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754화 (754/850)

#754

정성국이 밀려 있던 보고서를 모두 처리한 후 커피와 함께 오랜만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을 때, 조용한 곰이 집무실을 방문해 용건을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역시나 하는 얼굴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얼굴로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흠. 찰스 2세의 건강이 많이 안 좋다고?”

일전에 요크 공작이 비밀리에 런던에 있는 북미왕국 대사관을 방문해, 북미왕국에서 실력이 뛰어난 의원을 초청하고 싶다고 요청했고, 정성국은 뒤늦게 이를 보고받고 찰스 2세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찰스 2세의 건강 문제가 아니고서야 요크 공작이 비밀리에 북미왕국의 의원을 초청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더불어 전생에서 찰스 2세가 병으로 사망한다는 것과 요크 공작이 친선 사절단의 대표로 북미왕국을 방문했을 때, 찰스 2세의 안부를 묻는 정성국에게 자신의 형인 찰스 2세의 컨디션이 썩 좋지 않다는 말을 했었으니, 종합해보면 자신의 존재로 역사가 틀어져 수명마저 바뀐 케이스 중 하나인 찰스 2세의 수명이 그리 연장되지는 않은 건가 싶었고.

그리고 북미왕국이 정성국의 예상보다 더 빠르게 북미 대륙 전체를 영토로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찰스 2세가 북미 동해안 지역의 식민지를 지키기보다는, 북미왕국에 판매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인 만큼, 정성국은 잉글랜드를 볼 때마다 전생의 잉글랜드를 떠올리며 내심 경계하는 것과는 별개로 찰스 2세에게는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정성국은 조용한 곰에게 요크 공작의 요청을 받자마자 김 의원의 제자 중 실력이 좋기로 소문난 이한솔을 잉글랜드로 보내면서, 이 의원이 부디 찰스 2세를 치료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헌데 조용한 곰이 찰스 2세의 건강이 무척 좋지 않다고 보고하자 정성국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번에 찰스 2세의 요청을 받고 런던을 방문한 이 의원이 찰스 2세를 직접 진찰했는데, 신장에 문제가 있다더군요.”

“신장에?”

“예. 작년부터 찰스 2세의 건강이 썩 좋지 않은 것 같다는 소문이 들려오지 않았습니까? 그게 다 신장에 이상이 생겨서 그런 거였답니다.”

신장이 망가지면 고치기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정성국은 안타깝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다가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작년부터 신장에 이상이 있었다라...그걸 찰스 2세도, 잉글랜드의 왕실 주치의도 파악하지 못한 건가?”

물론 정성국도 전생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건강 상태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작년부터 병이 진행된 거라면, 본인이나 왕실 주치의는 눈치채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고.

이에 조용한 곰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찰스 2세야 몸이 안 좋으니 이상하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왕실 주치의가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하니 그냥 넘어간 모양입니다. 그러다, 이번에 요크 공작이 강력히 주장해서 아국의 의원을 초청했던 것이고요.”

“흠. 그럼 왕실 주치의가 문제라는 건데...아. 설마 잉글랜드의 왕실 주치의는 아국의 의학을 배운 이가 아닌 건가?”

정성국이 알기로 처음에야 유럽의 상식과 어긋난 북미왕국 의학에 의구심을 품었지만, 종두법을 통해 천연두의 공포에서 벗어나면서 유럽은 북미왕국의 의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북미왕국의 국력이 알려지면서 유럽 왕실에서는 북미왕국의 의학 수준이 유럽의 의학 수준보다 높다고 여겨 북미왕국에서 의학을 배워온 이들을 왕실 주치의로 임명하기 시작했고.

다만 모든 유럽의 왕실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일부 왕실에서는 이들의 친북미왕국 성향을 경계해 유학생들을 배제하기도 했으니까.

해서 정성국은 혹시 잉글랜드의 왕실 주치의가 이런 경우인가 싶어 조용한 곰에게 묻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아국의 의학을 배우기 위해 처음으로 아국을 방문한 잉글랜드의 의원 중 한 명이었답니다. 다만...”

“다만?”

“뭐랄까...실력보단 인맥으로 왕실 주치의 자리를 따낸 것 같더군요. 거기에 왕실 주치의에 오른 이후엔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공부보다는 인맥을 다지는 데 집중한 모양이고요.”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북미왕국을 방문했다면, 거의 10년 전에 북미왕국에서 의학을 공부했다는 뜻이다.

헌데 10년 전만 하더라도 북미왕국 의학은 일부 특출난 부분은 있었지만, 그 외에는 걸음마 수준인 부분도 많았기에,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도 많았다.

거기에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것과는 별개로, 병원에서 환자들을 진료하고 치료하며 배우는 것도 많았고.

그러니 처음에 북미왕국을 방문해 의학을 배운 유학생 출신이라면, 아무래도 실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고, 이 부족한 실력을 키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했지만, 조용한 곰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찰스 2세의 왕실 주치의는 북미왕국을 방문해 의학을 배웠다는 타이틀을 획득한 후 인맥으로 왕실 주치의 자리를 따내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공부해 의학 수준을 높이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인맥을 다지는 데 집중한 것 같았기에 정성국은 입맛이 썼다.

다만, 초창기 북미왕국의 외국인 유학생들은 북미왕국의 의학을 배워 더 많은 사람을 살리겠다는 숭고한 사명감을 지닌 이들보다는, 왕실 주치의 자리나 귀족들을 치료하며 막대한 돈을 벌 목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대서양을 횡단했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그저 혀를 쯧쯧 찬 후 질문을 던졌다.

“치료는 가능하다던가?”

“발견이 너무 늦어 신장이 많이 망가졌고, 덕분에 치료는 어려울 것 같다고 하더군요.”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역시나 하는 얼굴로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전생에서야 신장이 많이 안 좋아도, 투석이나 신장을 이식해 병을 치료할 수 있지만, 현재 북미왕국의 의학 수준으로 망가진 신장을 고치긴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해서 정성국은 안타까움이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쩝. 생각해보면 찰스 2세는 우리에게 호의적이었는데, 안타까운 일이야. 좀 실력 있는 친구를 왕실 주치의로 둘 것이지.”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튼, 왕실 주치의의 진단이 완전히 틀렸기에, 요크 공작은 이 의원이 계속 찰스 2세를 맡아주었으면 하더군요.”

“그야 그렇겠지. 왕실 주치의의 실력을 더는 믿을 수 없을 테니 말이야. 다만 찰스 2세가 사망하면 이 의원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을 것 같아 그게 조금 걸리는데...”

원래 왕이 병으로 죽으면 왕실 주치의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비슷했고.

헌데 괜히 이 의원이 계속 찰스 2세를 담당하다, 찰스 2세가 사망한 후 이 의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 여러모로 골치 아팠기에 정성국이 미리 걱정하자 조용한 곰이 괜찮다는 얼굴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요크 공작이 약속했습니다. 이 의원이 찰스 2세를 치료하지 못하더라도 절대로 책임을 전가하지 않겠다고요.”

그 말에 정성국은 잠깐 고민하다 결국 요크 공작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요크 공작이 새한성을 방문했을 때,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한 입으로 두말하는 인사는 분명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요크 공작은 처음부터 북미왕국에 호의적인 편이었지만, 일정에 따라 새한성 곳곳을 둘러본 후에는 북미왕국의 국력을 체감하고 돌아가기 전 정성국을 만났을 때는 호의보다는 경외에 가까운 눈빛을 보였기에, 이 의원에게 책임을 전가해 북미왕국과의 관계를 어그러트리지는 않을 것 같았고.

“그럼 상관없겠지. 최선을 다해 치료하라고 하게.”

정성국의 승낙에 조용한 곰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 바로 덧붙여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찰스 2세는 합법적인 자녀가 없지 않습니까.”

찰스 2세의 자식은 많지만, 다들 사생아였다.

그리고 서양의 왕위 계승법에 따르면 사생아는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고.

이를 잘 알고 있는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해서 찰스 2세가 사망하면 결국 잉글랜드의 왕위는 요크 공작에게 넘어갈 테고.”

“헌데 요크 공작은 이번 일로 잉글랜드 의원들의 실력을 믿지 못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의원을 아예 왕실 주치의로 고용하고 싶어하더군요.”

“음? 이 의원을 왕실 주치의로?”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말에 조금 당황했다.

물론 이 의원의 의술 실력은 확실했다.

김 의원의 애제자 중 한 명으로 새한성 대학교 부속 병원에서 근무하며 수많은 환자를 살렸으니.

그러나 왕실 주치의는 의술 실력만으로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왕정 시대에 왕의 건강은 무척 중요했기에 왕의 건강을 책임지는 왕실 주치의는 정말 믿을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왕실 주치의가 마음만 먹는다면 왕을 해칠 수도 있었고, 왕의 건강과 관련된 정보를 퍼트려 나라를 혼란하게 만들 수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일부 유럽 왕실에서는 북미왕국에서 의술을 배워 온 유학생들이 친북미왕국 성향을 보이자, 이들을 왕실 주치의로 임명하면 북미왕국에 정보를 팔아넘기지 않을까 우려해 아예 배제하기도 했고.

헌데 요크 공작은 무려 외국인인 이 의원을 왕실 주치의로 임명하고 싶어 한다고 하니 정성국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은 정성국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요크 공작은 그만큼 아국과 이 의원을 신뢰하는 모양입니다.”

정성국이 요크 공작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를 파악한 것처럼, 요크 공작 역시 정성국과 이야기를 나누며 정성국의 성향을 파악했고.

그렇기에 요크 공작은 이 의원을 왕실 주치의로 임명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리라 확신했다.

요크 공작이 파악한 정성국은 만약 잉글랜드가 거슬리면, 병력을 동원해 정면에서 잉글랜드를 격파할 인물이지, 뒤에서 더러운 수법을 사용할 인물은 아니었으니까.

더불어 정성국은 유럽을 괜찮은 시장 정도로 생각할 뿐이지, 유럽을 점령할 의사는 전혀 없기도 했고.

그렇기에 요크 공작은 정성국을 믿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 의원을 왕실 주치의로 고용하려 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우리를 신뢰한다니 고맙긴 한데, 이 의원 같은 인재를 타국에 내주는 것은 또 아쉬운데...”

김 의원도 슬슬 나이가 나이인지라, 예전처럼 정력적으로 밤늦게까지 환자를 보거나, 연구에 전념하긴 어려웠다.

그걸 김 의원도 잘 알기에 제자들을 키우는 데 집중했고, 두각을 드러내는 이들 중 하나가 바로 이 의원이었기에, 정성국으로서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이 슬쩍 입을 열었다.

“그래도 잉글랜드와의, 그리고 차후 잉글랜드의 국왕이 될 요크 공작과의 우호 관계를 생각하면 이 요청은 들어주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요크 공작은 이 의원을 왕실 주치의로 고용해 자신의 건강을 관리하는 일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의원들의 교육도 맡기고 싶어 하는 지라...”

“흠. 그럼 이 의원의 의사를 물어보고, 본인이 원한다면 허락하게. 아니라면 거절하거나, 혹은 잉글랜드 왕실 주치의 자리를 원하는 다른 의원으로 교체하도록 하고.”

반쯤 승낙한 정성국의 대답에 조용한 곰이 만족한 얼굴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전하.”

“그리고...아직 찰스 2세의 소식이 런던 사교가에 퍼진 것은 아니지?”

“예. 사안이 사안이라 일단 찰스 2세도, 그리고 요크 공작도 쉬쉬하고 있다더군요. 다만 이 의원이 계속 궁궐에 드나들기도 하고, 왕실 주치의가 감금된 상황이기도 하고, 찰스 2세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기에 오래 숨기진 못할 겁니다.”

이에 정성국은 한숨을 내쉬며 명령을 내렸다.

“찰스 2세의 건강이 안 좋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분명 런던은 시끄러워질 걸세. 그러니 런던에 주재하는 북미왕국 대사에게 무슨 일이 발생하면 바로 보고하라고 전하게.”

요크 공작은 가톨릭을 믿다 보니, 개신교를 믿는 잉글랜드 귀족들은 요크 공작을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해서 전생에선 결국 요크 공작의 사위인 빌럼 3세를 끌어들여 요크 공작을 퇴위시키기도 했고.

허나 네덜란드는 이미 북미왕국과 동맹을 맺어 전생처럼 잉글랜드 귀족들이 네덜란드를 끌어들이지 못할 테니, 어쩌면 요크 공작의 등극을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기에, 정성국이 이를 설명하자 조용한 곰이 일리가 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흠.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로군요. 그리고 요크 공작이 아국에 무척 우호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요크 공작이 잉글랜드의 왕인 것이 우리 입장에선 낫기도 하고요. 알겠습니다. 런던에 주재하는 북미왕국 대사에게 이야기해두겠습니다.”

“그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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