 가정을 이룬 이는 아무래도 기피할 수밖에 없었고, 일이 고되고 자유가 어느 정도 제한되다 보니, 굳이 선원이 되려는 이들은 적을 수밖에 없었다.
북미왕국에는 널린 것이 일자리였으니 말이다.
물론 이 때문에 북미왕국에서는 선원들의 생활 환경을 최대한 개선하고, 또 높은 급여를 지급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광부와 마찬가지로 기피되는 직업 중 하나였고, 그렇기에 귀할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다행이라면,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는 이주민들 가운데 뱃일에 익숙한 이들이 이런 좋은 조건에 혹해 선원이 되었기에 겨우겨우 선박들을 운용하고 있었고 말이다.
이러한 사정을 하얀 들꽃이 자세히 설명하자, 그제야 나라마다 사정이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한 크리스티안 5세와 샤를로테가 고개를 끄덕였고.
“아무튼, 원래 법은 그랬는데, 법대로 선령이 20년 된 선박들을 폐기하자니, 늘어나는 물동량을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워져 그만큼 아국의 발전에 지장을 줄 게 분명하단 말이지? 그래서 일부 청장들은 이 법을 조금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서 말이야.”
이런 정성국의 설명에 크리스티안 5세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걸 왜 골치 아픈 문제라고 이야기하면서 고민하는가 싶었기에.
“흠. 북미왕국의 사정이 그렇다면, 청장들의 말대로 법을 완화해야 하지 않아?”
물론, 청장들의 말대로 법을 완화하게 되면, 노후한 선박을 계속 운용할 테니, 이를 사들이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아쉽긴 한데, 그 때문에 원래 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약지는 않은 크리스티안 5세였고.
이런 그의 물음에 정성국은 씁쓸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선원들의 안전과 직결된 문제라서 쉽게 결정을 내리기 어렵지.”
물론, 겉으로만 보자면, 당장 북미왕국의 사정이 급하니, 조금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법을 완화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보이긴 했다.
다만, 안전을 위해 일종의 원칙을 정한 것인데, 당장의 사정이 급하다거나, 효율 때문에 이 원칙을 꺾는다면, 앞으로도 비슷한 경우에 계속 효율과 편의를 위해 원칙을 꺾을 수밖에 없으리라 보았고, 그것이 우려되는 정성국이었다.
특히, 정성국은 이런 식으로 효율과 편의만을 생각하다가, 어떤 세상이 되었는지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섣불리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고, 그래서 골치 아픈 문제라 칭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성국의 반응에 크리스티안 5세와 샤를로테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았을 때, 하얀 들꽃은 이 문제로 정성국과 많은 대화를 하면서, 정성국이 무엇을 우려하는지를 어느 정도 짐작했기에,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렇쵸. 원래 처음이 어려운 법이잖아요?”
“예?”
“안전과 효율을 놓고 저울질하다 처음으로 안전 대신 효율을 선택한다면, 계속해서 안전보단 효율을 선택하게 되겠지요. 그러다 보면...어쩌면 더는 안전을 생각하지 않고 효율만을 추구할 수도 있고요. 전하께서는 그것을 걱정하시는 거겠지요.”
“흐음...”
그제야 크리스티안 5세는 정성국이 먼 훗날까지 고려해 고민하고 있음을 깨닫고, 생각이 많은 얼굴로 정성국과 하얀 들꽃을 바라보았고.
그렇게 응접실에 침묵만이 감돌자, 정성국은 괜히 이 자리에서 계속 이 문제를 이야기해봐야 골치만 아플 것 같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입을 열었다.
“뭐 이 자리에서 계속 의논할 문제는 아니니 접도록 하고. 아무튼, 아국의 상황이 이러니, 아국에서 증기선을 수입할 생각을 하기보단, 자체적으로 증기선을 건조하라고. 이미 아국의 증기기관 제작 기술은 확보했잖아?”
이에 크리스티안 5세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후우. 나도 처음엔 증기기관만 있으면 바로 증기선을 개발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더라고. 증기기관의 동력을 추진력으로 바꾸기도 쉽지 않아서 말이야.”
“그래? 내가 보고 받기로는 덴마크에서도 증기선을 건조했다고 들었는데...”
정성국이 고개를 갸웃하며 이렇게 이야기하자, 크리스티안 5세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하긴 했지. 다만, 성능이 너무 나쁜 것이 문제야. 같은 크기의 범선보다 느리거든. 뭐 일단 증기선을 건조하고, 실제 운용하면서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개선하는 쪽이 나을 것 같아서 건조한 거긴 한데...”
“잘 했어. 처음부터 대단한 것이 나오겠어? 그렇게 실패하고, 또, 연구하고, 그러면서 점차 쓸만한 녀석을 만들 수 있겠지.”
정성국이 빙긋 웃으며 이렇게 이야기하자, 크리스티안 5세는 뚱한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건 아는데, 시간과 돈이 너무 소모되니 문제지. 우린 북미왕국처럼 돈이 남아나질 않는다고.”
“그래도 어쩌겠어. 날로 먹을 수야 없는 법 아닌가.”
이에 크리스티안 5세가 울컥한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야. 누가 날로 먹겠대? 대가를 치를 생각이라고!”
“호오. 무려 증기선 제작 기술의 대가를 치르겠다고? 감당이 되겠어?”
정성국이 묘한 표정으로 크리스티안 5세를 바라보자, 크리스티안 5세는 움찔했다.
생각해보면, 증기선 제작 기술 역시 무척 중요한 기술이다 보니, 그 값이 만만치는 않을 것 같았으니까.
거기에 정성국의 표정을 보아하니, 엄청나게 요구할 것 같기도 했고.
“음...동맹국이니 조금 싸게는 안 될까?”
해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크리스티안 5세였고, 그런 크리스티안 5세의 반응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날로 먹지 않겠다면서?”
“끙...”
정성국의 타박에 크리스티안 5세가 고민하고 있을 때, 정성국이 다시 입을 열었다.
“헌데, 기술 이전의 문제는 내가 마음대로 결정하기가 조금 애매해. 일단 연구청, 외무청의 의견도 들어봐야 해서...나중에 논의하자고.”
“쩝. 어쩔 수 없지.”
크리스티안 5세가 정성국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을 때, 멀리서 포성이 들렸다.
‘퍼퍼퍼퍼퍼펑!’
갑작스러운 포성에 멈칫한 정성국은 곧 크리스티안 5세의 얼굴을 보고 상황을 이해했다.
“응? 아. 예포인가?”
“그래. 아들 녀석을 돌려보낼 때, 미리 의전을 준비해두라고 이야기했었지.”
정성국과 정안문이 함께 타국을 방문하는 것을 청장들이 결사반대한 것처럼, 군주와 후계자가 함께 외국을 방문하는 것은 그 외국이 아무리 동맹국이라 하더라도 위험성이 컸다.
그렇기에 크리스티안 5세 역시 프리데리크의 안전을 위해 정성국과의 인사가 끝나자마자, 덴마크로 되돌려 보냈었고.
그리고 말뫼 항은 제대로 된 방어 시설도 없었기에, 예포도 없었지만, 코펜하겐은 달랐다.
특히, 덴마크 왕실이 머무는 코펜하겐 성은 해안가에 위치해 있다 보니, 해안가의 공격에 대비한 해안 포대들이 꽤 있었고.
해서 덴마크에서는 정성국을 환영한다는 의미로 예포를 발사한 것이다.
그리고 덴마크 측의 예포에 화답하듯, 곧 호위 함대에서도 예포를 발사했고.
이에 정성국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슬슬 내릴 준비를 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