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8
자정이 되어서야 겨우 연회장에서 탈출한 정성국은 바로 잠자리에 들었고.
다음 날, 아침에 겨우 일어난 정성국은 아침 식사를 하고자 응접실 옆에 있는 식당으로 이동해, 그곳에서 크리스티안 5세를 비롯해 어제는 미처 만나지 못한 울리카, 덴마크의 왕비인 샤를로테 아멜리아, 그리고 크리스티안 5세의 장남인 프레데리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정성국은 곧 있을 결혼식 때문에 설렘과 행복이 가득한 얼굴을 한 울리카가 정성국을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위해 이곳까지 방문한 정성국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자, 전생에 부부였다는 이유로 중매를 섰다가 울리카가 불행해지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속 불안감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빙긋 웃을 수 있었고.
그 후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며 아침 식사를 하던 정성국은 자신에게 할 말이라도 있는지 계속해서 자신을 힐끔힐끔 바라보는 프레데리크를 보고 말했다.
“할 말이라도 있니?”
“저...”
정성국이 말을 걸자 무척 당황한 눈치의 프레데리크를 보고 정성국은 그의 긴장을 풀어줄 겸 빙그레 웃었다.
“부담 갖지 말고 말해보렴.”
“...그게 청이 하나 있습니다.”
“청?”
“예. 가능하다면, 북미왕국의 기술력이 집약되어 있다고 알려진, 전선과 검차를 가까이서 보고, 또 탑승하고 싶습니다.”
“응?”
이 뜬금없는 프레데리크의 말에 정성국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크리스티안 5세를 바라보았고.
프레데리크의 말에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싸 쥐었던 크리스티안 5세가 손을 내리고 미안하다는 얼굴로 정성국에게 말했다.
“끙...네가 이해 좀 해줘. 저 녀석도 북미왕국의 기물들에 관심이 무척 많거든. 거기에 작년에 북미왕국을 방문하지 못한 것이나,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이동했다는 사실, 북미왕국에서 여러 기물을 직접 살펴보았다는 울리카의 말에 무척 억울해하기도 했고.”
물론 정성국은 유창하게 북미왕국 말을 하는 프레데리크를 보고 울리카처럼 프레데리크도 북미왕국에 관심이 많을 거라고 짐작하긴 했었다.
다만, 크리스티안 5세의 말을 들어보니, 그리고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을 보니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그 정도가 심한 것으로 보이긴 했고.
그러나 지금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이 소년이 별다른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전생처럼 크리스티안 5세의 뒤를 이어 덴마크-노르웨이의 왕위를 이어받게 될 테고, 차후 덴마크의 국왕이 북미왕국에 우호적인 것은 오히려 반길 일이라 정성국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아하. 그래서 기회가 왔을 때, 구경해보겠다? 헌데 일단 검차는 여기 없어서 그 요청은 들어주기 어려울 것 같고...”
이에 프레데리크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급히 반문했다.
“예? 어제 이곳에 올 때, 분명 저 밖에 검차가 여러 대 있었는데...”
전차와 장갑차가 공식적으로 양산된 것은 얼마 되지 않기도 했고, 북미왕국에서 전차와 장갑차에 대해 시시콜콜 떠들 이유도 없었기에, 아직 유럽인들은 전차와 장갑차를 그저 검차로 인식하고 있었다.
해서 프레데리크가 자신의 말에 반문하자, 정성국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아. 저 바깥에 배치된 것들은 전차와 장갑차라고, 검차와는 조금 다른 거야. 굳이 따지자면 검차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녀석들이라고 해야 하나?”
“헉! 그럼 더 좋습니다!”
한때 세계에서 손가락에 들 정도로 강력한 국가로 알려진 청나라였고, 이 청나라의 정예 병력을 순식간에 격파한 것이 바로 북미왕국의 검차였다.
물론 일부 지식인들은 검차보다는, 검차에 장착된 기관총이 대단한 거라면서 검차를 평가절하하곤 하지만, 기관총은 그 무게 때문에 일종의 소구경 대포와 비슷하게 운용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를 자유롭게 운반하고, 또 공격받을 걱정 없이 안전하게 발사할 수 있는 검차는 무척 대단한 기물이었다.
해서 프레데리크는 이 검차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 증기기관을 이용해 덴마크에서도 검차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머리를 굴렸고, 또, 증기기관을 연구하는 학자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때 덴마크의 기술 수준과 북미왕국의 기술 수준이 무척 차이가 난다는 사실에 낙담하기도 했었고.
헌데 북미왕국은 어느덧 검차를 운용하며 부족한 부분을 파악하고 한 단계 더 나아간 기물을 개발했다는 사실에 프레데리크가 무척 흥분하며 급히 대답하자, 정성국은 그런 프레데리크의 반응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헌데 전차든, 장갑차든, 지금은 외곽 경비에 모두 투입되어 임무를 수행 중이라서 말이야. 네가 원하는 것처럼 탑승해보는 것은 어려워. 단순히 가까이서 외부를 보는 것이라면 모를까.”
“아...”
아쉬운 감정이 가득 담겨 있는 프레데리크의 탄식에 정성국은 애를 그만 놀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바로 입을 열었다.
“대신, 전선의 탑승은 가능하니까 일단 오늘은 1만 톤급 전선을 둘러보고, 나중에 전차...는 좁고 위험해서 좀 그렇고, 장갑차에 탑승하는 것이 어떨까 싶은데?”
“아...나중이요? 알겠습니다. 그래도 1만 톤급 전선을 구경할 수 있게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외로 프레데리크는 정성국의 예상과는 반대로 꽤나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프레데리크의 반응에 정성국은 고개를 갸웃했다가, 곧 그가 자신의 말을 나중에 북미왕국을 방문하면 장갑차를 태워주겠다는 것으로 알아들었음을 눈치채고 웃음을 터트렸다.
“음? 하하하. 뭐 착각한 모양인데, 장갑차 탑승도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 없을 거야.”
“예?”
“결혼식이 끝나고 나서 잠시 관광차 덴마크에 들를 생각이거든. 그러니 그때 탑승해보도록 해.”
“헉! 정말 감사합니다!”
이에 프레데리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기뻐했고, 그런 프레데리크의 반응에 하얀 들꽃이나 샤를로테, 울리카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잘 되었다고 축하해 주었고.
정성국 옆에 있던 크리스티안 5세는 슬쩍 상체를 기울여 정성국에게 가까이 다가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무리한 부탁을 받아줘서 고마워. 그동안 저 녀석이 하도 난리를 쳐대서 곤란했었거든. 특히, 북미왕국의 전선과 검차의 이야기를 듣고 직접 만들어 보겠다고 증기기관을 연구하는 학자들과 기술자들을 들들 볶기도 했었어서...”
크리스티안 5세는 프레데리크에게 꽤나 시달렸는지 투덜거렸지만, 정성국은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니야. 저 나잇대의 남자애들이 군사 무기에 관심을 두는 거야 뭐,,,그보다 아침도 대충 먹었으니 난 바로 일어나야겠다.”
정성국은 수저를 내려놓고 이렇게 이야기하자, 크리스티안 5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응? 티타임도 안 갖고 바로 일어나게? 뭐하려고?”
“신성로마제국의 사절단 대표와 의논할 일이 조금 있어서.”
“신성로마제국과? 어라? 그러고 보면 신성로마제국은 한창 정신없을 텐데 어떻게 사절단을 파견한 거지?”
크리스티안 5세가 아는 바론, 현재 신성 동맹과 오스만 제국 간의 전쟁은 겨울이라 잠시 소강상태에 들었을 뿐이었고.
그렇기에 신성로마제국은 이번 결혼식에 축하 사절단을 보낼 정신도 없으리라 판단했는데, 개인 자격으로 참가한 신성로마제국의 귀족뿐만 아니라, 레오폴트 1세가 보낸 정식 사절단이 있어서 조금 의외긴 싶었다.
해서 크리스티안 5세가 흥미를 보이자 정성국이 입을 열려다 다시 다물고 잠깐 생각에 잠겼고.
“흠...”
“아. 중요한 일이라면...”
굳이 말할 필요 없다고 이야기하려는 크리스티안 5세의 말을 정성국이 끊으며 말했다.
“뭐 중요한 일이긴 한데, 어차피 거의 결정이 난 문제고, 곧 유럽에도 널리 알려질 테니 굳이 숨길 필요는 없겠지.”
“응?”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는 크리스티안 5세를 보고 정성국이 대답했다.
“신성로마제국을 비롯한 신성 동맹은 이번 전쟁을 계속해 하고 싶지 않아 하더라고. 그래서 네덜란드에 주재하는 북미왕국 대사관을 통해 우리에게 중재해줄 수 없느냐고 물었고.”
“헉. 그게 정말이야?!”
“응. 이번 전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의 피해가 꽤 커서 그런지 얀 3세도 발을 빼고 싶어 하고, 레오폴트 1세는 빈 인근에서 또다시 공방전이 벌어지는 것은 피하고 싶어하니 어쩌겠어.”
“아...”
크리스티안 5세도 이번에 결성된 신성 동맹에서 레오폴트 1세와 얀 3세의 발언력이 높다는 것을 알기에, 정성국의 설명에 신성 동맹의 속사정을 파악하고 탄성을 질렀고.
크리스티안 5세가 적당히 상황을 이해한 것 같자 정성국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해서 오스만 대사를 통해 오스만 제국의 의중을 확인해봤는데, 오스만 제국 역시 이번 전쟁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것은 조금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더라고.”
“어? 그래? 한창 오스만 제국의 기세가 매섭다고 들었는데?”
“그렇긴 한데, 공세와 방어전은 다르고, 야전과 공성전은 또 다르잖아? 거기에 빈을 함락시키려고 무리하다 큰 피해라도 보면 다시 신성 동맹군이 헝가리 지역을 노릴 테고. 해서 오스만 제국은 신성 동맹에서 적당히 체면을 세워주면 전쟁을 끝내고 싶어 했지만, 현 상황에서 신성 동맹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해 진격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우리가 중재에 나설 수 있다고 하니 무척 좋아하더라고.”
이에 크리스티안 5세는 조금 묘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이었다면, 분명 오스만 제국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빠르게 외교적인 협상으로 전쟁을 끝내려 하지 않았을 테니까.
더불어, 신성 동맹 역시 약세를 보였다간 오스만 제국이 더 밀어붙일 거라는 불안감에, 그리고 오스만 제국과 휴전 조약을 맺는 것이 이슬람에 대한 가톨릭의 패배라고 생각해, 어지간하면 전쟁을 계속하려 했고.
헌데 양 진영이 어느 정도 믿고 중재를 맡길 수 있는 북미왕국의 존재로 인해, 이번 대규모 전쟁은 예상외로 빠르게 끝날 것 같자, 북미왕국 같은 나라가 진작에 존재했다면, 유럽은 조금 더 평화롭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크리스티안 5세는 기분이 오묘했다.
더불어, 어제 연회를 보아하니, 정성국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정성국과 친분을 쌓기 위해 이곳에 온 귀족들은 북미왕국의 강력함을 확실히 깨달은 듯싶었고, 덕분에 저들이 자국으로 돌아가면 북미왕국의 영향력은 더욱 커질 테고, 또 그동안 북미왕국과 공식적으로 외교 관계를 맺지 않은 나라마저 북미왕국과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을 것 같았다.
헌데 이렇게 되면 수많은 유럽의 전권 대사들이 유럽이 아닌 저 멀리 새한성에 모일 테고, 그러면 유럽 국가들은 전쟁 대신 외교적으로 분쟁을 해결할 수도 있어 보여, 북미왕국의 존재로 전쟁이 가득했던 유럽에 꽤 긴 평화가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크리스티안 5세는 정성국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그런 크리스티안 5세의 시선에 정성국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아. 아냐. 그보다 오스만 제국의 반응이 그렇다면...”
“그래. 해서 여기 오기 전에 네덜란드에 주재하는 북미왕국 대사에게 이미 훈령을 내렸는데, 레오폴트 1세가 급한 모양인지 나한테도 추가로 사절단을 보낸 모양이야. 그러니 이를 알려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야겠지. 그 후엔, 프랑스 사절단, 잉글랜드 사절단과도 이야기를 해야 할 테고...”
원래 정성국은 귀족들에게 시간을 뺏기기 싫어 연회를 열긴 했지만, 이번에 참석한 이들 가운데는 개인적으로 참석한 것이 아니라 한 나라를 대표해 방문한 이들도 있었고, 이런 이들의 알현 요청은 양국의 관계 때문에라도 거부하기 어려웠기에 정성국은 시간을 따로 낼 수밖에 없었고.
이를 이해한 크리스티안 5세가 피식 웃으며 정성국을 놀리듯 말했다.
“천상 저녁 연회에나 얼굴을 보겠는데? 그럼 나도 아들 녀석을 따라서 1만 톤급 전선을 구경이나 할까?”
“어휴. 마음대로 해라.”
* * *
아침부터 오후까지는 각국의 사절단들과, 저녁에는 귀족들에게 시달린 다음 날, 정성국은 하얀 들꽃과 함께 자동차를 타고, 그리고 크리스티안 5세와 샤를로테, 울리카는 덴마크에서 가져온 화려한 마차를 타고 북미왕국의 호위 병력과 함께 결혼식이 열리는 룬드로 이동했다.
정성국은 자신을 보기 위해 말뫼 항으로 이동한 귀족들이 많기에, 이들이 다시 식장으로 이동하느라 길이 막히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았다.
스웨덴 측에서도, 그리고 북미왕국에서도 결혼식이 열리기 한 시간 전부터 도로를 통제한다고 알렸기에, 미리 움직이거나, 혹은 정성국이 연 연회에 참석해 정성국과 인사를 나눴기에 만족하고 돌아가거나 말뫼 항에서 정성국을 다시 기다렸기에.
덕분에 정성국이 탄 자동차와 크리스티안 5세가 탄 마차는 빠르게 룬드로 이동할 수 있었고, 곧바로 결혼식장으로 이동했다.
이 룬드에는 조그마한 성당이 있었는데, 원래는 이 성당 안에서 결혼식이 열리기로 되어 있었지만, 정성국의 참석으로 수많은 귀족이 몰리면서 도저히 이 조그마한 성당에서는 결혼식을 열 수 없었고.
해서 스웨덴에서는 성당 인근의 공터를 꾸며 식장으로 만들었는데, 오히려 정성국은 그 모습이 전생의 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야외 결혼식장 같았기에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그리고 정성국과 함께 신부도 도착했고, 칼 11세 역시 오늘 아침에 식장에 도착했으며, 시간도 되었기에 바로 결혼식이 시작되었고.
이를 지켜보던 정성국은 옆에서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얀 들꽃에게 속삭였다.
“뭘 그렇게 흐뭇해해?”
“저 둘을 보세요. 무척 행복해 보이잖아요? 그러니 어찌 흐뭇해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하하하. 그렇긴 하네. 그보다 생각외로 결혼식은 간단하네? 조금 기대했는데...”
잠깐 사이에 결혼식의 끝을 알리는 칼 11세와 울리카의 입맞춤을 보면서 정성국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하얀 들꽃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굳이 예식을 길게 할 필요 있나요?”
“그렇긴 한데...”
정성국이 표정을 조금 흐리자 이에 하얀 들꽃은 정성국이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이해하고 빙긋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아. 결혼식 후에 스웨덴 왕실에서 여는 축하연 때문에요? 어쩌겠어요. 조금만 더 고생하세요. 전하.”
“...어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