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776화 (776/850)

#776

북미왕국의 호위 함대가 선착장에 도착했다고 정성국이 바로 하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호위 병력이 먼저 하선해 주변을 장악하고 안전을 확보한 이후에나 움직일 수 있었고.

그렇기에 정성국은 다시 선실에 들어가 하얀 들꽃과 함께 쉬고 있다가, 김봉길과 호위대장이 보고를 위해 선실을 방문하자 바로 불러들여 보고를 받았고, 정성국은 김봉길의 보고에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흠. 선착장의 시설이 생각보다 괜찮아서, 금방 병력과 장비, 물자들을 하역할 수 있을 줄 알았더니...빨라야 내일 오후에나 하역이 끝날 것 같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혹시나 해서 미리 스웨덴에 요청해 말뫼 항의 선착장을 추가로 건설하긴 했지만, 시일이 짧아서 그런지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라서 말입니다. 거기에 전차와 장갑차 등을 내리는 것은 조심해서 작업해야 하니...”

외무청은 정성국이 직접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 때문에 미리 스웨덴 측과 수많은 논의를 했었고, 그중에는 북미왕국의 호위 함대가 정박할 선착장의 확보도 있었다.

그리고 기존의 선착장만으로는 북미왕국의 대형 선박이 정박하기 어려웠기에, 스웨덴에서는 북미왕국의 요청대로 간격이 더 넓고, 커다란 선착장을 새롭게 건설해야 했고.

덕분에 북미왕국의 대형 선박들이 정박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대형 선박들이 정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시간이 촉박한 탓이었고.

그러니 대형 선박들은 차례대로 병력이나 물자 등을 하역해야 했으니 아무래도 시간이 꽤 걸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아무리 스웨덴에서 튼튼하게 선착장을 건설했다고는 하나, 무거운 전차나 장갑차의 무게를 생각하면, 불안한 것이 사실이라 조심히 작업해야 하기도 했고.

김봉길의 보고에서 이를 이해한 정성국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직 북미왕국 항구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항만 시설이 열악한 만큼, 제대로 된 항만 시설이 갖추지 못한 지역에도 빠르게 물자를 수송할 수 있는 선박을 건조하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했다.

‘선수에 대형 출입문을 단 일종의 상륙함을 건조하면 되려나? 뭐 주명이에게 대충 개념을 던져주고 연구시키면 되겠지. 그보다 이를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것을 보면...김봉길이나 군사청의 생각대로 장거리 원정 경험이 부족하긴 하구나.’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정성국은 지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김봉길과 호위대장의 시선을 느끼고 생각을 멈추며 대답했다.

“사정이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긴 한데...그럼 내일 오후에 바로 움직여야 하나?”

이에 김봉길이 보고하는 동안 가만히 있던 호위대장이 입을 열었다.

“전하. 굳이 일찍 룬드에 가실 필요가 있습니까? 룬드에는 제대로 된 숙소가 없어서 그곳에서 지내시긴 무척 불편하실 겁니다. 더불어 안전 문제도 있고요. 그러니 모레 아침에 룬드로 이동하시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이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하얀 들꽃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건...결혼식 당일에 이동하자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어차피 결혼식 전에는 별다른 일정도 없고, 이곳에서 룬드까지는 넉넉잡고 1시간이면 이동할 수 있으니까요.”

이 말뫼 항에서 결혼식이 열리는 룬드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고, 비록 포장된 도로는 아니지만, 도로가 존재하긴 했다.

그러니 가져온 자동차를 타고 이동한다면, 아무리 천천히 이동해도 1시간이면 충분하다고 판단한 호위대장이었고, 그런 만큼 굳이 일찍 룬드에 가는 것보다는 이곳에서 머물다 결혼식 당일에 움직이는 것이 여러모로 낫다고 판단했다.

더불어 그렇게 가까운 만큼, 결혼식 이후 며칠간 열릴 연회에 참석하더라도, 잠은 왕실 여객선에서 자는 것을 권하기도 했고.

이에 하얀 들꽃이 정성국을 바라보자, 정성국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흐음...아. 그러고 보면 크리스티안 5세나 칼 11세는?”

“크리스티안 5세나, 칼 11세 모두 아직 룬드에 도착하지 않은 듯싶고, 이들 역시 내일이나 모래인 결혼식 당일에나 도착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제일 처음으로 하선한 탐사대 일부는 이미 룬드로 이동해 경계를 서며 이곳으로 현 룬드의 상황을 보고해왔고, 그렇기에 룬드에 아직 크리스티안 5세나 칼 11세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호위대장이 이렇게 대답하자, 정성국은 바로 결정을 내렸다.

“아. 그래? 그렇다면야...굳이 룬드에서 머물 이유가 없군. 알겠네. 자네 말을 따르도록 하지.”

정성국이 혹여 룬드로 이동한다는 결정을 내리면, 정성국의 안전을 위해 호위 병력을 재편성해야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에 호위대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 문득 보고할 일이 하나 남았고, 이 보고를 정성국이 무척 귀찮아할 것 같다는 생각에 슬쩍 그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하옵고...왕실기를 통해 전하께서 이 배에 머무신다는 것을 알게 된 타국의 귀족들이 전하께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계속 요청하고 있는데 어쩔까요?”

이에 정성국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고, 하얀 들꽃은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귀찮으시겠지만, 받아들이셔야 해요. 아시죠?”

“쩝...알아. 뭐 아국에 우호적인 귀족이 많아지면, 아국의 영향력이 더욱 확대될 테니 무시할 수는 없지. 다만, 지금부터 결혼식, 아니, 끝나고 연회 때까지 수많은 귀족들에게 시달릴 생각을 하니 한숨만 나오는데...”

정성국이 투덜거리자 하얀 들꽃은 잠깐 고민하다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럼 이러시는 것은 어떠세요? 아예 연회를 열고 귀족들을 초대하는 거죠.”

“연회? 왕실 여객선에서?”

“예. 어차피 1층에 연회를 열 수 있는 커다란 연회장이 있잖아요? 그리고 물자야 충분하고...귀족들을 따로따로 만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하얀 들꽃의 말에 정성국은 잠깐 생각해보았지만, 확실히 지금부터 내일 저녁까지 계속해서 여러 귀족들과 계속 만나는 것보다는 모든 귀족들을 한 번에 불러 만나는 것이 나아 보였기에 손가락을 튕겼다.

“그거 좋은 생각이야. 호위대장?”

“알겠습니다. 바로 연회를 준비하고, 이를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네.”

* * *

정성국이 배에서 연회를 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혹시 정성국을 알현할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말뫼 항에서 대기하던 여러 귀족들은 쾌재를 불렀고.

더불어, 정성국이 대규모 호위 함대와 함께 말뫼 항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달받은 후 말뫼 항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미리 룬드에서 대기하고 있던 귀족들 역시, 이 소식을 뒤늦게 전달받고 급히 마차나 말을 타고 말뫼 항으로 달려왔기에 말뫼 항은 무척이나 북적거렸다.

이에 정성국은 생각보다 일이 커지는 것 같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그때 호위대장이 급히 정성국에게 다가와 크리스티안 5세가 도착했다는 말을 전하자, 정성국은 급히 되물었다.

“뭐? 나중에 온다고 하지 않았어?”

“외무청이나 정보기관의 예측이 틀렸거나...아니면 전하께서 도착하셨다는 보고를 받고 일정을 변경한 듯싶습니다.”

이에 정성국은 이곳 말뫼 항에서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까지의 거리가 얼마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수긍했다.

“아...그러고 보면 여기서 코펜하겐까지는 무척 가깝지? 아무튼, 잘됐네. 바로 이곳으로 안내하게.”

“알겠습니다. 전하.”

잠시 후, 문이 열리며 크리스티안 5세가 응접실로 들어오자, 의자에 앉아 있던 정성국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반겼다.

“여. 오랜만이네.”

“하하하. 그래. 오랜만이야.”

크리스티안 5세는 정성국에게 다가와 악수를 하고 정성국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헌데 생각보다 일찍 왔네?”

“뭐 하늘길이나 바닷길이나, 기상이 갑작스레 악화되면 이동하기 힘들어지니 일정에 조금 여유를 둔 거지. 그리고 여기 항만 시설이 생각보다 별로라, 호위 병력과 물자를 하역하는 데 시간이 꽤나 걸릴 것 같아서, 미리 이동한 게 다행이기도 하고.”

“어? 도대체 얼마나 많은 호위 병력을 대동하고 왔길래?”

물론 크리스티안 5세는 보고를 통해서나, 그리고 직접 말뫼 항에 도착하고 나서, 30척이 넘는 대규모 함대에 기겁하기는 했다.

그리고 북미왕국의 함대가 정박한 선착장 주변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북미왕국 병사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아 대체 정성국이 얼만하 많은 호위 병력을 데리고 왔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해서 크리스티안 5세는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정성국에게 묻자 정성국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 많이 대동한 것은 아니야. 기껏해야 1만 명이 조금 못 되니까.”

이에 크리스티안 5세는 새삼 질린 기색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덴마크는 재정적으로 궁핍하기도 하고, 또 북미왕국과의 동맹으로 타국에 침공받을 일이 없을 것으로 짐작되어 가장 먼저 군대의 규모를 축소하고 또 계속해서 축소해왔다.

덕분에 현재 덴마크는 약 5천 명 규모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을 뿐인데, 정성국은 1만 명의 병력을 호위 병력으로 끌고 다니니 새삼 국력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인지한 것이다.

“1만 명이라니...호위 병력치고는 너무 많은 것 아냐?”

“아무래도 내가 해외에 간다니까 청장들이 무척 불안한 모양이더라고. 이 정도 규모의 호위 병력이 아니라면 안심할 수 없다니 어쩌겠어. 그리고 이 기회에 아국의 장거리 원정 능력을 점검해 볼 기회이기도 했기에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었지.”

물론 크리스티안 5세는 동맹국의 군주였고, 정성국과 무척 친한 편이었지만, 굳이 이번에 대규모의 함대와 병력을 동원한 이유를 전부 설명할 이유는 없었기에, 정성국은 극히 일부 이유만 이야기했고.

다만, 이 때문에 크리스티안 5세는 오해했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며 물었다.

“장거리 원정 능력? 어디 침공이라도 하게?”

이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침공은 무슨. 가뜩이나 영토 관리하기도 어려운데 뭐하러 침공을 해서 일을 늘리겠어. 다만, 예전에 청나라가 동맹인 조선을 공격한 것처럼, 다른 나라들이 아국의 동맹국을 공격할 수도 있으니, 미리미리 대비하는 거지.”

그제야 크리스티안 5세는 표정을 풀고 그가 말뫼 항에 도착하고, 이 왕실 여객선으로 이동하기까지 목격한 북미왕국의 병사들을 떠올리고 너스레를 떨었다.

“어? 그렇게 이야기하니까...꽤 든든한데?”

“하하하.”

그렇게 잠깐 경직된 분위기가 다시 풀렸고, 이에 크리스티안 5세는 정성국을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감사의 뜻을 전했다.

“아무튼, 고마워. 이번 결혼식에 참석해 줘서.”

“뭐 내가 이번 결혼을 중매했으니...두 사람의 행복을 위해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이에 정성국은 그게 뭐 대수냐는 듯한 얼굴을 하긴 했지만, 크리스티안 5세는 정성국이 북미왕국을 다스리느라 무척 바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정성국이 이번 결혼식에 참석한 이유가 울리카의 기를 살려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기에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기는. 네가 바쁘다는 것을 내가 모르나. 그리고 칼 11세가 울리카와 결혼한다는 소식이 알려진 후, 스웨덴 귀족들이 울리카의 험담을 얼마나 했었는데. 입에 담기도 힘든 거지 같은 말을 말이야.”

크리스티안 5세가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갈자 정성국은 설마 했던 일이 정말 벌어졌기에 속으로 혀를 찼고.

그때 크리스티안 5세가 분노를 훌훌 털어버리고 정성국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헌데 네가 울리카와의 친분 때문에 결혼식에 참석한다는 소문이 퍼진 뒤로는? 울리카를 심하게 험담했던 스웨덴 귀족들은 칩거할 정도라고. 거기에 이번에 네가 대동한 호위 함대나 호위 병력을 보면 스웨덴 귀족들은 북미왕국의 강력함을 확실히 인지할 테니, 아마 울리카에 설설 길지도 몰라.”

“하하하. 그래서 울리카의 스웨덴 생활이 편해지면 나쁠 것 없겠네. 그보다 울리카는?”

“아. 물론 궁에 있지. 샤를로테와 함께.”

덴마크의 왕비와 함께 아직 코펜하겐에 있다는 말에 정성국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같이 안 온 거야?”

“응. 원래 결혼식 당일에 움직일 생각이기도 했고, 룬드든, 이곳 말뫼 항이든 제대로 된 숙소를 찾기가 어려워서...”

크리스티안 5세가 말을 흐리자 정성국이 말했다.

“이 배에서 머물면 되는데? 꼭 궁에서 마지막 추억을 쌓는 거라면 모를까.”

“어? 그래도 돼?”

“그럼. 상관없어. 남는 귀빈용 선실은 많고, 거기서 지내는 것이 썩 불편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하얀 들꽃이 울리카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기도 하고.”

이에 크리스티안 5세는 바로 결정을 내렸다.

울리카를 데려오기로.

마지막으로 궁에서 쌓을 추억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정성국, 그리고 하얀 들꽃과의 친분이었으니 말이다.

해서 크리스티안 5세가 말했다.

“그럼 바로 데려오게 배 한 척만 빌려주라.”

“아. 그러지 뭐.”

정성국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김봉길을 호출하기 위해 방문을 열었을 때, 크리스티안 5세는 배가 꽤 북적거린다는 생각에 질문을 던졌다.

“헌데, 배가 꽤 북적거리네?”

“아. 여기에 귀족들이 워낙 많고, 이들을 개별적으로 만나려면 시간이 너무 소요될 것 같아서...걍 여기서 연회를 열기로 했거든. 그 준비 때문에.”

이에 크리스티안 5세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아. 그래? 그럼 덴마크의 귀족도 불러와도 되지?”

“...어휴. 마음대로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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