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7
겨우 정성국이 개최한 연회의 초대장을 확보한 유럽의 귀족들은 해가 지기 시작하자 북미왕국의 왕실기인 흰머리수리 깃발이 펄럭이는 왕실 여객선에 탑승하기 위해 왕실 여객선이 정박하고 있는 선착장으로 몰려들었고, 이는 겨우 초대장을 확보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사절단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호위대원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선착장을 통과한 사절단의 귀족들은 왕실 여객선에 올라 선원들의 안내를 받고 이동하다 탄성을 질렀다.
“오! 이것 좀 보시지요!”
여객선 내부는 수많은 전등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어 무척 밝았기에, 그동안 소문으로만 들었던 북미왕국의 전깃불을 접한 사절단의 귀족들은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호오. 이게 그 유명한 북미왕국의 전깃불이로구려.”
“허. 확실히 무척 밝군요. 그리고 일렁이지도 않고.”
“예. 덕분에 창문 하나 없는 이곳이 이렇게 밝을 정도이니...”
“뭐랄까. 북미왕국의 도시들은 밤에도 대낮처럼 환해 북미왕국의 백성들은 늦은 밤에도 바깥을 나돌아다닌다는 말이 너무 과장된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는데, 이 전깃불을 보니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다들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을 발하는 전등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사절단의 대표인 그라프가 이렇게 이야기하자 주변의 귀족들이 공감하는 얼굴로 맞장구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특히, 듣기로는 도시에 사는 모든 백성은 이 전깃불을 이용한다던데...조금 부럽군요. 밤에도 책 보기에 딱 좋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흠. 증기기관도 증기기관이지만, 이 전기를 다루는 기술이 참으로 대단한 기술인 것 같은데...”
한 중년 귀족의 말에 그라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지요. 해서 이전에 북미왕국과 교류한 서유럽 국가들은 학자들을 통해 증기기관뿐만 아니라 이 전기 기술을 파악하기 위해 애를 썼다고 하더군요. 다만, 증기기관이야 예전부터 연구하던 이들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지만, 전기 기술은 도무지 파악이 안 된답니다.”
이에 중년 귀족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그래도 서유럽 국가들은 북미왕국에 외교관들을 상시 파견해 두었으니...”
북미왕국의 전기 관련 기술들을 훔치면 되지 않느냐고 이야기하려던 중년 귀족은, 이곳에 듣는 귀가 많다는 생각에 급히 목소리를 죽였고.
그런 중년 귀족의 반응에 다른 귀족들도 급히 주변을 살핀 후, 아무도 자신들의 말을 들은 것 같지는 않았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년 귀족을 보고 목소리를 죽이며 타박했다.
“그들을 통해 북미왕국의 전기 기술을 빼돌린다고요? 뒷감당은 어쩌려고요. 지금 경은 방금까지 북미왕국의 대규모 함대와 정예 병사들을 직접 보고도 그럴 마음이 드십니까? 그것도 국왕의 호위 때문에 가볍게 움직인 병력이 이 정도인데?”
“아...”
예전에 일어났던 대프랑스 전쟁과 이번 대투르크 전쟁을 통해, 북미왕국의 무기가 얼마나 위력적인지는 널리 알려졌고.
그 때문에 유럽의 귀족들은 그동안 알려진 북미왕국의 무기들에 대한 정보를 확보하는 데 열성을 다했다.
그렇기에 현재 북미왕국의 커다란 배에서 하역되는 커다란 철 상자가 검차라는 것이나, 호위대원들이 들고 있는 소총이 신식 소총보다 더 좋은 성능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갑오 소총이라는 것, 그리고 호위대원들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단총이 연발로 사격할 수 있다는 회전 단총이라는 것까지 파악할 수 있었고.
이는 아무리 북미왕국의 국왕인 정성국을 호위하는 병력이다 보니 무장이 충실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자신들의 예상을 가볍게 벗어난 수준이었고, 이 호위 병력을 보고 북미왕국의 군사력 역시 자신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 이런 북미왕국과 감히 적대할 나라가 있겠느냐는 한 귀족의 말에 중년 귀족은 말문이 막혔고.
그때 그 옆에 있던 노년 귀족이 입을 열었다.
“허나, 제가 듣기로 최근에 여러 나라에서 북미왕국과 협의해 유학생들을 보냈다고 하던데...”
작년에 유럽 각국이, 특히 몇몇 국가들은 군주가 직접 북미왕국에 친선 사절단을 이끌고 방문했다는 사실과 이때의 일로 일부 국가들이 북미왕국에 유학생을 보내 북미왕국의 학문을 배울 길이 열렸다고 알려졌기에 노년 귀족이 이를 언급하자, 다른 귀족들은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북미왕국의 학문이 뭐 그리 대단하길래 저러나 싶었지만, 실제 두 눈으로 확인해보니 장난이 아니라 아차 하는 표정을 짓자 그라프가 고개를 저었다.
“아. 북미왕국은 공학기술 계열의 학문은 타국의 백성들에게 가르치지 않는답니다. 예외로 두는 것이 건축 기술 정도라고 하더군요.”
“그래요? 그러면 북미왕국과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는다 하더라도, 이 전기 기술은 얻지 못하는 겁니까?”
“아마 그럴 겁니다. 북미왕국의 동맹국들도 전기 기술만큼은 얻지 못했다고 하니까요.”
그라프의 대답에 노년 귀족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전등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쉽군요.”
“예. 뭐 아쉽긴 한데, 어쩌겠습니까. 북미왕국이 전기 기술은 함부로 개방하지 않는 것을요.”
그때 한 젊은 귀족이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그리고 전기 기술이 신기하기는 한데, 중요한 것은 증기기관 기술 아닙니까?”
이들은 전등을 비롯해 냉장고, 전화 등, 전기를 이용하는 전기기기들을 일부 알고는 있었지만, 빠르게 연락을 전달할 수 있는 전화를 제외하면, 그 외에는 있으면 편하고 좋겠지만, 그렇다고 없어서 큰일 날 정도는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렇기에 젊은 귀족의 말에 그라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예. 북미왕국과 교류하던 나라들이 증기기관을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더 깊은 곳에 묻혀 있는 광물을 캐낼 수 있게 되어 광산의 생산성이 좋아지고, 덕분에 그동안 전쟁으로 엉망이 되었던 경제가 되살아날 정도라고 하니까요.”
“맞습니다. 일단은 증기기관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지요. 그리고 그러려면, 이번 기회를 잘 노려야 하는데...”
말을 흐리고 주변을 둘러본 젊은 귀족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연회가 시작된 것은 아니었기에, 연회장에는 유럽의 귀족들만 바글바글했기에.
“후우. 연회다 보니, 깊은 이야기를 하지 못할 것 같아 그게 조금 아쉽습니다.”
이에 사절단의 귀족들이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움을 표하고 있을 때, 그라프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입을 열었다.
“뭐 어쩔 수 없지요. 다만, 이번 기회에 북미왕국의 국왕 전하와 친분을 쌓거나 눈도장이라도 찍어두기라도 하면, 이후에 쉽게 협상할 수 있을 테니 그것만 노려야지요.”
그때 그동안 침묵하고 있던 라파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마디 했다.
“글쎄요. 저희처럼 생각하는 귀족들이 한둘이 아니라 그게 어디 쉽겠습니까.”
“끙...”
* * *
초대장을 받은 귀족 대부분이 연회장에 도착했다는 보고에, 정성국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연회장으로 이동했고.
정성국의 등장을 알리는 외침에 그때까지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하느라 무척 소란스럽던 연회장은 순간 고요해졌다.
그리고 문이 열리며 정성국이 등장하자, 유럽의 귀족들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알려진 북미왕국의 군주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경의를 표했고.
이에 정성국은 ‘이게 권력의 맛이구나.’ 같은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면서 연회장 한쪽에 마련된 단상에 올라 선원이 건네준 송화기를 입에 가져다 대고 말했다.
“아. 아. 다들 고개를 드세요.”
정성국의 말이 송화기를 통해 전기 신호로 변환되고, 이 전기 신호가 전선을 타고 연회장 한쪽에 있는 커다란 수화기, 그러니까 일종의 스피커를 통해 증폭되어 전달되자 유럽의 귀족들은 정성국의 우렁찬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어 정성국을 바라보았고.
이에 정성국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 놀랄 것 없습니다. 제 목청이 큰 것이 아니라 기물 덕분에 크게 들리는 거고...뭐 북미왕국의 기물 중엔 신기한 것들이 많다는 것은 다들 알잖습니까?”
“하하하.”
정성국의 너스레에 유럽 귀족들은 웃음을 터트리면서도, 북미왕국의 기술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그런 귀족들의 반응에 정성국이 연회의 시작을 알리듯 단상 한쪽에 자리한 음악가들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원래 내가 이 먼 곳까지 방문한 것은 북미왕국의 두 동맹이 그동안의 앙금을 털어내고, 혼인 동맹을 통해 새롭게 출발하는 것을 축하하기 위함이었지, 연회를 열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곳에 도착하고 보니 이번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먼 길을 이동할 정도로 덴마크, 스웨덴과 우호적인 귀족들이 무척 많아, 결혼식이 끝나고 열리는 잠깐의 연회를 통해 여러분들과 제대로 된 친분을 쌓기는 어렵다는 생각에 급히 연회를 열었으니, 미흡한 점이 있더라도 너무 책하지 말고 즐겁게 즐겼으면 합니다.”
정성국의 말이 끝나자 음악가들은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정성국은 들고 있던 송화기를 선원에게 다시 건네고 단상을 내려와 자신에게 몰려드는 귀족들의 인사를 받고, 받고, 또 받았다.
그리고.
“아하. 그렇군요. 허나 지금 이 자리에서 그 건을 논의하는 것은 조금 곤란하니...차후에 다시 논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결혼식과 연회가 끝나고 나면 따로 시간을 만들어 보거나, 아니면 네덜란드에 주재하는 북미왕국 대사에게 따로 이야기해두리다.”
“알겠사옵니다. 국왕 폐하.”
“전하. 소신은 폴란드의...”
인사를 하며 각종 요청이나 제안을 하는 귀족들에겐 적당히 얼버무렸지만, 이러한 요청과 제안은 끝이 없었고.
해서 정성국은 입가엔 미소를 지으며 귀족들의 말을 경청하는 모습을 취하면서도 은근슬쩍 잠깐이라도 쉴 방법이 없나 고민했고, 때마침 크리스티안 5세와 덴마크 귀족들이 뒤늦게 연회장으로 들어오자 정성국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열변을 토하고 있는 신성로마제국의 한 귀족에게 양해를 구하며 잽싸게 크리스티안 5세에게 이동했다.
“여. 무척 바쁜데?”
이에 정성국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크리스티안 5세가 덴마크 귀족들을 다른 귀족들과 이야기하라고 보냈고, 주변은 호위대원들이 공간을 만들었으며, 다른 귀족들은 국왕끼리 대화하는 데 끼어들기 애매해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었기에 바로 속내를 털어놓았다.
“어휴. 죽겠다. 아주. 특히 뭔 놈의 투자 요청이 이리도 많은지...”
그런 정성국의 투덜거림에 크리스티안 5세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큭큭큭. 그건 어쩔 수 없어. 넌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로 알려져 있고, 네가 왕실 상단을 움직여 유럽 각지에 투자했다는 사실이 유럽 내에 널리 알려졌기에, 자신의 영지를 부흥시키려는 계승 귀족들이 너를 만나기 위해 꽤 많이 몰려들었거든.”
“쩝. 어쩐지...”
처음에는 대부분이 사절단에 속한 귀족들이라, 당연히 정성국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주로 국가 간의 외교적 문제를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이보다는 자신의 영지에 투자하길 원하는 이들이 많아 상황을 짐작한 정성국이 크리스티안 5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을 때, 크리스티안 5세가 덧붙여 말했다.
“거기에 최근에 유럽의 군주들은 절대 왕권을 지향하면서 계승 귀족의 세력을 꽤나 견제하고 있거든. 그래서 계승 귀족들은 무척 위기감을 느끼고 있고. 그러니 어떻게든 네 투자를 받아 세력을 키우려는 거야.”
이에 정성국은 귀족들과 대화하는 동안 깨달은 공통점을 떠올리고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쯧. 짐작은 했지만, 역시 그래서 필사적이었나.”
그리고 북미왕국에 무척 좋은 조건으로 제안한 귀족들이 꽤 있어, 대부분의 제안을 대충 흘리면서도 일부 귀족들은 눈여겨보고, 나중에 따로 협상하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했던 정성국은 잘못하면 각국의 정치 문제와 얽힐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단은 거리를 두고 모든 협상은 외무청에 맡겨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크리스티안 5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지. 거기에 네가 끌고 온 호위 함대나 호위 병력을 보면, 북미왕국의 국력을 대충 짐작할 수 있으니, 너랑 연줄을 쌓아 두면, 차후에 가문을 보전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는 것 같고. 그래서 열심히 딸들을 너한테 소개한 것 아니겠어? 뭐 넌 별로 관심 없어 보이긴 하지만 말이야.”
크리스티안 5세의 말마따나, 이번 연회에 참석한 유럽의 귀족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딸들을 대동했다.
만약 정성국의 눈에 들기라도 하면, 정식으로 혼인을 하지 않더라도, 북미왕국의 영향력을 이용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정성국이야, 그녀들이 정나리와 몇 살 차이 나지 않다 보니, 오히려 꺼려져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지만 말이다.
“나야 아라와 하얀 들꽃만으로도 충분하기도 하고, 쟤들이 다 나리와 비슷한 나잇대다 보니 조금...”
“하하하. 그렇긴 하겠네. 다만, 괜찮은 여아가 있으면, 며느릿감으로 삼아도 되지 않겠어?”
이에 정성국은 고개를 저었다.
“난 딱히 아이들의 혼사에 관여할 생각이 없는데?”
“글쎄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울리카가 그렇게 나이를 먹은 것을 생각해보면...”
“윽...”
크리스티안 5세의 말에 정성국은 움찔했지만, 일단 정안문이나 정나리의 나이는 젊은 편이라 기회를 주기로 마음먹고 어깨를 으쓱했고.
이에 크리스티안 5세는 어차피 그 부분은 북미왕국 왕실의 일이니만큼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들고 있던 와인을 마시며 주변을 살펴본 후 입을 열었다.
“그보다, 적당히 숨 돌렸으면 바로 가라. 저 친구들이 나를 째려보는 것을 보니, 내가 널 독점하긴 어렵겠다.”
크리스티안 5세의 말처럼, 유럽의 귀족들은 다들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시선은 정성국과 크리스티안 5세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기에, 정성국은 겉으로 웃으며 입가를 손으로 슬쩍 가리고 투덜거렸다.
“젠장. 아. 그러고 보면 울리카나 네 가족들은?”
“막 도착하긴 했어. 다만, 결혼식 전까지 신부는 조신히 신방에서 지내야 하니, 울리카와 샤를로테는 바로 선실로 이동했지. 그리고 프리데리카를 데려오긴 했는데, 여기에 데리고 와봐야 잠깐 얼굴을 보는 게 다일 것 아니야? 그래서 놓고 왔지.”
“아. 그럼 내일 아침에 같이 식사하면서 보면 되겠구나. 알겠다. 그럼 난 간다.”
“오냐. 고생해라.”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