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766화 (766/850)

#766

함교에서 점차 가까워지는 해남도 북쪽에 자리한 해구항의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정일신 3함대 사령관의 귓가에 부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저기 좀 보시지요. 함대 사령관님.”

한창 망원경으로 해구항을 살피던 부관이 정일신에게 망원경을 넘기면서 한 곳을 가리키자, 정일신은 부관이 건넨 망원경을 눈에 가져다 대고 부관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음? 뭐 특이한 사항이라도 있나?”

“그게...저기 보시면 언덕 쪽에 2층짜리 누각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누각 안에는 사람들이 있고요.”

부관의 말에 정일신은 누각의 크기가 비교적 작고, 외형이 무척 화려하기에 군사적인 목적으로 건설한 것이 아니라, 지역 유지가 일종의 연회용으로 지은 누각처럼 보여 그냥 지나쳤던 언덕 위의 누각을 다시 살폈고.

부관의 말대로 누각 안에 약 스무 명 남짓한 인물들이 있는 것을 확인한 정일신이 망원경으로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호오...복장을 보아하니 일반인 같지는 않고, 해남도의 유력자들이려나?”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들의 행동거지나 분위기를 보아하니, 기선 제압을 확실히 한 것 같고요.”

부관의 말마따나, 누각 안의 비단옷을 입은 인물들은 멀리서 보아도 3함대의 위용에 압도된 것이 분명해 보였기에, 정일신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확실히 그러네. 우리 함대에 눈을 떼질 못하는군. 이거 가용할 수 있는 전선을 몽땅 끌고 온 보람이 있네.”

“그러게 말입니다.”

비록 북미왕국이 정확한 해남도의 현지 사정을 모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무지한 것은 또 아니었다.

그동안 북미왕국의 배들이 주나라와의 교역하기 위해 주나라의 항구이자 교역 거점인 방성현을 수도 없이 드나들었는데, 이 방성현은 해남도와 하루 거리에 위치해 있을 정도로 가까웠기에, 해남도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왔던 것이다.

예를 들면 해남도 북부에는 한족들이 집단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나 몇몇 유력자들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청나라 관리들조차 원활한 통치를 위해 이들의 협조를 구할 정도라는 사실 같은.

그리고 북미왕국은 그동안 여러 해외 영토를 얻어 경영했기에, 이런 경우 초장에 현지 유력자들의 기를 완전히 꺾어야 통치하기 편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투로시노는 정확한 해남도의 현지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외무청 관리를 파견하는 문제로 정일신을 만나 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정일신도 투로시노의 의견에 공감했기에 동의하며 바로 새한성에 연락했고, 새한성의 허락이 떨어지자 3함대가 보유한 신형 전선을 모조리 차출하고, 여기에 기존의 전선들도 상당수 끌어모아, 총 20척 규모의 대함대를 구성해 출항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일신이나 투로시노가 의도한 대로, 해남도의 유력자들로 추정되는 인물들은 3함대의 위용에 기가 죽은 것이 멀리서도 뻔히 보였기에, 이렇게 대함대를 구성하고 빠르게 출항하기 위해 발생한 수많은 업무를 처리하느라 출항하기 전까지 무척이나 고생했던 정일신은, 그동안의 고생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렸고.

그 후 부관이 건네준 망원경을 다시 부관에게 되돌려 준 정일신은 해구항 곳곳을 살피다 입을 열었다.

“그보다, 해남도에 수군 기지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예. 조그마한 수군 기지가 하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아. 저게 수군 기지 같습니다.”

일반 배들이 드나드는 선착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몇 척의 배가 따로 정박해 있는 조그마한 선착장을 가리키며 부관이 이야기하자 정일신은 다시 부관의 망원경을 뺏어 청나라의 수군 기지를 면밀히 살핀 후 혀를 찼다.

“대체 얼마나 엉망이면 아직도 출항 준비야?”

“그러게 말입니다. 벌써 15분 가까이 흘렀는데 말입니다. 아. 혹시 저들도 이 해남도가 아국의 영토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 아닐까요?”

어차피 이 동아시아 해역에서 돛 없이 기관으로만 움직이는 선박은 오로지 북미왕국의 선박뿐이었으니, 멀리서 돛이 없다는 사실로 북미왕국의 함대라는 것을 파악하고, 그냥 대기하는 것이 아니겠냐는 의견을 제시하는 부관이었고.

이에 정일신은 눈에서 망원경을 떼고 다른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예정에 없던 함대가 항구에 접근하면 일단 문정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흠. 그건 그렇군요. 허면 광동성처럼 해남도도 독자적으로 움직였기에, 아직 아국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군요. 그래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부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긴 정일신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이 기함의 함장이 끼어들었다.

“함대 사령관님. 슬슬 속도를 줄여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러게. 그리고 예정대로 인급 전선을 선착장으로 보내 수심을 확인하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정일신의 명령에 함대의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하다, 결국 해구항 앞바다에 정선했다.

다만 인급 전선 1척은 명령대로 선착장으로 다가가며 수심을 확인하기 시작했고, 정일신은 인급 전선의 행동에 청나라 수군이 반응할 거라 여겼지만, 여전히 가만히 있었기에 다시 한번 혀를 찼고.

그때, 한 관리로 보이는 인물이 말을 타고 청나라 수군 기지로 들어갔고, 잠시 후 청나라 수군들이 닻을 올리고 돛을 펴자, 정일신은 흥미가 가득한 눈빛으로 선착장으로 빠져나오는 청나라 수군 전선을 보며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명령을 받은 것 같은데...어떤 명령이려나?”

* * *

조용한 곰이 집무실을 찾아와 막 포로나이로 복귀한 3함대가 가져온 해남도의 소식을 정성국에게 보고하자, 정성국은 활짝 웃었다.

“하하하. 그게 정말인가? 해남도의 관리들과 유력자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했다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한 것은 북미왕국의 대규모 함대를 직접 목격하고 북미왕국의 기술력과 군사력을 실감했기 때문으로 분석되었고요.”

“호오. 그래?”

“예. 이들과 자주 접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정일신 3함대 사령관이나 외무청 관리들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해남도의 청나라 관리들은 몰라도, 해남도의 대지주들은 아국에 반감을 품긴 했던 모양입니다.”

대지주라는 단어에서 상황이 뻔히 보인 정성국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대지주라...역시 토지 정책 때문에?”

“그렇습니다. 알아보니 해남도의 경작지 대다수를 이 대지주들이 소유하고 있는 터라, 아국이 본격적으로 해남도를 통치하면, 자신들의 재산인 토지를 뺏기게 될 거라 여긴 거지요. 다만, 해남도의 유력자들은 바깥소식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있었기에, 아국의 국력을 짐작하고 있었고, 해서 대놓고 아국에 반항하기보다는, 뒤에서 수작을 부릴 생각이었던 듯싶고요. 헌데...”

그동안 북미왕국은 여러 해외 영토를 얻어 경영해왔고, 그렇기에 겉으로는 북미왕국에 협조하는 척하면서 뒤에서 수작을 부리는 유력자들이 더욱 골치 아프다는 사실을 아는 정성국이 조용한 곰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순간 인상을 찌푸리다, 유력자들이 북미왕국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고 보고한 것을 깨닫고 대꾸했다.

“아. 3함대를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예. 섣불리 수작을 부렸다가는 가문이 사라질 거라는 위기감을 느낀 모양입니다. 여기에 북미왕국의 무기 체계를 궁금해하는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정일신 3함대 사령관이 해남도에서 화력 시범마저 보인 모양입니다. 그러니...”

조용한 곰이 짓궂게 웃으며 이렇게 이야기하자, 정성국이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잠깐. 화력 시범? 3함대의?”

이에 조용한 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대규모 화력 시범이었답니다. 기관총부터 함포까지 모두 사용했다더군요. 덕분에 아국의 소문이 전혀 과장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전까지만 해도 아국에 반감을 품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던 유력자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답니다. 그 후 이들은 무척 협조적으로 나왔고, 덕분에 아국의 관리들이 해남도의 사정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고요.”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상황을 짐작하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보고받기로 이번에 정일신은 3함대의 주력 전선 대부분을 동원했고, 당연히 해군형 120mm 화포를 다수 탑재한 신형 전선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 화력은 어마어마했고.

이를 목격한 이들의 생각은 당연히 바뀔 수밖에 없었으리라.

‘보아하니, 3함대 사령관은 나중을 생각해 제대로 기를 꺾을 생각이었던 모양이군. 아마 누군가가 북미왕국의 무기 체계를 궁금해했다는 것도 정일신이 유도한 거겠지?’

그렇게 생각한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조금 과한 것 같지만, 어차피 저들의 기를 죽이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움직인 거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생각해보면, 해남도는 무척 큰 섬이고, 낙후된 지역이니만큼, 개간된 지역은 많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북미왕국에 반감을 품은 유력자들이 가솔들을 데리고 마을을 벗어나 숲이나 산으로 들어가 버리면 대응하기 골치 아팠고.

헌데 정일신이 과감하게 대규모 화력 시범까지 보이면서 해남도의 유력자들에게 북미왕국에 반항하면 쓸어버린다는 메시지를 주었고, 덕분에 훗날 통치가 쉬워질 것 같았기에, 정성국은 슬쩍 모른 체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보다, 관리들과 유력자들이 협조했으니 해남도의 사정은 다 파악한 건가?”

“그렇습니다. 해남도와 관련된 보고서입니다.”

조용한 곰이 정성국에게 보고서를 건네주자 정성국이 이를 확인하고 바로 탄성을 질렀다.

“와...해남도가 크기에 짐작은 했지만, 인구가 40만 명에 달한다고?”

여전히 인구가 부족한 북미왕국의 입장에서 단숨에 40만 명이 늘어난 것은 참으로 반길 일이라 정성국이 기뻐하자 조용한 곰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인구 가운데 약 4할이 한족이고요.”

“4할? 그럼 나머지 6할은?”

“원래부터 해남도에 살던 선주민인 여족이 대부분이지요. 이들은 말과 문자 모두 한족과는 다르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해남도에는 여족 말고도, 다른 부족들도 있었다.

사천, 운남, 귀주, 광서 등지에 퍼져 사는 묘족이라던가, 대월 지역에서 사는 참족이라던가.

그렇기에 조용한 곰은 이들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설명했고.

이들을 자세히 설명하다 보니, 해남도의 정세에 관련된 이야기도 나왔고, 이 이야기까지 모두 들은 정성국이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흠. 그러니까 명나라가 망하면서부터 한족들이 대거 유입되었고, 그래서 기존에 해남도의 터줏대감이던 여족을 비롯한 부족들은 한족들에 의해 남쪽으로 밀려났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한족들을 적대하고 있더군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기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삶의 터전을 잃게 되었으니 적대하는 것이 당연하겠지. 헌데 이들과도 접촉한 건가?”

“그렇습니다. 청나라 관리들과 유력자들의 영향력은 한족들이 사는 해남도 북부에만 국한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정일신 3함대 사령관은 해구항에서의 용건을 마친 후 해안가를 따라 남하했고, 결국 이들과도 접촉할 수 있었다더군요.”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이 급히 물었다.

“그럼 그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답니다. 처음 해남도가 아국의 영토가 되었다는 것을 알리자 3함대가 자신들을 토벌하러 온 것으로 여기고 놀란 모양인데,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리고, 또 아국은 저들을 강압적으로 통치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시간과 선물을 주어가며 납득시키자, 일단은 두고 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더군요.”

북미왕국에는 다행스럽게도, 여족을 비롯한 해남도의 여러 부족들은 한족들과 오랫동안 부대끼며 살아왔기에, 외무청 관리들도 한자를 사용해 의사소통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외무청 관리들은 그동안 수많은 부족들과 성공적으로 협상한 경험을 살려 여족을 비롯해 해남도 남부에서 사는 부족들을 잘 설득해, 일단 우호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이를 알게 된 정성국이 활짝 웃으며 외무청의 공을 치하했다.

“하하하! 역시 외무청이로군! 참으로 잘 했네.”

“감사합니다. 전하.”

그 후 정성국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다만 해남도의 상황이 그렇다면, 거점 항구를 두 개 건설하는 편이 낫겠어.”

정성국의 의견에 조용한 곰이 동의했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중이라면 몰라도 당장 한족과 여족을 비롯한 여러 부족을 화합시키기는 쉽지 않아 보이니까요.”

“그래. 그러니, 이를 청장들에게 알리고, 이에 맞추어 개발 계획을 짜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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