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3
정성국은 응접실에서 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정안문을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무 뚱해 있지 마라. 아들아.”
“...어찌 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도 꼭 유럽에 가고 싶었는데요.”
정안문의 투덜거림에 정성국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쩌겠어. 청장들의 반대가 심한데.”
“으으으.”
원래 정성국은 이번 유럽행에 왕실 가족들을 모두 동반해 함께 움직일 생각이었다.
물론 별로 구경할 것은 없겠지만, 기왕 움직이는 거 가족 여행 삼아 함께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고, 비행기의 항속 거리 때문에 아이슬란드는 무조건 들려야 했는데, 3년 전 휴가차 아이슬란드를 방문했을 때 왕실 가족들 모두 아이슬란드의 온천에 무척 만족했었기에 유럽에서 돌아올 때, 온천에 잠깐 들려 여행의 피로를 푸는 것도 괜찮아 보였기 때문이다.
다만, 정성국이 이를 호위대장을 비롯해 조용한 곰에게 이야기하자, 이들은 절대 불가를 외쳤다.
물론 북미왕국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그리고 정성국의 안전을 위해 과할 정도의 호위 병력을 대동하기는 하지만, 이들로서는 왕실 가족 전체가 해외에 나간다는 것이 아무래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호위대장을 통해 정성국의 생각을 알게 된 군사청장도 정성국의 뜻을 꺾기 위해 나섰고, 일이 커지면서 다른 청장들도 이를 알게 되자, 국내라면 몰라도 해외를 나가는데 왕실 가족 전체가 나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느냐며 결사반대를 하자 정성국은 어쩔 수 없이 정안문을 일행에서 빼버림으로써 청장들을 달랬다.
해서 정성국은 이번 여행에서 정안문이 제외된 것은 자신의 본의가 아니고, 그러니 미안할 이유가 없다는 표정으로 정안문을 바라보자, 정안문은 그런 정성국의 태도에 마음이 상했는지, 자연스레 입이 삐죽해졌고.
그런 정안문의 반응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아들을 달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렇게 부러워할 것 없다. 흑백 사진으로 보니 그나마 그럴싸해 보이는 거지, 상하수도 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이 바로 유럽이야. 헌데 뭘 꼭 유럽에 가고 싶어하냐.”
정안문이나 정나리 둘 다 어지간해선 궁 밖을 나가기 쉽지 않다 보니, 바깥에 대한 동경이 꽤 큰 편이긴 했다.
그래서인지 두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정성국이 보여준 대사관이나 정보기관에서 찍어온 세계 각국의 사진에 무척 관심을 보이기도 했고.
그렇기에 정안문이 내심 유럽을 동경하는 것처럼 보이자 정성국은 현실을 알려주었고.
이에 정안문은 내심 수긍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반박했다.
“그래도 외국이잖습니까. 이국적인 정취를 느끼기 위해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거죠. 그리고 유럽의 건축물들은 아국의 건축물과는 결이 조금 다르기에 구경해보고 싶기도 하고요.”
하지만 정성국은 그런 정안문의 반박에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그래 봐야 이번에 방문하는 지역은 유럽의 시골 마을이다. 건축물이라 봐야 별거 없어.”
“어? 그래도 룬드에는 대학교가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정안문의 말대로 룬드에는 1666년 설립된 룬드 대학교가 있긴 했다.
다만, 정안문이 생각하는 것과 지금 시기의 유럽 대학교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정성국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아들아. 아국의 대학교들이야 최대한 많은 인재들을 키우기 위해 처음부터 거대한 규모로 건설했으니까 볼만한 거지. 유럽의 대학교는 안 그렇단다.”
“그래요?”
정안문이 정성국의 말에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자 정성국이 단언했다.
“그럼. 기껏해야 조금 큼지막한 건물 한두 채 있는 게 다일걸? 아. 너도 하버드 대학교에 한 번 가봤잖아?”
이에 정안문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입을 열었다.
“아...기억 나요. 그러고 보니 원래 하버드 대학교는 중앙에 있는 2층짜리 벽돌 건물 한 채가 전부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정안문은 예전에 정성국을 따라 하버드 대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고, 이때 하버드 대학교의 전신이라는 하버드 칼리지의 건물을 본 기억이 떠올라 입을 열었다가 이 건물이 썩 대단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떠올라 자연스레 말을 흐리자, 정성국이 손가락을 튕기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 2층짜리 벽돌 건물. 네가 보기에 그 건물이 엄청 대단해 보이더냐?”
물론 전생이었다면, 그리고 21세기라면, 하버드 대학교의 위상이 있었으니, 그 하버드 대학교가 시작된 건물이라는 역사적인 가치가 부여되어 그럴듯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러니 정안문은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고, 그런 정안문의 반응에 정성국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추가로 설명했다.
“그리고 유럽의 다른 대학교들의 사정도 비슷해. 아국에서야 대학교를 나라에서 운영하고, 학생들이 공부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기숙사도 짓고 식당도 짓고 이런저런 시설들을 여럿 건설하지만, 유럽의 대학교들은 달라. 딱 수업에 쓸 교실 정도가 전부라고. 그 외에는 알아서 하숙하고 알아서 끼니를 해결하고 이런 식이라 건물을 많이 건설할 이유가 없지. 그러니 구경할 것도 없을 테고.”
물론 최근에는 이러한 경향이 조금 바뀌기는 했다.
북미왕국의 학문이나 기술 수준이 빠르게 발전하는데 유럽 국가들은 이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고, 유럽의 지식인들은 이를 인재를 양성하는 북미왕국의 교육 체계 때문이라고 여겨, 자국의 교육 체계를 개혁하고 있었고, 이 중에는 학문을 익히는 데 바쁜 대학생들의 편의를 봐 주기 위해 북미왕국처럼 각종 편의 시설이 포함된 대학교를 건설하거나, 혹은 기존의 대학 도시를 개조하려 했기에.
다만, 괜히 이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말하면 정안문이 다시 유럽을 방문하고 싶다고 자신을 조를 것 같았기에, 정성국은 의도적으로 이 사실은 누락했고.
“으음...”
정안문의 표정을 보니 자신의 의도대로, 유럽에 대한 동경을 꽤나 조금 털어버린 것 같았기에 정성국이 쐐기를 박듯 말했다.
“그리고 너도 알겠지만, 지금 개발청에 생각보다 많은 외국인 건축가들이 유입되어 이들 덕분에 아국의 건축물들도 꽤 다양해지고 있어. 그러니 고작 건축물 때문에 유럽을 방문할 이유는 없지.”
물론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라던가,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라던가, 혹은 지금 한창 짓고 있을 베르사유 궁전 정도라면, 충분히 방문할 가치가 있긴 했다.
다만, 정성국은 당장 정안문을 설득하기에 불리한 이야기는 굳이 꺼내지 않았을뿐더러, 정안문에게 이야기한 대로 건축가가 부족해 허덕이던 개발청이 유럽 건축가들을 대거 받아들이고, 이들이 북미왕국의 건축 기술을 체득한 후, 일부는 자신들의 건축 양식을 고수하면서 북미왕국 곳곳에는 유럽풍의 건물들도 많이 건설되고 있었기에 정성국이 당당하게 이야기하자, 정안문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뭐합니까. 새한성에만 있다 보니 아국의 다양한 건축물을 제대로 구경도 못 하니 문제잖습니까.”
이에 정성국은 정안문을 보고 혀를 차며 타박하듯 말했다.
“이놈 보소? 그래도 일 년에 한 번씩은 가족 여행 때문에 다른 지역을 방문할 수 있지 않으냐? 그거면 됐지.”
“쩝...”
고작 1년에 한 번 가족 여행으로 다른 지역을 방문하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은 정안문이었지만, 이를 이야기했다가는 정성국이 심술을 부려 자신만 가족 여행에서도 제외할 것 같다는 위기감에 애써 입을 닫은 정안문이었고.
그런 정안문의 얼굴을 보고 정성국은 정안문의 속내를 대충 짐작했지만, 일부러 모른 척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네가 다른 나라에 여행을 갈 정도로 지금 여유를 부릴 아니라는 거야. 군사대학에서의 훈련이 그리 만만해 보이더냐?”
군주제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왕의 능력이었다.
물론 정성국은 북미왕국이 언젠가 입헌 군주제나 혹은 민주주의로 정치 체제를 바꿔야 한다고 여겼지만, 자신의 대에는 어렵지 않을까 내심 생각했고.
그렇기에 정성국은 정안문과 정나리의 교육에 특히 신경 썼다.
다만, 가뜩이나 국정을 처리하느라 바쁜 정성국이 자식들의 교육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긴 현실적으로 어려웠고, 이는 전아라나 하얀 들꽃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아라는 연구 때문에, 하얀 들꽃은 정성국을 도와 업무를 처리해야 했기에.
해서 정성국은 가족들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나 티타임을 이용해 이야기를 나누며 아이들이 제대로 된 가치관을 수립할 수 있도록 돕고, 꼭 위에서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뿐만 아니라, 밑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가르쳐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가르치고, 가끔은 전생의 지식을 적당히 포장해 이야기하면서 아이들의 시야가 트일 수 있게 도왔고,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왕실 학교마저 설립했다.
원래 정성국은 아이들을 일반 학교에 보낼 생각이었지만, 대부분의 학교는 궁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을뿐더러,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호위대원들이 따라붙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되면 정안문과 정나리의 정체가 알려지고, 자연히 부모의 입김에 아이들은 정안문과 정나리를 순수히 대할 수는 없어 어차피 제대로 된 친구 관계를 형성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판단에, 아예 궁 내에 왕실 학교라는 초등, 중등 교육 과정을 모두 가르치는 학교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정안문은 이 왕실 학교에서 중등 교육 과정을 모두 수료하고 대학교에 입학할 자격을 확보했고, 고민 끝에 군사대학에 입학했다.
원래 정안문은 전아라의 의사에 따라 새한성 대학교에 입학하려 했으나, 정성국은 정안문이 다양한 경험을 쌓길 원했고, 같이 고생하며 사관들과 유대감을 쌓는 것도 나쁠 것은 없다는 생각에 은근슬쩍 군사대학에 지원하게끔 유도했고, 정안문은 결국 군사대학을 선택한 것이다.
이에 전아라는 조금 걱정하긴 했지만, 정안문을 믿기도 했고, 정성국이 무슨 의도에서 정안문을 군사대학으로 유도한 것인지를 짐작했기에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고.
해서 올해 3월이 되면 정안문은 군사대학에서 공부와 훈련을 병행해야 했기에 정성국이 이를 언급하자 정안문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애써 가슴을 펴며 말했다.
“음...그래도 그동안 꾸준히 체력 단련을 해 왔으니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정성국의 지시로 정안문과 정나리는 각종 운동을 하며 열심히 체력을 단련해야 했고, 덕분에 정안문은 군사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체력 시험을 무난히 통과했기에 정안문이 이 정도면 괜찮은 것 아니냐고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아들의 생각에 혀를 타며 슬쩍 타박했다.
“쯧쯧. 그 정도는 겨우 기초적인 수준에 불과하단다. 그리고 군사대학에 입학한 녀석 중에 그 기초적인 체력 수준도 안 되는 녀석들은 없고. 근데 그렇게 여유를 부린다고? 나라면 군사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한층 강도를 높여 체력 단련을 할 것 같은데?”
“으음...”
정성국의 지시에, 아버지는 유럽을 방문하는데 자신은 궁에 틀어박혀 체력 단련을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러워 정안문의 입이 다시 삐져나올 때, 정성국이 그런 아들의 속내를 눈치채고 조건을 걸었다.
“대신, 군사대학에서의 성적이 좋다면, 나중에 네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해주마. 음...최소한 반년은 보장해주지. 어떠냐.”
“헉! 그게 정말이십니까?”
정성국의 제안에 정안문의 눈이 뒤집히자 정성국이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정성국은 정안문이든, 정나리든,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세상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그리고 북미왕국의 백성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여행을 보낼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그래. 아. 물론 국내 한정인 것은 알지?”
아무리 호위대원을 붙인다 하더라도, 정안문이 해외를 가기엔 여러모로 걸리는 것이 많았고, 이를 정안문도 모르지 않아 해외를 방문하는 것 따윈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정안문은 정성국의 말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뭐...아무튼 약속하신겁니다?”
“오냐.”
정성국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정안문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큭큭큭. 알겠습니다! 그럼 전 열심히 체력 단련과 공부를 병행할 테니, 조심히 다녀오시지요. 아버지.”
이에 정성국은 어느덧 자신과 맞먹을 정도로 커버린 정안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 그리고 내가 없는 사이에 네 어머니와 동생. 잘 보살피도록 하고.”
원래 정성국은 정안문만 남겨두고 유럽을 방문하려 했다.
헌데, 3일 전 정나리가 감기에 들어 몸이 좋지 않기에, 정성국은 정나리도 일행에서 제외했고, 전아라가 정나리를 보살피기 위해 남았다.
전아라나 하얀 들꽃이나 정안문과 정나리를 똑같은 자식으로 여기기도 했고, 하얀 들꽃은 울리카와 친분이 있기에 이번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어 한 것을 알고 있는 전아라였고, 여기에 전아라가 지금 하는 연구는 한창 중요한 시점이었기에, 전아라는 처음 정성국이 유럽 여행을 이야기했을 때부터 이번 유럽 여행에 꼭 참석해야 하는 건가 고민했었기에, 정나리의 감기에 바로 남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해서 정성국이 전아라와 정나리를 잘 보살피라고 당부하자, 정안문은 당연한 말을 왜 하느냐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야 물론입니다. 어머니와 동생 걱정은 마시고, 작은어머니와 함께 좋은 시간 보내고 오세요.”
“하하하. 그러도록 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