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5

그렇게 잉글랜드와 관련된 이야기를 마무리한 조용한 곰은 정성국이 건넨 커피로 잠깐 목을 축인 후 다시 정성국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전하. 이건 조금 다른 건입니다만...”

“음?”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지금 동유럽에서 한창 신성 동맹과 오스만 제국 간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원래 오스만 제국을 전쟁에 끌어들인 것은 프랑스였다.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동맹인 스웨덴이 신성로마제국의 배후를 공격해주길 바랐지만, 예상과는 달리 덴마크를 압도하지 못하면서 병력을 나눠 신성로마제국의 배후를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해졌고, 이에 루이 14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압박하기 위해 그동안 공을 들여왔던 또 하나의 패인 오스만 제국을 움직이려 한 것이다.

다만 당시의 오스만 제국은 반프랑스 동맹이 신식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것과 신식 소총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단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고.

그러다 북미왕국과 접촉해 신식 소총을 확보하게 되면서, 그리고 예상과는 달리 프랑스가 반프랑스 동맹을 밀어붙이면서, 오스만 제국은 이 기회가 아니라면 유럽의 중심인 빈을 점령하긴 어렵겠다 싶어 급히 신성로마제국을 침공했다.

그러자 신성로마제국은 빈을 노리는 오스만 제국의 행동에 기겁하면서 주변 국가에 도움을 요청했고.

교황청의 도움으로 프랑스와 종전 조약을 맺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의 지원군 덕분에 빈을 포위한 오스만 제국군을 물러나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오스만 제국군이 피해를 입고 물러나자, 교황청은 이 기회에 오스만 제국에 점령된 헝가리, 나아가 동유럽 전체를 해방하고자 신성로마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 베네치아 공화국, 토스카나 대공국, 몰타기사단 등을 설득해 신성 동맹을 결성했고, 이 연합군이 헝가리 지역으로 남하하면서 오스만 제국과 신성 동맹 간의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진 지도 꽤 되었기에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지. 외무청에서도, 군사청에서도, 정보기관에서도 동유럽과 관련된 보고서는 꾸준히 올라오고 있으니까. 헌데 갑자기 동유럽의 일은 왜?”

“그게...신성 동맹에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이 조금 생뚱맞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성 동맹에 참여한 나라 중에 신성로마제국 정도를 제외하면, 별다른 교류가 없었는데 뜬금없이 도움을 요청했다고 하니 말이다.

“응? 갑자기 무슨 도움을?”

“신식 소총을 판매해달라는 거지요.”

“음? 신식 소총을? 이제 와서?”

조용한 곰이 신식 소총을 언급하자 정성국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대프랑스 전쟁을 통해 신식 소총의 위력이 유럽에 널리 알려졌기에 정성국이나 외무청에서는 당연히 신성 동맹에서 북미왕국과 접촉해 신식 소총을 구입하고 싶다는 요청을 해올 줄 알았는데, 그동안은 별다른 접촉이 없었으니까.

물론 정성국이나 외무청에서는 유럽의 균형을 위해서는 신성 동맹에 신식 소총을 판매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내렸기에,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겼지만 말이다.

그리고 조용한 곰은 정성국의 어조나 표정을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고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예. 헝가리에서 오스만 제국군과 전투를 치르면서 신식 소총이 대규모 전투에서 얼마나 위력적인지 뼈저리게 느낀 모양입니다.”

“허. 지금에야 신식 소총의 위력을 알게 되었다고?”

그 말에 정성국은 헛웃음을 지었다.

동유럽에서 오스만 제국과 신성 동맹 간의 전쟁이 시작된 지도 벌써 2년이 넘게 흘렀는데, 이제 와서 신식 소총의 위력을 깨닫고 신식 소총을 확보하려 움직인다고 하니.

더불어 신성 동맹의 지휘관들이 그 정도로 현실 감각이 없는 무능한 이들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이에 조용한 곰은 정성국이 오해했음을 깨닫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물론 그건 아닙니다. 전쟁 초기부터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오스만 제국군에 호되게 당하기도 했고, 또 신성로마제국 역시 신식 소총을 운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신성동맹의 지휘관들은 신식 소총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요. 다만...아시잖습니까. 교황청에서 저희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을요.”

“아...”

북미왕국은 백성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한다면서, 기독교의 여러 분파뿐만 아니라 불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를 모두 인정하고 있었고, 북미왕국 특유의 법을 통해 나라에서 직접 종교를 통제하고 있었으며, 북미왕국 교과서의 내용 중 일부는 성경과 대치되는 내용이라 교황청이나 종교인들이 문제를 제기해도, 북미왕국에서는 들은 체도 안 하다 보니, 교황청은 내부적으로 북미왕국을 이교도 국가로 분류하고 있었다.

다만 북미왕국의 국력이 약하거나 유럽 인근의 국가라면 모를까, 북미왕국의 국력은 오스만 제국 이상이고, 북미왕국은 아예 다른 대륙에 존재하는 나라다 보니 괜히 북미왕국을 적대해 적을 늘리기보다는 아예 북미왕국과 거리를 두고 있었고.

이를 떠올린 정성국이 조용한 곰의 말에 상황을 이해하고 탄성을 내뱉자, 조용한 곰이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헝가리 지역에 배치된 오스만 제국군이 보유한 신식 소총은 2만 자루인데, 신성로마제국 역시 2만 자루의 신식 소총을 보유하고 있잖습니까.”

“아.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병력의 수는 엇비슷하고, 신성 동맹의 병력 규모가 조금 더 크니 유리한 것은 신성 동맹이다?”

“예. 최소한 신성 동맹에서는 그렇게 판단하고 그동안 아국과 거리를 둔 것으로 보입니다. 헌데 저 크림 반도의 상황이 바뀌면서 신성 동맹이 꽤 다급해진 모양입니다.”

“음?”

조용한 곰이 크림 반도를 언급하자 정성국은 고개를 갸웃하며 빨리 설명해 보라는 눈빛을 보냈고.

이에 조용한 곰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 러시아 차르국이 오스만 제국과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더군요.”

“어? 아...”

빈을 공격했던 오스만 제국이 패배해 물러나고, 여기에 신성 동맹이 결성되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시작하자, 그리고 오스만 제국이 신성 동맹을 막기 위해 정예병들을 헝가리 방면으로 보내자 러시아 차르국은 지금이 손쉽게 영토를 넓힐 기회라고 판단해 곧바로 병력을 동원, 오스만 제국의 속국인 크림 칸국을 공격했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기겁하며, 추가로 지원군을 편성해 파견하는 동시에 북미왕국이 넘겨주기로 했던 신식 소총의 납기일을 앞당기고, 추가로 신식 소총을 구매하고자 했고.

결국, 오스만 제국은 쿠웨이트 지역을 북미왕국에 넘기는 조건으로, 나중에 받기로 했던 신식 소총 1만 자루와 추가로 구매한 5천 자루를 합한 1만 5천 자루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1만 5천 자루의 신식 소총은 곧바로 크림 반도로 보내져,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오스만 제국군은 남하하는 러시아 차르국을 격파할 수 있었고.

다만, 러시아 차르국의 지휘관들이 꽤 유능한 편이었는지, 피해를 최소화하며 이전의 국경인 드니프르 강으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고, 덕분에 오스만 제국은 드니프르 강에서 러시아 차르국과 대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말에 동유럽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고 중얼거렸다.

“결국, 러시아 차르국과 오스만 제국이 맺은 휴전 협정으로 러시아 차르국을 상대하던 오스만 제국의 병력마저 헝가리 방면으로 이동하면, 신성동맹이 밀릴 공산이 크니, 교황청이 자존심을 꺾은 건가?”

“예. 특히, 신성로마제국이 교황청을 강하게 압박한 모양입니다. 오스만 제국의 지원군이 헝가리 지역에 도착하면 오스만 제국의 기세가 다시 살아날 테고, 그렇게 살아난 오스만 제국의 기세를 꺾지 못하면 또다시 빈이 포위당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이에 정성국은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미 헝가리 지역에 배치된 오스만 제국군이 2만 자루의 신식 소총을 보유하고 있었고, 크림 반도에 배치된 오스만 제국군이 1만 5천 자루의 신식 소총을 보유하고 있으니, 크림 반도에 배치된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병력이 헝가리 지역으로 이동하면, 오스만 제국은 대략 3만 5천 명의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병력을 확보하게 되며, 신성 동맹에서 보유하고 있는 신식 소총이 2만 자루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생각보다 격차가 컸다.

단순히 사격 속도만 고려해 계산한다 하더라도, 신식 소총과 머스킷의 차이는 최소 3배였으니,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오스만 제국군 1만 5천 명을 상대하려면 머스킷 병 4만 5천 명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신성 동맹과 오스만 제국군의 병력 차이는 그리 큰 편이 아니었고, 여기에 오스만 제국에서 추가로 지원군을 보내면 병력 차이는 더 줄어들 테니.

결국, 오스만 제국군의 지휘관이 삽질만 하지 않는다면,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에서 신성 동맹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다시 빈을 공격할 수 있을 텐데, 이렇게 되면 과연 신성로마제국이 빈을 지킬 수 있을까 싶은 정성국이었고.

해서 정성국은 예전에 정한 신성 동맹에는 신식 소총을 판매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바꿔야 하나 싶어 이를 조용한 곰과 논의하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정말로 빈이 위험하면,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인 에스파냐가 도와줄 테니까요.”

“아...그러고보니 에스파냐가 있었지?”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이 탄성을 질렀다.

물론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 가문과 에스파냐계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이가 썩 좋은 것은 아니긴 한데, 빈은 유럽의 중심지이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이니만큼, 이곳을 오스만 제국이 점령하도록 놔둘 것 같지는 않았다.

더불어 에스파냐가 교황청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이번 신성 동맹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대프랑스 전쟁에 참여해 막대한 전비를 소모했기 때문인데, 이걸 달리 해석하면 재물을 이용해 에스파냐를 신성 동맹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고.

이런 정성국의 해석에 조용한 곰이 동의하면서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신성 동맹에 추가로 신식 소총을 판매한다면, 오스만 제국이 반발할 텐데, 저희가 그걸 감수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긴 하지. 특히 쿠웨이트 지역이 걸리는군.”

북미왕국은 오스만 제국과 협상해 쿠웨이트 지역을 확보했지만, 아직 북미왕국은 인도 지역에 진출하지 못했다.

거기에 쿠웨이트 지역은 페르시아 만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었기에 이를 관리하려면 천상 인도 지역의 진출이 끝난 이후여야 했고.

해서 북미왕국이 인도 지역에 진출하기 전까지 쿠웨이트 지역의 관리를 오스만 제국에 맡겼고, 오스만 제국은 이 지역을 성심껏 관리해주고 있었다.

북미왕국과의 무역으로 얻는 이득이 크기도 했고,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국가라 정치적인 이유로 오스만 제국과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프랑스를 제외하면 대부분 적대 관계에 가까웠으니, 북미왕국처럼 강대국과 우호 관계를 맺는 것이 나쁠 것은 없었기에.

헌데 북미왕국에서 신성 동맹에 추가로 신식 소총을 판매하면,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가 틀어질 테고, 어쩌면 나중에 쿠웨이트 지역을 장악하는 데도 문제가 생길 수 있고.

해서 정성국이 신성 동맹에 신식 소총의 판매하지 말라고 결정을 내리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하.”

그 후 조용한 곰이 자리에서 일어나다 문득 정성국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전하.”

“음? 또 보고할 것이 남았나?”

“예. 앙골라 장가를 비롯해 여러 동맹국에서 사절을 파견하고 싶어합니다만 어쩔까요.”

그 말에 정성국은 한숨을 내쉬었다.

북미 신문에 유럽의 친선 사절단 소식이 실리면서, 다른 동맹국들도 추가로 친선 사절단을 보내고 싶어하는 분위기라는 것은 이미 파악했기에.

“후우...허락해야지 어쩌겠어. 다만, 최대한 외무청에서 접대하는 것으로 하지.”

이번에 친선 사절단을 접대하느라 고생한 정성국이 급히 덧붙이자 조용한 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