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4
“전하. 일어나세요.”
“으음?”
한참 달게 자고 있던 정성국은 하얀 들꽃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오자 감고 있던 눈을 슬쩍 떴고.
시야에 가득 들어오는, 자신을 바라보고 화사하게 웃고 있는 하얀 들꽃의 얼굴이 보이자 정성국은 잠에 취해있으면서도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하얀 들꽃의 얼굴을 매만지자 잠시 그런 정성국의 손길을 즐기던 하얀 들꽃이 곧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정신 차리세요. 전하. 곧 페로 제도의 토르스하운 공항에 도착한대요.”
“그래? 하암...”
그제야 정성국은 이곳이 침실이 아니라 두루미급 비행기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한번 하품을 한 후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하얀 들꽃과 함께 앞쪽에 있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의 풍경을 슬쩍 확인했고.
저 멀리 페로 제도로 짐작되는 섬이 보이자 정성국이 중얼거렸다.
“흠. 생각보다 편하게 왔네.”
물론 정성국도 이번 비행은 생각보다 편하리라고 예상하긴 했다.
예전보다 비행기의 성능이 좋아졌기에, 비행시간이 반으로 줄어들기도 했고.
다만, 비행기의 성능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그래도 비행시간은 꽤 긴 편이었고, 일정을 단축하기 위해 중간에 쉬지 않고 비행기를 갈아타며 계속 비행해야 했기에, 이전보다는 덜하더라도 고생스럽기는 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생각외로 이번 비행은 편했고, 이는 군사청 덕분이었다.
황새급 비행기의 경우는 공간이 좁아 어쩔 수 없었지만, 신형 비행기들은 공간과 이륙 중량에 여유가 있었기에, 비행기를 관리하는 군사청에서 왕실 가족들이 탑승할 비행기들은 전부 내부를 개조해, 더 크고 푹신한 의자를 설치하고,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침대마저 설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달까.
그리고 처음 새한성에서 이렇게 개조된 비행기에 탑승하고 너무 과한 것 아닌가 싶었던 정성국은, 전생에서 비행기를 탈 일이 많은 갑부들이 왜 전용기를 이용했는지를 깨닫게 되었고, 생각보다 편한 비행기 여행에 매료되어, 왕실 자금으로 두루미급 비행기를 몇 대 구매해 왕실 전용기로 개조할까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였고.
아무튼, 덕분에 새한성에서 멀리 떨어진 페로 제도까지 편하게 도착할 수 있었기에, 정성국은 감회가 새롭다는 얼굴로 창문 밖에 보이는 페로 제도를 응시하며 중얼거리자, 정성국 옆에 앉아 있던 하얀 들꽃이 정성국의 중얼거림을 듣고 배시시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게요. 3년 전 북미 동해안 지역과 아이슬란드를 방문했을 때, 전하께서 비행기가 하도 불편하다고 투덜거리셔서 조금 긴장했는데 말이에요.”
정성국은 하얀 들꽃의 시선에 너무 엄살 부린 것 아니냐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깨닫고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땐 정말...힘들었어. 좌석도 훨씬 불편했고, 공간도 좁아 발을 제대로 뻗기도 어려웠다고. 거기에 지금처럼 침대에 누워 편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하긴...그러고 보면 장거리 출장을 다녀온 관리들도 처음에는 신기해서 좋다고 해도, 나중에는 힘들다며 기차와 배를 타는 게 낫다고 하긴 했지요.”
하얀 들꽃은 정성국의 일을 보좌했기에, 여러 관리와 자주 접촉했고, 그렇기에 황새급 비행기만을 탑승해야 했을 당시에 관리들이 비행기 여행에 투덜거렸던 것을 떠올리고 맞장구치자 정성국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렇다니까?!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불편함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비행기를 이용한 이동이었다고. 뭐 신형 비행기의 개발로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지만...”
정성국이 말을 흐리자 그의 표정을 살핀 하얀 들꽃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라도 있으세요?”
“아. 중간에 몇 번씩 비행기를 갈아타는 것이 조금 불편해서 말이야.”
“그 부분은 어쩔 수 없잖아요? 비행기의 항속 거리는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
페로 제도를 방문하기 위해, 정성국과 하얀 들꽃은 비행기를 4번 갈아타야 했고, 이게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새한성에서 페로 제도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비행기를 몇 번씩 갈아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 하얀 들꽃의 반문에 정성국은 전생의 비행기들을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긴 한데...그게 결국 더 좋은 기관을 개발하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니까. 항속 거리가 지금보다 한...3배만 늘어나더라도 굳이 여러 번 갈아탈 필요는 없잖아?”
“3배...그게 과연 가능할까요?”
현재 항속 거리가 가장 긴 두루미급 비행기가 3천km를 비행할 수 있었으니, 3배면 9천km를 단숨에 비행한다는 소린데, 그게 과연 가능하겠느냐는 하얀 들꽃의 표정을 보고 정성국이 단언했다.
“그럼. 충분히 가능할걸? 그것도 생각하는 것보다 이른 시기에?”
전생에서 두루미급 비행기와 비슷한 수준의 비행기가 처음으로 개발된 후 약 20년 만에, 100명이 넘는 승객을 태우고 9천km 거리를 단숨에 비행할 수 있는 성능의 비행기가 양산되어 하늘을 누볐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정성국은 비슷한 시간이 흐르면 북미왕국에서도 충분히 그 정도의 비행기를 개발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전생과는 상황이 다르긴 했지만, 더 많은 대학교를 세워 더 많은 인재를 기르고, 이들 중 고르고 고른 이들만 연구청에 들어와 연구에 매진하기에, 북미왕국의 기술은 무척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일전에 박기동에게 제트 엔진에 대한 개념과 간단한 구조도 슬쩍 이야기해줬으니...’
정성국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하얀 들꽃은 정성국의 자신감이 가득한 얼굴이 빙그레 웃으며 중얼거렸다.
“헤...하루라도 빨리 그런 비행기가 개발되면 좋겠네요. 그럼 해외 영토의 관리가 그만큼 쉬워질 테니까요.”
북미왕국의 해외 영토가 늘어나면서 관리의 어려움으로 그만큼 일이 많아지고, 이 때문에 정성국에게도, 하얀 들꽃에게도 부담이 커지는 상황이다 보니,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비행기가 빠르게 개발되었으면 정말 좋겠다는 말을 하는 하얀 들꽃이었고.
이에 정성국은 새한성에 복귀하면 연구청에 들러 박기동을 갈궈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이다.”
* * *
비행기에서 내린 정성국은 미리 준비된 자동차를 타고 선착장으로 이동했고.
선착장에 도착해 바로 왕실 여객선에 탑승한 하얀 들꽃과는 달리, 정성국은 선착장을 잠시 둘러보면서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호위함대의 모습을 살피다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야. 이렇게 보니 또 장관이로군.”
“하하하. 그렇지요?”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정성국은 바로 고개를 돌렸고, 뒤에서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김봉길 1함대 사령관을 보고 정성국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뭐야. 1함대 사령부에 있어야 할 자네가 여긴 왜 있나?”
“왜 있긴요. 제가 이번 호위함대의 총책임자이니 당연히 와야지요.”
김봉길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얼굴로 이렇게 대답하자 정성국이 슬쩍 타박했다.
“허. 이전에 자네가 그러지 않았나? 슬슬 후배들을 키울 생각이라 어지간한 일은 후배에게 맡길 생각이라고?”
이에 김봉길은 손을 내저으며 답했다.
“에이. 이번 일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잖습니까. 아국에서 전하의 안전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다고요.”
“얼씨구?”
“그리고 외무청에서 이번 방문으로 아국의 강력함을 유럽에 널리 알릴 생각이라는 이야기에 군사청에서는 각 함대의 기함이 되는 전선을 모두 차출해 호위함대에 편성시켰기에, 원활한 지휘를 위해선 제가 호위함대의 총 책임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결코, 1함대 사령부에서 서류 작업만 하기 싫어서 호위함대의 총책임자 자리를 맡은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믿어주시지요.”
김봉길의 대답에 정성국은 1함대 사령부를 지키기보다, 나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이 1함대 사령관을 어찌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김봉길이 다시 1함대 사령관으로 복귀한 후, 막대한 업무에 시달리는 군사청장을 대신해 해군을 총괄하며 수많은 업무를 감당해왔기에 좀이 쑤실 때도 되었다 싶어 그냥 넘어가기로 마음먹고 말했다.
“...썩 믿음이 가지는 않지만, 그동안 새한성에서 많이 고생했으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그보다...내가 보고받은 것보다 함대 규모가 더 큰 것 같은데?”
정성국이 일단 넘어가겠다고 이야기하자 김봉길은 슬며시 미소지으며 답했다.
“아. 예. 그럴 겁니다. 수송선을 몇 척 추가했거든요.”
“수송선을?”
뭐 변경 사항이 있느냐는 시선을 보내는 정성국에게 김봉길이 대답했다.
“예. 물론 이번 일은 전하의 호위가 우선이고, 차선으로 유럽에 아국의 군사력을 과시하는 것이긴 합니다만...유럽까지 호위 병력을 수송하는 일이니만큼, 육군의 부족한 장거리 원정에 대한 경험을 쌓을 수도 있잖습니까.”
그 말에 정성국은 상황을 이해하고 중얼거렸다.
“일종의 장거리 원정을 대비한 훈련으로 써먹기 위해 호위 병력을 조금 더 늘렸고, 해서 수송선도 추가했다?”
“정확하십니다.”
김봉길이 자신의 추측을 긍정하자, 정성국은 잠시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뭐랄까. 호위 병력의 편성이야 호위대장과 군사청장에게 일임했으니 이제 와서 뭐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장거리 원정 경험은 아국도 많지 않나? 최근에 해외 영토를 확보하고 이 지역들을 통제하기 위해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기도 했고, 예전에는 조청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고 말이네. 헌데 굳이...”
최근에 북미왕국은 수많은 해외 영토를 확보했고, 이렇게 확보한 해외 영토에 병력과 물자를 수송해왔기에, 장거리 원정 경험은 충분하다고 생각한 정성국이 반문하자 김봉길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약간의 인력과 물자를 수송하는 것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 대규모의 병력과 군수 물자를 수송하는 것은 달랐기에.
“해외 영토에 배치하는 병력이라 봐야 기껏해야 1, 200명 수준이지, 지금처럼 수천 명에 달하는 병력을 수송한 적은 없잖습니까. 그러니 이를 통해 장거리 원정 경험을 쌓았다고 보기는 조금 애매하고, 조청 전쟁의 경우는 아이누 섬의 병력을 이동시킨 것에 불과해 장거리 원정이라고 하긴 어렵지요.”
“흠. 그런가?”
생각해보면, 북미왕국이 해외 영토를 개발하고 관리하는 방식은 대규모 인원을 파견하기보다는 소수의 관리와 기술자들을 파견하고, 부족한 노동력은 현지인들을 고용하는 방식을 써왔었던 만큼, 그리고 조청전쟁 당시 본국에서 조선에 파병한 병력은 특수군과 지휘관들 정도가 전부였다는 것을 떠올리고 김봉길의 말에 수긍한 정성국이었다.
그리고 평화를 원하는 자는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처럼, 정성국 역시 평화를 위해서 북미왕국의 군사력 강화에 꽤나 신경을 썼는데 그나마 해적들과 실전 경험을 쌓는 북미왕국 해군과는 달리, 육군의 경우는 실전 경험을 쌓을 일이 별로 없다 보니 아무래도 군기가 흐트러질 수밖에 없고, 그러니 군사청에서 이번 일을 일종의 원정 훈련으로 생각하고 이용하겠다는 판단은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해서 정성국이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병력을 얼마나 추가했길래, 수송선을 몇 척씩이나 추가한 건가?”
“추가한 병력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600명 정도를 추가했을 뿐이지요.”
“엥? 헌데 왜 수송선을 몇 척이나...잠깐. 설마...?”
김봉길의 대답에 의아한 기색이던 정성국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김봉길을 바라보자, 김봉길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특수군을 추가로 편성시켰습니다. 아국의 군사력을 제대로 과시하려면, 특수군을 빼놓을 수야 없잖습니까. 해서 전차 25대, 장갑차 50대를 끌고 왔지요.”
조청 전쟁 당시, 북미왕국에서 조선을 돕기 위해, 그리고 실전 운용 경험을 확보하기 위해 검차를 파견하면서 검차의 존재가 유럽에 알려졌고.
그 후로 철선, 비행기 등과 함께 북미왕국의 기술력과 강력함의 상징이 된 검차였다.
그러니 북미왕국의 군사력을 제대로 과시하려면, 검차에서 더욱 발전한 전차와, 검차에서 파생된 장갑차를 포함하는 것이 맞긴 했다.
다만, 그나마 북해와 발트해를 오가는 철선과, 최근에 가끔씩 북유럽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기와는 달리, 전차와 장갑차는 북미왕국 내에서만 운용했고, 군사 무기이기에 사진도 엄금했기에, 유럽인들 대부분은 검차를 궁금해하면서도, 또 검차와 관련된 소문들은 부풀려진 것이라고 여기기도 했고.
이를 잘 알고 있는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번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은 전차와 장갑차를 보고 무척 놀라겠구만.”
“하하하. 아국을 방문해보지 않은 이라면 분명 그럴 겁니다.”
김봉길이 정성국의 예상에 동의하며 웃자, 정성국은 선착장과 호위함대를 둘러본 후, 출항 준비가 끝난 것 같아 이를 확인했다.
“아무튼, 출항 준비는 다 끝난 건가?”
“그럼요. 전하께서 탑승하시면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쳐둔 상태이지요.”
김봉길의 대답에 정성국이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럼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 일정이 빡빡하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