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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749화 (749/850)

749화

안토니오 후작은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았지만, 친선 사절단의 대표들은 안토니오 후작이 원하는 것을 얻었음을 눈치챘다.

이전까지는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조급한 기색이 역력했던 안토니오 후작의 분위기가 정성국과 티타임을 가진 직후부터 사라졌으니까.

더불어 아직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잉글랜드, 프랑스, 포르투갈 친선 사절단의 일원이나 대사들을 보는 시선에는 자그마한 우월감이 자리 잡고 있기도 했고.

그러니 잉글랜드의 요크 공작이나 프랑스의 앙주 공작, 포르투갈의 기마랑이스 공작은 더욱 몸이 달아 정성국과 이야기를 나누길 원했고.

해서 정성국은 차례차례 이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며, 저들이 원하는 것 가운데 들어줄 수 있는 것은 들어주고, 불가능한 요구는 내쳤고, 결국 잉글랜드와 프랑스, 포르투갈 역시 다른 나라들처럼 유학생을 북미왕국에 보낼 수 있게 되었고, 북미왕국과의 교역 규모를 대폭 늘릴 수 있게 되었으며, 포르투갈의 경우에는 증기기관 기술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헌데 이렇게 정성국이 마치 호구처럼 다른 나라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준 것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먼저 잉글랜드의 경우, 친선 사절단의 대표가 찰스 2세의 동생인 요크 공작이다 보니, 미래를 위해 그에게 호의를 사 두는 것도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찰스 2세는 사생아는 많았지만, 합법적인 자식이 없다 보니, 찰스 2세가 사망하면 잉글랜드의 왕위는 자연히 동생인 요크 공작에게 돌아가기에.

물론 자신의 존재로 인해 역사가 많이 틀어진 상태라, 이미 사망했어야 하는 찰스 2세도 아직 살아있기는 한데, 찰스 2세나 캐서린 왕비의 나이를 생각하면 합법적인 자식이 태어날 확률은 전무했고, 잉글랜드에 주재하는 북미왕국 대사의 보고에 따르면, 최근 찰스 2세의 건강이 썩 좋아 보이진 않는다고 하니, 정성국이 보기엔 시기만 조금 늦춰질 뿐이지, 요크 공작인 제임스 2세가 전생처럼 잉글랜드의 국왕이 될 것으로 판단했고.

그러니 미리 요크 공작의 호의를 사 두어 요크 공작이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을 때, 북미왕국과 잉글랜드가 더 긴밀한 관계가 되기를 바란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의 경우에는 루이 14세가 눈엣가시로 여겼던 네덜란드가 북미왕국과 동맹을 맺으면서, 더는 네덜란드를 건드릴 수 없게 되자 프랑스는 내심 북미왕국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여기에 프랑스가 그동안 공을 들였던 스웨덴 역시 결국 북미왕국과 동맹을 맺으면서 더는 동맹이라는 명목으로 스웨덴을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이용하기가 어려워졌기에 프랑스는 북미왕국의 외교 정책에 반발했다.

자연히 북미왕국과 프랑스의 관계는 꽤 경색된 상태였고

그렇다고 북미왕국의 힘을 잘 아는 프랑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겠지만, 현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프랑스와 계속 이렇게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봐야 좋을 것은 없었기에 정성국은 기왕 프랑스가 친선 사절단을 파견한 김에 저들이 원하는 것을 일부 들어줌으로써 경색된 관계를 어느 정도 풀고자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포르투갈의 경우는 전생에서 포르투갈이 19세기까지 나름대로 제국이라 불리며 어깨에 힘을 줄 수 있도록 부를 제공해 주었던 브라질 지역을 독립시켰기에, 그리고 이 브라질 지역에서 금, 은 같은 귀금속이 발견되어 조약을 통해 브라질 지역의 권리를 모두 포기한 포르투갈 대사가 무척이나 배 아파하면서 투덜대기에,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는 심정으로 이를 내어주었고.

다만 증기기관 기술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원래 정성국은 포르투갈에 증기기관 기술까지 내어줄 생각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스웨덴처럼 증기기관을 빌미로 포르투갈을 동맹으로 끌어들일 생각이었달까.

정성국은 예전에 조용한 곰이 이야기한 것처럼 동맹국을 늘려 강제로 유럽을 평화롭게 만들 생각이었으니.

헌데 이런 정성국의 생각이 바뀐 것은 기마랑이스 공작이 증기기관 기술의 대가로 아조레스 제도의 섬 하나를 내어주겠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아조레스 제도는 대서양 한가운데 위치한 화산섬으로 중간 기착지로서의 가치가 꽤 높은 섬들이었지만, 북미왕국은 대서양을 횡단할 때,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를 거치는 항로를 주로 이용했기에, 그동안은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번에 두루미급 비행기의 개발로 북미왕국에서도 이 대서양 한가운데에 있는 아조레스 제도에 관심을 줄 수밖에 없었고.

북유럽 지역이면 그나마 덜한데, 남유럽 지역의 경우는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를 거쳐 비행하면 빙 돌아가게 되는 터라 이 아조레스 제도를 중간 기착지로 이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으니까.

특히, 이번에 직접 비행기를 타본 친선 사절단의 대표들은 비행기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며, 그동안은 북미왕국의 요청에도 허용하지 않았던 수도 인근에 공항을 세우는 것을 허용했기에, 정성국으로서는 이 아조레스 제도가 탐났고.

해서 기마랑이스 공작과 협상을 통해 아조레스 제도의 섬 하나를 받는 조건으로 증기기관 기술을 내어주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새한성을 방문한 친선 사절단들은 나름의 성과에 만족하며 끝까지 일정을 소화한 후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고, 정성국은 이들을 배웅하고자 다시 매일같이 공항에 나가야 했다.

* * *

“잘 가라.”

크리스티안 5세를 배웅하기 위해 공항까지 나온 정성국이 활주로 끝에서 덴마크 친선 사절단이 탑승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비행기들을 보며 시원섭섭하다는 표정으로 작별 인사를 하자, 크리스티안 5세가 정성국으로 보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리고 고맙다. 덕분에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

“아. 여행객들 말이지? 알았다. 크게 어려운 것은 아니니까.”

크리스티안 5세는 이번에 새한성을 방문해 많은 것을 보고 여러 가지를 느낄 수 있었고, 자신을 따라 함께 움직인 수행원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수행원들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해서 크리스티안 5세와 수행원들은 덴마크의 발전을 위해 유학생을 북미왕국에 보내는 것 이외에도, 조선이 매년 새한성에 조선 사절단을 보내는 것에 착안해 조선처럼 관리나 귀족들을 주기적으로 새한성으로 보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면서, 크리스티안 5세가 친분을 이용해 정성국을 설득하길 원했고.

이에 크리스티안 5세는 조선과 특별한 관계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같은 동맹국끼리 차별하면 안 되지 않으냐면서 자신들도 매년 친선 사절단을 보내고 싶다고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조선의 경우 따로 전권 대사를 파견하지 않았기에 이를 허용했던 거라며 선을 그었다.

조선 사절단도 조선 사절단이지만, 시베리아 부족 연합, 호주 연합 등도 점차 국가로서 구색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북미왕국의 정치, 행정 체계를 따르고자 각 부족의 후계자들이나 똑똑한 젊은이들, 혹은 관리들로 사절단을 구성해 보내왔으며, 북미왕국과 교류하는 남태평양의 부족들도, 최근 북미왕국과 교류를 시작한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사절단을 보내오는 터라 이들을 대접하느라 외무청의 업무가 폭증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크리스티안 5세도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동안 북미신문이나 덴마크 대사를 통해 파악한 정보로 북미왕국을 알고 있다고 여겼지만,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둘러본 것은 전혀 달랐으니까.

동양의 속담 중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구나 싶을 정도였으니.

해서 크리스티안 5세는 같은 동맹국인 네덜란드의 빌럼 3세와 내키진 않지만 칼 11세까지 끌어들여 함께 정성국을 압박했고.

덕분에 정성국은 조용한 곰과 상의한 후, 매년 일정 수의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관리들의 북미왕국 방문을 허용하기로 했다.

다만 공식적인 사절이 아니라 여행객의 신분으로 말이다.

사절이라면 외무청에서 이들의 체류를 위해 숙소를 잡고, 일정을 관리해야 했지만, 여행객의 신분이라면 외무청에서 신경 쓸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에 크리스티안 5세를 비롯해 빌럼 3세와 칼 11세는 나쁘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어차피 새한성에 대사관이 설립되어 있기에, 대사관의 직원들이 새한성을 방문할 이들을 관리하면 그만이었으니.

다만 중요한 것은 이번에 자신들이 새한성의 여러 시설을 방문한 것처럼 공방, 조선소, 제철소, 학교 같은 시설을 여행객의 신분으로 방문할 수 있는가였고.

이에 정성국은 바로 승낙했다.

그 정도야 크게 어려울 것은 없는 문제였으니까.

해서 정성국이 크리스티안 5세의 말에 걱정하지 말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크리스티안 5세가 환하게 웃었다.

“하하하. 고마워. 그리고 나중에 또 방문해도 되지?”

“...응? 또 오게?”

정성국이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크리스티안 5세를 바라보았다.

물론 이번에 친선 사절단들이 북미왕국을 방문해 얻은 이득도 많긴 했다.

먼저 친선 사절단의 대표들이 각국의 군주들이나 군주들의 최측근이다 보니, 여러 가지 현안에 대해 깊이 논의할 수 있었고, 덕분에 외무청에서 원했던 공항의 건설이라던가, 해저 통신선 부설 같은 문제들을 원론적으로 합의할 수 있었으니.

그리고 매일 같이 연회를 열어 자리를 마련해 주었기에 친선 사절단의 대표들끼리 어느 정도 친분을 쌓을 수 있었고, 이들 중 상당수가 군주거나 군주의 최측근이니만큼, 앞으로 유럽의 분쟁이 조금 잦아들지 않을까 싶었고.

또한, 아무리 동맹국이라지만 타국의 군주가, 그것도 하나가 아니고 셋이나 직접 북미왕국을 방문해 정성국과 친분을 쌓으려 하고, 또 북미왕국의 여러 시설을 시찰하며 이를 통해 무언가를 배우고자 하니, 이를 알게 된 북미왕국의 백성들은 더욱 북미왕국의 발전에 자부심을 품게 되었고, 유럽 세력을 은근히 경계하던 아시아의 국가들은 이 군주들이 북미왕국에 입조한 것으로 여기고 북미왕국의 강력함을 더욱 높게 평가하며, 이전보다 더욱 북미왕국에 우호적으로 나왔으니.

다만 그만큼 일은 많아졌고, 여기에 정성국은 업무보단 친선 사절단의 대표들과 면담하고 만찬이나 연회에 참석해 친분을 쌓느라 그가 처리해야 할 업무가 쌓이고 있었기에, 정성국으로서는 크리스티안 5세의 방문을 마냥 환영하기엔 조금 어려웠고.

이런 정성국의 반응에 크리스티안 5세가 실소하며 말했다.

“야. 반응이 그게 뭐냐. 서운하다.”

“어휴. 이번에 너 가고 나면 최소 한 달은 밤늦게까지 밀린 업무들을 처리해야 하는데 좋은 반응이 나오긴 어렵지 않겠냐.”

정성국의 대답에 크리스티안 5세는 조금 미안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그건 조금 미안해. 헌데 이번에 직접 새한성을 방문해 보니, 깨달은 게 워낙 많아서 말이야. 나도 그렇고, 수행원들도 그렇고.”

“그건 아는데...다음에 방문하면 지금 같은 충격은 없지 않을까? 그러니 딱히 무언가를 깨닫지도 못할 테고...”

그러니 또 방문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시선을 보내는 정성국을 보고 크리스티안 5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 북미왕국의 발전이 좀 빨라야지. 덴마크 대사의 말을 들어보니 북미왕국의 발전이 엄청 빨라서 새한성의 풍경이 매년 휙휙 바뀐다던데?”

“끙...”

“아. 그리고 다음엔 꼭 아들 녀석과 함께 올 생각이야.”

“아들이면...장남?”

“그래. 그 녀석도 새한성을 방문해 보면, 느끼는 게 많을 것 같거든.”

크리스티안 5세의 장남인 프레데리크를 거론하자, 정성국 역시 크리스티안 5세의 말에 공감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데리크는 크리스티안 5세의 후계자이니만큼, 크리스티안 5세의 말처럼 직접 북미왕국을 방문해 여러 곳을 둘러보는 것이 훗날 프레데리크가 덴마크를 통치할 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으니까.

“아. 그리고 나중에 내 자식을 유학생으로도 보낼 생각이니까 그때도 잘 부탁하고.”

크리스티안 5세에게는 장남인 프레데리크 말고도 여러 자식들이 있었는데, 크리스티안 5세는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북미왕국에서 공부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이렇게 이야기하자 정성국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크리스티안 5세를 바라보았다.

“니 자식들 아직 어린애다. 뭔 벌써 대학 소리를 하고 있어.”

“푸하하. 미리미리 이야기해두는 거지.”

“그건 그때 가서 다시 말하고. 빨리 타기나 해. 너만 타면 바로 이륙할 것 같으니.”

정성국이 크리스티안 5세와 대화하는 사이, 다른 수행원들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비행기들에 탑승한 상태였기에 정성국이 크리스티안 5세를 타박하자 크리스티안 5세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알았어. 다음에 방문할 때까지 잘 지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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