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5
왕실 여객선에서 쉬고 있던 정성국은 목적지인 말뫼 항에 도착했다는 호위대장의 보고에 하얀 들꽃에게는 계속 쉬라고 이야기하고 선실을 나섰다.
그리고 갑판 위에 도착한 정성국은 점차 가까워지는 말뫼 항의 풍경을 바라보았고.
말뫼 항의 풍경은 그가 전생에서 그림으로만 보았던 근세 유럽 항구의 풍경과 무척 흡사해 보였기에, 정성국은 빙그레 미소짓다가 생각외로 큰 항구 규모에 나직한 감탄사를 터트렸다.
“허. 생각보다 항구가 큰 편이군?”
“일단, 스코네 지방이 덴마크의 영토였을 때는, 스코네 지방의 모든 물자가 집결하는 항구였고, 스코네 지방을 놓고 덴마크와 스웨덴이 전쟁을 벌였을 때는, 덴마크의 주요 보급 거점이었으니까요.”
정성국의 감탄에 이미 이 스코네 지역을 상세히 조사한 호위대장이 설명하자, 정성국을 돕기 위해 페로 제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정성국과 합류한 음흉한 여우가 덧붙여 말했다.
“다만, 새한성 조약으로 스코네 지방이 스웨덴의 영토가 되면서, 점차 쇠락하고 있다더군요.”
“어? 왜?”
정보기관에서 게으른 곰이 주로 국내 방첩 업무를 주로 맡아왔다면, 음흉한 여우는 해외 정보 수집을 도맡아 왔기에, 타국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정성국이 자세히 설명해보라는 듯한 눈빛을 주자 음흉한 여우가 바로 설명을 시작했다.
“저 말뫼 항의 성세가 유지되었던 것은, 스코네 지방의 물자 대부분이 말뫼 항으로 흘러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헌데 덴마크와 스웨덴의 전쟁으로 스코네 지방이 황폐해졌고, 스웨덴은 굳이 스코네 지방의 재건을 위해 투자할 생각이 없다 보니...”
“아. 스웨덴이 스코네 지방을 원한 것은 덴마크가 외레순 해협을 통제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을 뿐이라, 스코네 지방이 스웨덴의 영토가 되었으니 더는 신경 쓸 필요 없다...이건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의 백성들은 친덴마크 성향이 강해서, 스웨덴은 굳이 이 지역의 재건에 돈을 투자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모양이더군요.”
정성국은 음흉한 여우의 설명에 고개를 갸웃했다.
“흠. 그런 상황이면 오히려 이 지역에 더 투자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야 이 지역의 백성들이 마음을 돌리지.”
그리고 이런 정성국의 의견에 음흉한 여우는 확실히 정성국은 유럽의 군주들과는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생각에, 그리고 이런 자애로운 정성국의 방식이 북미왕국을 구성하는 무척 다양한 출신의 백성들이 별다른 불만 없이 화합해 살아가는 이유라는 생각에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그렇기는 합니다만...스웨덴의 생각은 또 달라서 말입니다.”
스웨덴은 북미왕국의 투자로 겨우 경제를 살려 고갈된 재정을 채우고 있었고, 그렇기에 투자하고 개발할 곳이 널렸는데 굳이 별다른 자원이 없는 이 스코네 지역을 안정시키겠다고 우선하여 개발하는 것보다는, 북미왕국에 수출할 광물이 많이 묻혀 있는 지역을 개발하는 것이 스웨덴의 입장에선 효율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스웨덴이 이 스코네 지역의 재건에 힘쓴다 하더라도, 정성국의 생각처럼 그동안 덴마크 왕실을 지지하던 이 스코네 지역의 백성들이 마음을 바꾸어 스웨덴 왕실을 지지할 것이라는 확신도 없었고.
그러다 보니, 스웨덴에서는 오히려 반스웨덴 정서가 만연한 이 스코네 지역을 의도적으로 황폐화하고 있다고 음흉한 여우가 설명하자, 정성국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쩝...뭐 타국의 일이니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문제는 아니긴 한데...”
덴마크가 이 스코네 지방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어떻게 보면 새한성 조약을 중재한 북미왕국 때문이었다.
헌데 이 스코네 지방의 백성들은 자신들을 덴마크인이라고 생각하고, 이 때문에 스웨덴에 핍박받는다고 하니, 정성국은 현지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그런 결정을 내려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생각이 들어 자그마한 죄책감을 느꼈고.
그런 정성국의 반응을 보고 음흉한 여우는 정성국의 속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한 모양인지, 정성국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급히 추가로 설명했다.
“그래도 이번 혼인 동맹으로 덴마크와 스웨덴의 관계가 개선되면, 덴마크와 스웨덴의 교류와 교역 규모가 커질 테고, 그럼 덴마크에서 가까운 스코네 지방이 자연스레 발전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이 스코네 지방의 주민들은 이번 결혼식을 무척 기뻐하고, 또 기대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정성국의 안색이 조금 나아졌다.
어차피 정성국은 같은 북미왕국의 동맹국인 덴마크와 스웨덴이 서로 투덕거려봐야 좋을 것이 없어 양국의 관계를 개선할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되면 이 지역의 주민들도 사정이 나아질 것 같았기에.
“그런가? 그나마 다행이로군.”
그렇게 정성국과 음흉한 여우의 대화가 일단락되었을 때, 정성국이 갑판에 나오자 바로 뒤따라 나온 김봉길이 말뫼 항을 가리키며 음흉한 여우에게 질문했다.
“헌데 쇠락하고 있다는 항구치고는 정박해 있는 배가 너무 많은데?”
그 말에 정성국은 다시 말뫼 항을 살펴보았고, 김봉길의 말대로 커다란 말뫼 항의 선착장에 범선들이 가득 정박해 있었기에 의외라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라? 그러네?”
이에 음흉한 여우가 손으로 정박한 범선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정박한 배들에 걸려 있는 깃발들을 잘 보시지요. 죄다 타국의 배잖습니까.”
그제야 상황을 짐작한 김봉길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이번 결혼식에 참석하는 하객들이 타고 온 배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원래 이번 결혼식은 무척 조촐하게 치러질 예정이었고, 참석 의사를 밝힌 하객들도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헌데 뒤늦게 전하께서 결혼식에 참석하신다는 것이 알려지자,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 거지요.”
원래 다른 나라들은 굳이 이번 결혼식에 사절단을 파견할 생각이 없었다.
이전이라면 모를까 북미왕국의 동맹이 된 이상, 타국을 침공하는 일은 불가능해졌고, 그런 만큼 굳이 사절단까지 파견하면서까지 공을 들여가며 두 나라와 외교적인 친분을 쌓을 필요가 없어졌기에.
허나 뒤늦게 북미왕국의 국왕인 정성국이 동맹인 양국의 화합을 축하하기 위해 결혼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상황은 변했다.
북미왕국의 국력을 생각하면, 정성국과 친분을 쌓을 좋은 기회를 져버릴 나라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하면, 북미왕국의 국왕을 먼발치서나마 볼 수 있고, 잘만 하면 말이라도 건네 친분을 쌓을 수 있는데, 이를 마다할 귀족도 없었기에 너도나도 사절단에 지원했고.
덕분에 수많은 귀족들이 이번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곳 말뫼 항에 몰려들었다는 이야기에 정성국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당분간 엄청 고생하겠구만...”
“하하하.”
* * *
이번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말뫼 항에 도착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사절단은 배에 싣고 온 축하선물들을 선원들이 배에서 하역하는 것을 선착장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주변이 소란스러워지자 무슨 일인가 싶었고.
곧 북미왕국의 함대가 말뫼 항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말에 급히 고개를 돌렸다가, 잘 안 보이자 다시 배에 올랐고, 갑판 위에서 말뫼 항으로 다가오는 북미왕국 함대의 모습에 압도되어 다들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러다 북미왕국 함대가 무척 가까워져 육안으로도 그 모습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게 되자, 사절단의 대표인 그라프가 감탄과 탄식이 섞인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허...저게 프랑스 해군을 격파하고, 사나운 해적들조차 벌벌 떤다는 그 북미왕국의 해군 함대인가...”
이에 다른 사절단의 일원들도 정신을 차리고 북미왕국의 함대를 관찰하며 한 마디씩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니 위용이 어마어마하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자세히 보면 함선의 숫자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니긴 한데...”
“가장 작은 배도 유럽의 최신 전열함보다 배는 커 보이고, 거기에 철선이잖습니까. 그러니 이렇게 멀리서 보기만 해도 압박감이 정말 대단하군요.”
“예. 저기 보이는 북미왕국의 군함 1척이 얼마나 강력한지 짐작이 가니...”
다들 북미왕국의 해군이 강력하다는 소문은 자주 들었다.
다만, 이들은 그동안 북미왕국과의 교류가 없었기에 유럽에 퍼진 북미왕국의 소문 중 상당수는 조금 과장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헌데, 지금 북미왕국의 함대를 보아하니, 오히려 유럽에 퍼진 북미왕국의 소문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다들 기가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그때, 북미왕국의 함대를 두려움과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사절단의 일원인 라파우가 입을 열었다.
“헌데, 북미왕국의 전선들은 동력을 이용해 움직인다 하더라도, 저 정도 크기의 배를 운용하려면 생각보다 많은 선원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아마도...그렇지 않겠습니까?”
옆에 있던 귀족이 고개를 끄덕이자 라파우가 심각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허면, 저 정도 규모의 함대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비용이 들어갈 것이 분명한데...정말 북미왕국은 단순히 북미왕국 국왕의 호위를 위해 저 대규모 함대를 유럽까지 파견한 것일까요?”
“어?!”
“잠깐만요. 그 말은...”
이들은 라파우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꺼낸 것인지 깨닫고 두려움과 놀란 표정이 섞인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을 때, 사절단의 대표인 그라프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북미왕국은 굳이 유럽을 침공할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북미왕국이 북미 대륙의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는 사실이야 널리 알려지기도 했고, 정말 북미왕국이 유럽을 침공할 생각이 있었다면, 뭐하러 잉글랜드와 함께 유럽의 전쟁을 중재해 전쟁을 종식했겠는가.
그냥 내버려 두면 더욱 유럽이 혼란해지고 약해질 테니, 그때 침공하면 그만이지.
해서 그라프는 라파우를 바라보았고, 그의 얼굴에 두려움이 보이자 속으로 혀를 차며 타이르듯 입을 열었다.
“너무 과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입장에서야 저 정도 함대를 운용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막대하겠지만, 부유한 북미왕국의 입장에서는 크게 부담스럽지 않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라프의 말에 다른 이들은 북미왕국의 부유함을 떠올리고 자신도 모르게 수긍했다.
“아...”
“뭐 북미왕국은 엄청나게 부유하니...”
그렇게 갑판 위의 분위기가 변하자, 그라프가 슬쩍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북미왕국에서 북미왕국 국왕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해본다면, 타국을 방문하는 왕의 안전을 위해 저렇게 대규모 호위함대를 충분히 파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북미왕국이라면 말입니다.”
“하긴...”
“뭐 북미왕국 백성들은 북미왕국을 건국한 현 국왕을 찬양하다 못해 신격화한다는 말까지 있으니...”
북미왕국에서 정성국의 존재감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널리 알려져 있기에, 다른 이들은 그라프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북미왕국의 국력이, 확실히 유럽의 여타 국가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기가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거나, 어떻게든 이번 결혼식에 참석해 정성국과 친분을 쌓아야겠다는 욕심을 품었고.
그때, 한 젊은 귀족이 어느덧 선착장에 정박한 북미왕국의 전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저기 보십시오!”
“응?”
“어?”
“맙소사...”
사절단의 귀족들이 고개를 돌려 젊은 귀족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고.
선착장에 정박한 북미왕국의 배에서 끊임없이 무장한 병사들이 내리며 선착장을 장악하기 시작하자, 사절단의 귀족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이 섞인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라파우는 무장한 북미왕국 병사들을 두려움 섞인 시선으로 응시하다, 고개를 돌려 그라프를 바라보고 물었다.
“...정말 저렇게 많은 병사가 단순히 호위 병력에 불과한 겁니까?”
이에 다른 사절단의 귀족들도 고개를 돌려 그라프를 바라보자, 그라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