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8화
“흐음. 그럼 새한성에서의 일정이 끝나면 바로 에스파냐 본국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응접실에서 전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이었던 안토니오 후작과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던 정성국이 질문을 던지자 안토니오 후작이 조금은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솔직히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오랫동안 지내 왔기에,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여생을 마무리하고 싶었지만 어쩌겠습니까. 본국에서 복귀 명령이 내려왔으니 따라야지요.”
보통의 경우 식민지의 총독은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머물지 못했다.
반란의 우려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식민지는 본국과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반란이 일어나면 이를 제압하는 데 많은 수고를 들여야 했다.
그러니 본국에선 식민지의 반란을 무척이나 경계할 수밖에 없었는데, 식민지 총독이 오랫동안 한 지역에서 머물며 그 지역을 완전히 장악해버리면, 이를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커지기에 보통은 총독의 임기를 제한하거나, 혹은 주기적으로 본국에서 총독을 교체함으로써 이러한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했고.
다만 안토니오 후작의 경우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안토니오 후작은 부왕이었을 때, 북미왕국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편지를 통해 북미왕국의 국왕인 정성국과도 친분을 쌓았고, 그러다 보니 에스파냐에서 정성국과 친분을 쌓은 유일한 인물이 되었는데, 북미왕국의 국력이 날이 갈수록 강해지자 에스파냐 본국에서는 정성국과 나름 친분을 쌓은 안토니오 후작을 불러들이기가 조금 애매했던 탓이다.
거기에 안토니오 후작의 충성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고, 안토니오 후작의 나이가 있다 보니, 처음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으로 임명되었을 때, 이미 가정을 이루어 에스파냐에 자리 잡은 자식들은 놓고 부인과 단둘이 떠났기에, 일종의 인질까지 잡고 있는 셈이었고.
이런 것들이 겹쳐 안토니오 후작은 20년 넘게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 자리를 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안토니오 후작의 영향력은 강하다는 소리였고.
그러니 안토니오 후작이 누에바 에스파냐에 머무른다면, 후임이 누에바 에스파냐를 장악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고, 잘못하면 허수아비가 될 수도 있기에 에스파냐 본국에서는 안토니오 후작을 불러들인 것이고, 안토니오 후작 역시 이를 알기에 아쉬워할지언정 본국의 복귀 명령에 바로 따른 것이다.
그리고 정성국은 이를 눈치채고 안토니오 후작을 위로하기 위해 그를 슬쩍 추켜세웠다.
“아. 에스파냐 본국의 결정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누에바 에스파냐를 20년 넘게 별 탈 없이 통치해온 것을 높이 평가해 본국에 두고 조언을 구하고자 불러들이는 거겠지요. 저라도 그럴 겁니다.”
이에 안토니오 후작은 정성국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을 깨닫고, 이번 일정이 끝나면 다시는 얼굴을 보기 힘들 정성국과의 마지막을 이런 우울한 분위기로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아쉬운 기색을 훌훌 털어내고 분위기를 바꿀 겸 웃음을 터트리며 대꾸했다.
“허허허. 이걸 좋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나쁘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 말씀은 본국에 돌아가도 은퇴하지 못하고 일을 해야 한단 소리 아닙니까.”
“은퇴는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그동안 꾸준히 일해오다가 갑자기 쉬게 되면 오히려 건강에 안 좋습니다.”
정성국이 웃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자 안토니오 후작은 질색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휴. 끔찍한 말씀이십니다.”
“하하하.”
그렇게 정성국은 안토니오 후작을 조금 더 달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새로운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인 멜키오르 부왕은 어떤 인물입니까?”
정성국과 나름대로 친분을 쌓았기에, 안토니오 후작 역시 정성국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해주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는 멜키오르 부왕을 잘 알지 못했기에 어깨를 으쓱했다.
“흠. 저도 그 친구를 잘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군 출신이고 이전까지는 보병, 기병 지휘관으로 전장을 전전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지요.”
“음? 정치가나 행정가가 아니라...군인을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으로 보냈다고요?”
“저도 조금 의외이긴 했습니다. 누에바 에스파냐 지역은 모두 개척되었고, 또 충분히 안정된 지역이라 보통은 정치가나 행정가 출신을 부왕으로 임명하니까요.”
“흐음...”
안토니오 후작의 말처럼 처음 식민지를 개척하거나 혹은 원주민들의 반란이 우려되는 식민지라면 군인 출신의 총독을, 그리고 식민지 개척이 끝나 어느 정도 안정된 지역이라면 정치가나 행정가 같은 문관 출신의 총독을 임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만큼, 누에바 에스파냐가 군인 출신 총독을 파견했다면, 에스파냐의 정책이 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정성국이 표정을 살짝 굳혔고.
안토니오 후작은 이를 눈치채고 바로 입을 열었다.
“아. 그래도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멜키오르 부왕과 잠깐 이야기를 나눠보니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런가요?”
안토니오 후작은 에스파냐에서 북미왕국의 강력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안토니오 후작은 에스파냐와 북미왕국의 충돌을 바라지 않았다.
해서 안토니오 후작은 자신의 후임인 멜키오르 부왕과 이야기를 나누며, 북미왕국의 강력함을 설명하며 북미왕국과의 분쟁은 절대로 안 된다고 강조했고, 멜키오르 부왕은 그런 안토니오 후작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기에 안토니오 후작은 멜키오르 부왕이 현실을 모르는 인사는 아니라고 이야기하며, 정성국에게 신경쓸 것 없다고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의 주제를 돌렸고, 그렇게 계속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슬슬 저녁 만찬 시간에 가까워지자 안토니오 후작이 커피잔을 내려놓고 정성국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입을 열었다.
“그보다 국왕 전하. 비록 우리 에스파냐가 북미왕국과 동맹을 맺지는 않았지만, 20년 가까이 우호적으로 지내오지 않았습니까. 헌데 네덜란드나, 덴마크, 스웨덴에는 북미왕국의 증기기관 기술을 넘겨주고, 우리 에스파냐는 외면하시니 그동안 북미왕국의 요청을 대부분 들어주었던 저로서는 조금 섭섭하더군요.”
이에 정성국은 안토니오 후작이 왜 이 말을 꺼냈는지 대충 짐작하고 조금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 그건 조금 미안하게 생각합니다만...아무래도 기술 이전의 경우는 그 파급력 때문에 동맹국을 우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에스파냐도 자체적으로 증기기관을 개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잉글랜드가 본격적으로 증기기관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프랑스와 에스파냐 역시 지금까지는 연구만 하던 증기기관을 제작해 어떻게든 활용하고 있었기에, 정성국이 이를 이야기하며 굳이 북미왕국이 유럽의 동맹국에 넘긴 증기기관 기술은 에스파냐에 필요치 않다는 듯한 뉘앙스를 내비쳤지만, 안토니오 후작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 봐야 기초적인 수준에 불과하지요. 어찌 북미왕국의 증기기관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아국이 유럽의 동맹국에 넘긴 증기기관 제작 기술의 수준은 썩 높지 않습니다만...”
“우리 에스파냐의 증기기관 기술의 수준은 그보다 떨어지니 참으로 안타까울 노릇이지요. 해서 말인데, 그동안 양국의 우호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우리 에스파냐에도 북미왕국의 증기기관 기술을 전수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 물론 그에 대한 대가는 치르겠습니다.”
“흐음...”
안토니오 후작의 요청에 정성국은 잠시 고민했다.
일단 증기기관 기술을 미끼로 스웨덴을 동맹으로 끌어들였기에 동맹이 아닌 에스파냐에 증기기관 기술을 넘겨주는 것이 조금 꺼려지긴 했다.
나중에 스웨덴이 문제를 제기하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테니까.
다만 안토니오 후작 덕분에 손쉽게 북미 대륙의 대부분을 얻기도 했고, 또 안토니오 후작이 북미왕국에 호의를 갖고 있었기에, 멕시코 북부 원주민들의 북미왕국 이주를 허용했고, 덕분에 북미왕국 남부 지역을 수월하게 개발할 수 있었기에 정성국은 곧 본국으로 돌아갈 안토니오 후작이 금의환향할 수 있도록 증기기관 기술을 비롯한 몇 가지 선물을 내어주기로 했다.
“좋습니다. 그러도록 하지요.”
“오! 정말이십니까?!”
안토니오 후작은 정성국의 대답에 오히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성국과의 친분을 믿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요청하긴 했지만, 정성국이 이를 흔쾌히 들어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리고 정성국은 그런 안토니오 후작을 보고 말했다.
“그럼요. 약 20년 가까이 아국과 에스파냐가 이렇게 우호적으로 지낼 수 있었던 것에는 분명 경의 공이 컸으니, 일종의 퇴임 선물로 증기기관 기술의 판매를 허락하는 겁니다. 그러니 에스파냐 본국의 귀족들에게 자랑 좀 하세요.”
“허허허. 퇴임 선물이라...”
안토니오 후작이 정성국의 이야기에 조금 감격한 눈치이자 정성국이 슬쩍 덧붙였다.
“그리고 어제 이야기했던 유학생 건도 허용하지요.”
“오오! 그게 정말입니까!”
2일 전 정성국은 크리스티안 5세와 이야기를 나누며, 내년부터 덴마크인을 유학생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었다.
문제는 이 이야기를 나눈 장소가 만찬장이었다는 점이었고.
해서 정성국이 크리스티안 5세와 했던 약속이 알려지자, 다른 친선 사절단의 대표들도 자국의 인재들도 유학생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정성국은 일단 동맹국인 네덜란드, 스웨덴에만 유학생을 허용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외의 나라들에는 확답을 주지 않았었고.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다른 나라들은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북미왕국을 방문해서 북미왕국의 실상을 파악하고 나니, 북미왕국의 학문을 받아들여 더욱 발전하지 못한다면, 결국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기에.
해서 안토니오 후작 역시 위기감을 느끼고, 계속 정성국이 유학생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돌아가 북미왕국과의 동맹을 강하게 건의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고.
헌데 유학생을 허용하겠다는 정성국의 말에 안토니오 후작이 무척 기뻐하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것 역시 퇴임 선물이라고 생각하세요. 예전에 경의 도움으로 유럽의 학자들이나 예술가들을 초청해 종합 대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북미왕국 초기에는 기술자는 있어도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나 예술가들은 부족했었기에, 누에바 에스파냐의 학자들, 예술가들을 초대했었는데, 이때 안토니오 후작이 나서서 도움을 주었었던 것에 대한 보답이라는 정성국의 대답에 안토니오 후작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때 약간 도움을 주었던 것이 이렇게 크게 돌아올 줄은 미처 몰랐군요. 헌데...기왕 퇴임 선물을 주시는 김에 하나만 더 주시면 안 됩니까?”
이에 정성국은 안토니오 후작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깨닫고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음...철도 도입 말이지요?”
그리고 난감해하는 정성국의 얼굴을 보고 안토니오 부왕은 정성국이 어떤 대답을 할지 짐작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을 여는 안토니오 부왕이었다.
“예. 물론 북미왕국에 비해선 작은 영토이긴 합니다만, 우리 에스파냐의 영토도 나름대로 넓은 편이라, 빠르게 물류를 옮길 수 있는 철도가 절실하거든요. 그래서 욕심을 조금 내고 싶습니다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어렵습니다. 방금 말한 것처럼 아국의 영토가 워낙 넓은 터라, 어마어마한 길이의 철도를 부설해야 하니까요. 해서 당장은 타국에 철도를 부설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지요.”
“역시 그렇군요...”
정성국의 대답에 안토니오 부왕이 아쉬운 기색을 드러내자 정성국이 슬쩍 여지를 남겼다.
“다만, 내년에 에스파냐 유학생들이 아국의 건축, 토목 기술을 제대로 익혀 에스파냐로 돌아가 더 많은 건축, 토목 기술자들을 육성하고, 여기에 아국이 돕는다면 가까운 시일 내에 에스파냐도 자체적으로 철도를 부설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기관차야 판매할 수 있고요.”
이에 안토니오 부왕이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그...그러면 가까운 시일 내에 에스파냐에도 철도가 깔리고 기차가 달릴 수 있겠군요!”
“그렇지요. 그러니 너무 아쉬워하지 말고...그때까지 건강을 잃지 마세요.”
정성국이 빙긋 웃으며 오랜 펜팔 친구나 다름없는 안토니오 부왕의 장수를 기원하자 안토니오 부왕이 활짝 웃으며 정성국에게 머리를 숙였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꼭 그러도록 하지요.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 국왕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