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8
정성국의 일거리를 조금 덜어줄 겸, 그리고 정성국에게 간식을 전해줄 겸 집무실을 방문한 하얀 들꽃이었다.
다만, 이번에 하얀 들꽃이 가져온 간식은 왕실 숙수가 만든 애플파이였는데, 하얀 들꽃이 가져온 파이의 크기가 꽤 컸을뿐더러, 이런 달콤한 파이류는 하얀 들꽃이 무척 좋아하는 편이었기에, 정성국은 간식을 건네주고 바로 일어나려는 하얀 들꽃을 붙잡았고.
정성국이 커피를 내리는 동안, 하얀 들꽃은 그런 정성국을 지그시 바라보며 방긋방긋 웃다가 문득 생각이 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전하. 혹시 그 소식 들으셨어요?”
“음? 무슨 소식?”
“울리카가 칼 11세와 혼인한다는 소식이요.”
덴마크의 공주인 울리카의 혼인 소식을 거론하는 하얀 들꽃의 이야기에 정성국은 커피를 내리다 말고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어? 어디서 그런 소릴 들었어?”
“본인한테 직접 들었지요. 편지에 쓰여 있더라고요.”
덴마크의 국왕인 크리스티안 5세가 북미왕국을 방문하면서 여동생인 울리카를 데리고 왔고, 이때 울리카는 정성국의 소개로 왕실 가족들을 만났고, 그중 하얀 들꽃과 급격히 친해졌다.
마치 정성국이 크리스티안 5세와 이런저런 코드가 맞아 쉽게 친해진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울리카가 덴마크로 돌아간 이후에도 둘은 종종 편지를 주고받았고, 이를 알고 있던 정성국은 하얀 들꽃의 말에 뺨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흠. 그렇지 않아도 최근 국혼 문제로 덴마크의 외교관이 스웨덴을 자주 드나든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그동안 덴마크와 스웨덴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고, 특히 칼 11세가 전격적으로 북미왕국을 방문한 것 역시 덴마크를 견제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뒤늦게 새한성에 도착한 칼 11세를 항상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던 크리스티안 5세였다.
다만, 어차피 북미왕국과 동맹을 맺었기에 전쟁이 벌어질 리는 없다 해도, 굳이 이웃 나라와 험악하게 지낼 필요가 있느냐는 정성국의 조언과, 칼 11세 정도면 울리카의 상대로 괜찮지 않으냐는 정성국의 중매에 크리스티안 5세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해서 최근에 덴마크의 외교관이 이 국혼 문제로 스웨덴을 자주 드나들었고, 덴마크의 국혼 제안에 다른 이들은 몰라도 칼 11세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스웨덴 주재 북미왕국 대사의 보고에 곧 청첩장이 날아오지 않을까 싶었던 정성국이었고.
다만, 양국이 혼인 동맹에 합의하기까지 생각보다 오래 걸렸기에 정성국이 의외라는 표정을 짓자, 하얀 들꽃은 이를 눈치채고 울리카가 보낸 편지에 쓰여 있던 속사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협상을 통해 혼인 동맹에 어느 정도 합의를 하긴 했지만, 크리스티안 5세는 동생 걱정으로 결정을 미룬 모양이에요.”
“응? 무슨 소리야?”
정성국은 내린 커피를 하얀 들꽃에게 건네주다가, 고개를 갸웃하자 하얀 들꽃이 조금 안타까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도 아시겠지만, 덴마크와 스웨덴의 관계가 썩 좋지 않잖아요? 물론 크리스티안 5세도, 칼 11세도 지금처럼 지내는 것보단 양국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해 국혼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거지만...그동안의 앙금이 단숨에 사라질 리가 없잖아요?”
처음 하얀 들꽃의 말에 의아한 기색이었던 정성국은 곧 크리스티안 5세가 무엇을 걱정한 것인지를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울리카가 스웨덴 왕실에 시집간 이후 고립될 것을 걱정한 건가?”
이에 하얀 들꽃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요. 물론 그동안 울리카와 함께 지낸 수행원들이 스웨덴까지 따라가 울리카를 계속 수행하긴 하겠지만...”
“한계가 있겠지. 칼 11세와 결혼하면 울리카는 스웨덴의 정식 왕비가 되는 거고, 그럼 울리카는 스웨덴의 왕비로서 수많은 연회에 참석해야 할 텐데, 수행원들이 그런 자리까지 따라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덴마크와 스웨덴의 관계는 대부분 이웃 국가가 다 그렇듯 앙숙이나 다름없었다.
한때 동군연합이었던 스웨덴이 독립하면서, 그리고 독립한 스웨덴이 북방의 제국으로 성장하는 동안, 덴마크는 스웨덴의 공세에 밀려 영토를 잃었고 최근에는 스코네 지방을 놓고 다시 전쟁을 치르기도 했으니.
그러니 대국적인 관점에서 양국의 관계를 개선할 필요성을 인정해 칼 11세가 울리카와 혼인한다고 해도, 다른 스웨덴 귀족들이나 귀부인들이 울리카에게 우호적인 시선을 보낼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을 깨닫자 정성국은 이 점은 크게 신경 쓰지 못했었기에 아차 하는 얼굴로 말했고.
여기에 울리카는 나이라는 결점마저 있었기에, 정성국은 조금 걱정스러워졌다.
16세기 초만 하더라도 유럽 역시 조혼의 경향이 강해 여자의 경우 20세만 넘어도 노처녀라고 불렸고, 17세기에 이러한 경향은 점차 완화되어 현재 유럽의 경우 일반적으로 여성은 보통 24, 25세를 결혼 적령기로 보고 26세부터는 노처녀로 인식했는데, 울리카의 나이는 29살이었기에.
그나마 크리스티안 5세가 여동생인 울리카를 무척이나 아낀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기에, 덴마크 사교계에서는 감히 울리카에 대해 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적국이었던 스웨덴 사교계에서는 울리카에 대한 이런저런 안 좋은 소문이 도는 것까지 떠오르자 정성국은 괜히 전생에 얽매여 울리카와 칼 11세를 엮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하얀 들꽃이 입을 열었다.
“그렇죠. 물론 울리카가 스웨덴의 정식 왕비가 되면 앞에서 대놓고 적대하는 이는 없겠지만, 은근히 따돌리거나, 무시하거나, 뒤에서 헐뜯는 이들이 적지 않을 텐데, 이들 때문에 울리카가 마음을 상하지는 않을까 크리스티안 5세가 많이 걱정한 모양이에요.”
하얀 들꽃의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일전에 이야기를 나누었던 울리카의 모습을 떠올리고 슬쩍 말했다.
“나이 차이가 커서 그런지 크리스티안 5세는 울리카를 딸처럼 여겼으니, 충분히 걱정할 만도 하지. 다만 전에 울리카가 새한성을 방문했을 때, 몇 번 이야기를 나눠보니 꽤 활발하고 당찬 여성 같으니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이에 하얀 들꽃이 무슨 소리 하느냐는 얼굴로 정성국을 바라보다 타박하듯 입을 열었다.
“전하도...참. 울리카가 얼마나 여린데요.”
“응? 여리다고?”
이에 정성국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하얀 들꽃을 바라보자, 하얀 들꽃은 그런 정성국의 얼굴을 보고 이런 섬세하지 못한 사람 같으니라고 중얼거리며 말했다.
“그럼요. 울리카가 예전부터 북미왕국의 학문이나 책을 읽으며 북미왕국을 동경해왔었기에, 새한성을 방문했을 때 조금 들떠서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지, 그리 외향적인 성격은 아니에요. 대범한 성격도 아니고.”
“어...그래?”
처음 새한성에 도착해 잠깐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나, 만찬장이나 연회장에서의 울리카의 모습을 다시 떠올린 정성국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하얀 들꽃의 단정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그러니 그런 울리카의 성격을 오빠인 크리스티안 5세가 알고 있기에 끝까지 걱정하고 고민한 거겠지요. 울리카가 스웨덴에서 정말 잘 지낼 자신이 있는가를 말이지요.”
“그...그런가?”
“그럼요.”
계속해서 미심쩍다는 눈빛을 보내던 정성국은 단언하는 하얀 들꽃을 보고 결국 수긍했다.
자신보다야 크리스티안 5세나 하얀 들꽃이 울리카의 성격을 잘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이를 인정하니, 정성국의 마음속에선 자그마한 죄책감이 피어나기 시작했고.
해서 정성국은 급히 질문을 던졌다.
부디 하얀 들꽃이 긍정적인 대답을 해주기를 바라며 말이다.
“그래. 뭐 나야 잠깐 이야기를 나눈 것이 전부니 그게 맞겠지. 뭐. 헌데 그걸 알면서도 울리카가 결국 칼 11세와의 혼인을 결정한 것을 보면 이를 감당할 수 있다고 여긴 것 아닐까? 아니면 그만큼 칼 11세가 좋았다던가?”
하지만, 울리카는 정성국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보다는...울리카는 무척 현명하고 또 착한 아이다 보니, 자신이 칼 11세와 혼인한다면, 덴마크, 스웨덴 양국에 도움이 될 거라는 것을 알면서 거절한다는 선택을 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아요.”
이 하얀 들꽃의 대답이 정성국에겐 마치 울리카가 덴마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처럼 들렸기에, 마음속에서 피어난 죄책감이 무럭무럭 커지는 것을 느끼며 정성국이 탄식했다.
“끙...이거 어째 내가 괜한 짓을 한 것 같은데?”
그리고 이런 정성국의 반응에 하얀 들꽃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럼 전하께서 울리카에게 힘을 실어주시면 되지 않겠어요?”
“응? 어떻게?”
하얀 들꽃의 말이 마치 구원처럼 들린 정성국이 방법을 묻자 하얀 들꽃이 대답했다.
“울리카와 칼 11세의 결혼식에 전하께서 참석하신다면, 스웨덴 귀족들이 감히 울리카를 두고 입방아를 찢지는 않을 것 같아서 말이에요.”
이 대답에 정성국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수긍했다.
지금 유럽에서 북미왕국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확실히 정성국이 결혼식에 직접 참석해 울리카를 축하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라는 것을 알리는 순간 스웨덴의 귀족들이 감히 울리카를 무시하지는 못할 것 같았기에.
물론 정성국이 유럽을 방문한다는 것은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긴 한데, 잠깐의 방문으로 마음속에서 피어난 죄책감을 털어내고, 또, 친구의 동생인 울리카가 행복하게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약간의 번거로움은 감수할 수 있는 정성국이었다.
‘젠장. 역시 중매는 함부로 서는 게 아니구나. 다음에는 절대 중매를 서지 말아야지.’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린 정성국이 입을 열었다.
“원래는 그냥 축하 사절이나 보낼 생각이었지만...확실히 네 말도 일리가 있네.”
“그러면...?”
하얀 들꽃이 잔뜩 기대 어린 눈빛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울리카와 칼 11세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뭐. 어차피 비행기가 있으니 빠르게 오갈 수 있을 테고.”
친선 사절단들이 북미왕국을 방문하면서, 비행기의 유용함을 확실히 깨달았고, 덕분에 북미왕국과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은 유럽 국가들은 수도 인근에 활주로를 건설할 부지를 북미왕국에 내어주었다.
해서 개발청에서는 이 부지들에 공항을 건설 중이었고.
그런 만큼, 넉넉잡고 열흘 정도면 결혼식에 참석하고도 남을 것 같았기에 정성국은 크게 부담 없다는 얼굴로 대답하자, 하얀 들꽃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전하께서 결혼식에 참석하실 때, 저도 함께 참석하면 안 될까요?”
“아. 그럼. 안 될 것 없지.”
하얀 들꽃과 울리카의 친분을 생각하면 당연히 하얀 들꽃은 데려갈 생각이었기에 정성국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하얀 들꽃이 울리카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대화를 이런 방향으로 끌고 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해서 정성국은 묘한 표정으로 하얀 들꽃을 바라보고 추궁해볼까 싶었지만, 하얀 들꽃이 무척이나 기뻐하는 모습에, 그리고 조선에서 나고 자라 북미 대륙으로 이주한 전아라와는 달리 하얀 들꽃은 이 북미 대륙에서 태어나고 자라왔기에, 다른 대륙을 방문해보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정성국은 추궁할 생각을 버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이건 유럽 여행이나 다름없으니, 아라나 애들도 함께 데려갈까? 물론 지금의 스웨덴을 방문해봐야 별로 구경할 것은 없을 것 같긴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