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7
수확의 계절이 돌아왔지만, 조선의 조정 신료들의 안색은 썩 좋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선의 곡창지대인 삼남 지방에 가뭄과 홍수가 연달아 들이닥쳐 작물의 피해가 컸던 탓이다.
해서 조정 신료들은 내심 올해 삼남 지방의 작황이 좋지 않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고.
허나 삼남 지방에서 올라온 장계를 살펴보니 예상했던 것보다도 상황이 안 좋았기에 빈청에 모여 있던 조선의 조정 신료들은 장계를 살펴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후우.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삼남 지방의 작황이 안 좋구려.”
“그러게 말입니다. 임술년 때보다 상황이 더 안 좋군요.”
병조판서가 3년 전의 일을 거론하자, 다른 조정 신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빈청의 분위기는 더욱 가라앉았고.
이에 호조참판이 분위기를 바꾸고자 슬쩍 입을 열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이라면, 기근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무려 아국의 곡창지대라 할 수 있는 삼남 지방에 흉년이 들었음에도 말입니다.”
그러자 호조참판의 의도대로 빈청의 분위기가 순간 바뀌었다.
“그렇긴 하지요. 사창을 꾸준히 늘려왔기에 비축해둔 곡식도 많고, 삼남 지방에 가뭄이 발생한 직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구황작물의 재배를 더욱 늘렸으니까요.”
“예. 거기에 그동안 조선 팔도의 도로를 열심히 정비해 두었고 철도마저 놓여 있으니, 다른 지역의 식량들을 삼남 지방으로 수송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테고 말입니다.”
“허허허. 확실히 아국이 많이 변하긴 했어요. 예전에 삼남 지방에 이런 흉작이 발생했다면, 기근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데 여념이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예. 그렇지요. 경술년에 북미왕국과 정식으로 교류한 이후엔 정말 많이 변했지요. 아. 물론 긍정적인 부분으로 말입니다.”
약 15년 전인 경술년에 이상 기후가 발생해 조선 팔도 전체에 흉년이 들었고, 북미왕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대기근을 면치 못했을 거라는 것을 알게 된 조선에서는, 그 이후 경작지 확대와 식량 비축에 더욱 열을 올렸다.
이전에는 어쩌다 한 번 이상 기후로 인해 흉년이 발생했다면, 최근에는 걸핏하면 이상 기후가 발생했고, 그때마다 작황이 썩 좋지 못했으니 말이다.
다행히 원상에서 들여온 감자와 고구마는 기존의 작물을 재배하기 어려운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랐기에, 조선의 백성들은 그동안 작물을 심기 어려워 버려두었던 땅들을 일구어 감자와 고구마를 심었고, 이를 통해 식량 생산량이 급격히 증가했다.
더불어 감자와 고구마는 오래 보관하기는 힘든 작물이었기에, 그나마 보관이 쉬운 쌀은 저장하고, 감자와 고구마를 우선해서 소모했기에, 식량 비축량도 예전보다 훨씬 늘어났고.
여기에 북미왕국이 염전 기술을 넘겨주고 조정에서 직접 염전을 운영해 대량으로 소금을 생산하게 되면서, 그리고 일부 구간에 한해서지만 철도가 깔리고, 도로가 정비되면서 그동안은 유통이 어려워 버리거나 비료로 사용했던 생선들마저 내륙으로 유통되어, 백성들의 배를 채워주었다.
그러니 조선의 식량 사정은 이전과 비교하면 확실히 나아졌고, 덕분에 조선의 주요 곡창지대라 할 수 있는 삼남 지방에 흉년이 들어 작황이 좋지 않다는 장계가 올라왔어도, 이처럼 비교적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되었고 말이다.
해서 호조참판의 이야기에 빈청에서 함께 삼남 지방의 장계를 살피던 다른 조정 신료들이 허허거리며 한마디씩 했을 때, 이조판서가 풍성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만 곡식의 가격이 조금 오를 듯싶은데 그 부분이 조금 우려스럽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시장에 풀리는 곡식이 적어지니...”
호조참판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자 이조판서는 여전히 우려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허나, 예전과 달리 상공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그러니 갑작스럽게 곡식의 가격이 대폭 오르면 민심이 꽤 흉흉해지지 않겠습니까.”
“흐음...”
농부들이 감자와 고구마로 어느 정도 배를 채울 수 있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쌀의 섭취량은 줄어들었고, 이 때문에 흉년이 들 때를 제외하면 쌀값은 비교적 낮게 유지되었으며, 가장 인기 있는 곡물인 쌀값이 낮게 유지되자 다른 곡물들 역시 가격이 높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저렴한 곡물 가격을 조정에서는 은근히 반겼고.
조정을 장악한 개화파들은 농업에 집중한 이전의 조선과는 달리 상공업 발전에 더욱 중점을 두며 조선을 조금씩 바꾸어 나갔기에, 자연스레 상공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의 수가 점차 늘어났는데, 이들은 식량을 생산하는 쪽이 아니라 소비하는 쪽이다 보니 곡물 가격이 낮을수록 이들의 생활은 안정되고, 민심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었으니 말이다.
헌데 삼남 지방의 흉년으로 쌀 생산량이 대폭 줄었으니, 조정에서 따로 무언가 조치를 하지 않는다면, 쌀을 비롯한 곡식의 가격들이 오를 테고, 그러면 식량을 사 먹는 백성들이 상대적으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으며, 자연히 민심이 흉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백성들이 현 조정을 열렬히 지지하기에, 조정을 장악하고 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개화파 관리들에 내심 불만을 품고 있었으면서도 명분이 없어 찌그러져 있어야만 했던 지방의 양반들이 움직일 수 있었고, 그렇게 되면 현 조정으로서는 여러모로 곤란할 수밖에 없었고.
이조판서의 지적에 이를 깨달은 조정 신료들이 하나둘 신음을 흘리며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병조참판이 어쩔 수 없지 않으냐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곡식의 가격을 낮추기 위해 비축해둔 식량을 모두 풀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예. 내년에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말입니다.”
예전에는 이상 기후로 한 해 농사를 망치더라도, 이상 기후가 어쩌다 발생하는 편이었기에 그다음 해는 괜찮았지만, 최근엔 이상 기후가 계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약 15년 전인 경술년, 신해년의 이상 기후도 그렇고, 3년 전인 임술년, 계해년의 이상 기후도 그렇고.
그러니 일부 신료들은 내년의 작황이 좋을 거라 확신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삼남 지방에 비축해둔 식량을 일부 풀어 굶주리는 백성이 없게끔 조치하는 정도는 몰라도 그 이상은 부담스럽다는 얼굴이었고, 그렇게 신료들의 의견이 갈리자 그동안은 별말 하지 않고 신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좌의정인 유철이 슬쩍 의견을 제시했다.
“허나 이판 대감의 말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특히 곡식의 가격이 오르면 아무래도 지방보단 인구가 많은 한양, 평양 같은 대도시들의 민심이 흉흉해질 테니 말입니다.”
“허면 좌상 대감께서는 곡식의 가격을 지금처럼 유지하기 위해 비축해둔 곡식을 모두 풀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그럼 위험 부담이 너무 클 것 같은데...”
유철의 말에 병조참판은 그러다 내년에도 작황이 좋지 않으면 어쩔 거냐는 시선을 보내며 말을 흐리자 유철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에겐 북미왕국이 있잖습니까.”
“이전처럼 북미왕국에서 곡식을 사 오자는 말씀이십니까?”
“예. 투로시노가 그러는데 북미왕국 역시 아국의 곡창지대인 삼남 지방에 이상 기후가 발생해 작황이 좋지 않을 것을 인지하고, 만약을 대비해 포로나이에 추가로 100만 석에 가까운 식량을 비축해두었다고 합니다. 더불어 아국이 식량을 구매할 의사가 있다면, 싼값에 넘기겠다고 했고요.”
유철이 이번 회의에 참석하기 전, 원상을 통해 전달받은 투로시노의 서신을 떠올리며 이렇게 이야기하자, 다른 조정 신료들은 탄성을 질렀다.
“허! 100만 석이나요?”
“오오! 그게 정말입니까?”
이에 유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그러니 북미왕국에서 식량을 구입해 이를 적당히 풀면서 지금처럼 곡물의 가격을 낮게 유지했으면 합니다.”
아마 예전의 조선이었다면, 재정이 빈약해 아무리 북미왕국에서 싼값에 식량을 판매한다 하더라도 감히 100만 석에 달하는 식량을 구매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테지만, 지금의 조선은 달랐다.
북미왕국의 도움으로 상공업을 발전시키며 조선의 재정이 급격히 늘어났기에, 이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달까.
그리고 북미왕국에서 싸게 식량을 넘긴다면 크게 손해를 보지 않을 것 같았고.
해서 다른 신료들이 유철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지요. 그편이 낫겠습니다.”
“예. 뭐 아국의 재정이 많이 나아졌으니까요.”
“그러면 이 일은 예조에서...”
그렇게 조정 신료들이 식량 수입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 논의가 끝나자 유철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동만주 개척에 더 박차를 가했으면 합니다.”
“아. 그거 괜찮군요. 동만주 지역의 땅이 은근히 비옥하니 말입니다.”
이조판서가 유철의 말에 동의하듯 입을 열자 다른 신료들도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예. 그리고 경작지가 널리 분포되어 있어야, 국지적인 이상 기후의 피해를 줄일 수 있기도 하고요.”
“맞습니다. 최근 들어 걸핏하면 삼남 지방에 가뭄이나 태풍이 들이닥쳐 여러모로 곤란한데, 동만주 개척에 박차를 가해 동만주 지역의 경작지가 늘어난다면 상황이 조금 나아지겠지요.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벼를 재배하지 못한다는 건데...”
호조참판이 조금 아쉽다는 듯 중얼거리자 이조판서가 끼어들었다.
“대신 귀한 밀을 재배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거면 충분하지요.”
원래 조선에서 밀가루는 쌀보다 귀한 식재료였다.
아무래도 조선의 기후는 밀을 재배하기엔 적합한 기후가 아니었고, 낱알이 단단해 쉽게 도정할 수 있는 쌀과는 달리 밀은 도정하는 데도 손이 많이 갔기에, 밀가루는 소량 생산되고 또 비쌀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헌데 동만주의 기후는 밀을 재배하기 적합한 기후이고, 북미왕국의 제분 기술 덕분에 쉽게 품질 좋은 밀가루를 생산할 수 있었으니, 벼를 재배하지 못하는 것이 무슨 문제냐는 이조판서의 말에 다른 조정 신료들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럼요. 매년 북미왕국산 밀가루가 불티나게 팔리던 것을 생각해보면 뭐...”
꼭 쌀이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예조참판의 말에 유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리고 꼭 곡식을 재배하지 않더라도, 사탕무를 대량으로 재배해 설탕을 만들고, 이를 타국에 팔아 번 돈으로 값싼 북미왕국의 식량을 들여와도 되니까요.”
“어? 그거 괜찮군요.”
청나라는 내전으로 인해 설탕 수급이 어려웠고, 일본 역시 유구 왕국이 독립하면서 설탕 수급이 어려워졌다.
그러니 동만주에서 사탕무 재배에 집중해 설탕 생산량을 늘리고, 이를 두 나라에 팔아 얻은 돈으로 값싼 북미왕국의 식량을 사들이는 것도 괜찮겠다 싶은 신료들이 반색하자, 유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동만주 개척입니다. 동만주에 더 많은 백성이 정착해야, 더 많은 밀이나 사탕무를 재배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이에 호조판서가 대답했다.
“그 부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이번에 삼남 지방의 백성들이 꽤 많이 동만주로 이주할 것 같으니 말입니다.”
동만주로 이주하면, 정착 지원금으로 식량을 지원받고, 또 몇 년간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니, 흉작으로 가계가 어려워진 백성들로서는 동만주 이주를 매력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한 유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그건 그렇겠군요. 다만 이 기회에 더 많은 백성들을 동만주에 정착시키기 위해 추가로 지원하는 것도 괜찮아 보입니다만...”
유철이 말을 흐리자 호조참판이 고개를 저었다.
“흠. 전 반대입니다. 물론 동만주 개척이 중요하긴 한데, 단기간에 너무 많은 백성들이 동만주로 빠져나가면, 여러모로 곤란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지금도 한 해에 3, 40만 명에 가까운 백성들이 동만주로 빠져나가고 있었고, 이들을 관리해야 하는 동만주의 관리들은 폭증하는 업무에 두 손을 들며 계속해서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거기에 백성들이 동만주로 이주하면, 당분간은 세수마저 줄어들고.
이를 거론하자 유철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제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군요. 알겠습니다. 일단은 더 많은 관리들을 뽑아 파견하는 것을 우선하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