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6화
정성국은 늦게까지 진행된 청장 회의가 끝나자, 뻐근한 어깨를 풀기 위해 팔을 돌리고 있었고.
다른 청장들은 정성국에게 인사하고 하나둘 회의실을 빠져나가는데, 관리청장과 외무청장인 조용한 곰은 그 반대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고 의아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따로 보고할 것이라도 있나?”
“예. 다만 급한 일은 아니라서...전하께서 피곤하시다면 내일 보고할까요?”
조용한 곰이 정성국의 안색을 살피며 묻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됐네. 내일 자네들이 집무실을 방문하겠다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지금 보고를 듣는 편이 낫겠지. 말해보게. 무슨 보고인가.”
이에 관리청장은 조용한 곰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라는 듯 눈빛을 보냈고, 조용한 곰은 이러한 관리청장의 눈빛에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그게...이번 조선의 기후도 심상치 않답니다. 해서 원상에서는 올해의 작황도 썩 좋지 않을 것 같다는 보고를 해왔습니다.”
“허. 또 흉작이 예상된다고?”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보고에 표정을 구겼다.
정성국 역시 전생의 기억이 있기에 17세기에 소빙하기로 인한 전 세계적으로 이상 기후가 발생해 피해가 잦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유독 조선에 자주 피해가 발생하는 것 같았기에.
“뭐 우리도 가끔 이상 기후로 피해를 보긴 하지만 북미왕국의 영역은 엄청나게 넓으니 이해가 되는데 조선에서는 왜 이렇게 이상 기후가 심한지 모르겠네. 3년 전에도 그러더니...”
3년 전인 1682년에도 조선에서는 이상 기후로 인해 작황이 좋지 않아 식량난이 발생했었다.
다만 이때는 1670년의 대흉작을 겪었던 조선 정부가 만반의 준비를 해두기도 했고, 이미 조선 팔도에 감자 등 구황 작물을 다수 심었기에 북미왕국에서는 약간의 식량을 지원해주는 것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고.
헌데 또 이상 기후로 인한 피해가 예상된다고 하니 정성국이 어처구니없어하며 중얼거리자 관리청장이 빙긋 웃었다.
“동만주를 확보하면서 조선의 영토도 엄청 넓어지지 않았습니까. 물론 이번 이상 기후는 삼남 지방의 문제긴 합니다만.”
“삼남 지방? 이 시기면...가뭄? 홍수?”
“가뭄입니다. 해서 원상에서는 올해의 작황은 좋지 못할 것으로 예상하더군요. 또한, 3년 전보다 피해가 크리라고 보고 있고요.”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잠깐. 가뭄이라고? 그에 대비해서 조선에서도 저수지를 많이 만든 것으로 아는데?”
조선은 나라의 안정을 위해 식량 생산에 무척이나 신경을 쓰는 편이기는 했다.
다만 이전까지는 기술도, 돈도 충분하지 않았기에 저수지 축조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편은 아니었고.
그러나 북미왕국과 교류하면서 이전보다 재정이 몇 배는 나아졌고, 여기에 이전과는 달리 공업과 상업에도 집중하면서 농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의 수가 조금씩 줄어들자, 그나마 손이 덜 가는 모내기 농법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모내기의 경우는 제대로 된 수리 시설을 완비하지 않으면, 가뭄이 드는 순간 한 해 농사를 완전히 망치기에 조정에서 적극적으로 저수지를 축조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아는 정성국이 의문을 보이자 조용한 곰이 대답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조선의 모든 논이 수리 시설을 완비한 것은 아닐뿐더러, 삼남 지방의 경우는 가뭄이 계속되다 보니 저수지의 수위가 극단적으로 낮아진 상황이라...”
이에 상황을 짐작한 정성국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끙. 조선의 가뭄이 꽤 심각한 모양이군.”
“예. 제대로 물을 대지 못하는 논밭의 작물은 이미 말라비틀어졌다고 하는 것을 보면 상황이 썩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혀를 차며 바로 입을 열었다.
“쯧. 그럼 미리미리 식량을 포로나이로 보내둬야겠는데?”
추수 이후 단기간에 대량의 식량을 수송하려면, 아무리 수송선을 많이 보유한 북미왕국이라 하더라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미리 식량을 포로나이로 보내 비축해두겠다는 뜻을 밝히자 관리청장이 대답했다.
“그래야 할 듯싶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만주 동부의 지원을 위해 저희 관리청에서 포로나이에 창고를 추가로 여럿 건설해 두었기에 일단은 이곳에 식량을 보관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아. 그거 다행이군. 덕분에 식량 보관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테니까.”
식량의 경우, 잘못 보관하면 썩어버리기에 이 부분이 걱정이었는데, 관리청에서 지어둔 창고라면 식량 보관이 수월할 것 같아 정성국이 안도하자 관리청장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최근엔 1만 톤급 수송선도 많이 건조되어 투입된 상황이기에...15년 전처럼 식량을 수송하는 데 고생하지 않아도 될 듯싶고요.”
관리청장이 15년 전에 조선에서 발생한 대기근을 막기 위해 식량을 수송하겠다고 고생했던 일을 거론하자 정성국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뭐 그때야 기껏해야 천급 함선이 제일 큰 선박이었으니 어쩔 수 없긴 했지. 아. 헌데 말이야. 15년 전이야 조선 팔도 전체가 엉망이었지만, 이번엔 그 정도는 아니잖아? 그러니 식량을 많이 보낼 필요는 없지 않나?”
삼남 지방은 조선의 곡창 지대이고, 이곳에 가뭄이 들어 피해가 크다고는 하지만, 저수지 덕분에 최근까지 물을 댈 수 있었고, 다른 지방은 별다른 피해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대기근이 일어날 정도로 식량이 엄청나게 부족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에 정성국이 묻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물론 15년 전의 엄청난 흉작을 대비해 조선에서도 더 많은 식량을 비축해두고 있기는 합니다만...문제라면 15년 전보다 조선의 인구가 생각보다 많이 증가했다는 점입니다.”
“아?!”
정성국이 생각지도 못했다는 얼굴로 탄성을 지르며 조용한 곰을 바라보자, 조용한 곰은 설명을 이어나갔다.
“아국과 교류하면서 아국의 의학 지식을 받아들인 조선은 본격적으로 의원을 육성했고, 세계신문을 통해 위생과 청결의 중요성을 알린 덕분에, 사망률이 확연히 줄어들었습니다. 여기에 감자 같은 각종 구황 작물과 아국이 값싸게 식량을 판매한 덕분에 이상 기후로 인해 농사가 풍작보다는 평작이나 흉작에 가까울지라도 백성들은 굶주리지 않고 살 수 있었고요. 그러니 인구가 증가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조용한 곰의 말처럼 조선의 인구는 꾸준히 증가했다.
북미왕국을 본받아야 한다는 개화파 관리들이 조정을 완전히 장악했고, 국왕인 이연마저 이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었으니, 조선은 여러 개혁을 통해 변화했고, 덕분에 백성들의 삶도 점차 나아졌다.
여기에 위생 관념과 원상에서 판매하는 비누, 그리고 북미왕국의 의학을 배운 의원들이 늘어나니 사망률이 감소하면서 자연스레 인구는 늘어나기 시작했고.
다만 정성국은 원상의 보고서나 외무청의 보고를 통해 조선의 사정이 많이 나아졌다는 사실은 알지만, 이전까지 조선의 백성을 북미왕국으로 대거 이주시킨 일로 조선의 인구가 줄어들거나 정체되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조용한 곰의 말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과 관리청장이 의아해하자 정성국이 이를 설명했다.
“하하하. 물론 저희가 조금...많은 조선인들을 이 땅에 이주시키긴 했지요. 다만 저희가 가장 많이 조선인들을 이주시켰을 때도 1년에 10만 명 수준이었잖습니까. 그 정도 규모는...”
“조선에서 매년 태어나는 신생아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별것 아니다?”
“별것 아니라고 치부할 정도는 아닙니다만...그렇다고 인구가 감소하거나 정체될 정도는 또 아니라는 뜻이지요.”
생각해보면 북미왕국의 경우는 어떻게든 인구를 늘리겠다는 일념으로 연금과 출산 지원금을 이용해 출산을 장려했지만, 다른 나라 백성들은 기본적으로 많이 낳았다.
유흥 거리가 많지 않을뿐더러 아이를 낳아도 성인까지 성장하기 전에 죽는 경우가 많다 보니 자연스레 출산율이 높을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 상태에서 조선은 북미왕국의 의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또 북미왕국의 도움을 받아 모든 백성에게 종두법을 시행하고, 끓인 물을 마시게 해 전염병 상당수를 퇴치할 수 있었으니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조용한 곰의 설명으로 조선의 사정을 완전히 파악하고 이해한 정성국은 헛웃음을 지으며 이해했다는 듯 손짓했고.
그 후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뭐 아국에 식량은 충분하고, 이제 조선도 수백만 석의 식량 정도야 충분히 사들일 재력이 있으니, 일단 100만 석 정도의 식량을 수송해 포로나이에 보관하고 있다가, 조선에서 식량 구매 의사를 보이면 바로 판매하도록 하게.”
“그리하겠습니다. 전하.”
“알겠습니다. 전하.”
정성국의 명령에 조용한 곰과 관리청장이 동시에 대답했고.
그렇게 조선에 닥칠 기근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한 정성국은 회의실에 걸린 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 후 조용한 곰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조선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동만주 지역의 개척은 잘 되어 가나?”
“물론입니다. 동만주에서 수확한 사탕무로 인해 설탕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조선에서는 동만주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으니까요.”
“하하하. 뭐 설탕의 가치를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긴 하지.”
북미왕국이 등장해 조선과 교역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설탕은 왕실에서도 쉬이 구하기 어려운 사치품이었다.
그리고 북미왕국과의 교역을 통해 설탕을 어느 정도 수입할 수는 있었지만, 아직은 양반들까지만 먹을 수 있는 값비싼 사치품에 가까웠고.
그런 귀중한 설탕을 직접 만들 수 있었으니 조선 조정에서 눈이 돌아가는 것도 당연했기에 정성국이 크게 웃자 조용한 곰도 미소를 지으며 덧붙여 말했다.
“예. 거기에 동만주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동만주의 개발로 조선의 국력을 급격히 성장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개화파 관리들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기도 하고요.”
“음? 개화파에서 나섰다고?”
“아시다시피 세계신문을 운영하는 것이 개화파의 관리들이지 않습니까.”
“아. 설마?”
조용한 곰이 조선의 유일한 신문인 세계신문을 거론하자 정성국은 곧 개화파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짐작했고.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세계신문의 기자들이 동만주 지역으로 이주한 백성들을 취재해서, 동만주 지역으로 이주한 후 고향에서 살 때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어 동만주 지역으로 이주한 것에 무척 만족한다는 내용의 기사들을 매번 실어 백성들의 이주를 독려하고 있지요.”
개화파 관리들은 대부분 북미신문의 애독자였다.
그러니 개화파 관리들은 북미왕국이 북미신문을 이용해 어떻게 여론을 움직이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리고 동만주가 춥기만 한 쓸모없는 땅이 아니라 값비싼 설탕이나 밀 같은 작물을 심을 수 있는 땅이고, 이 동만주만 잘 개발하더라도 조선의 부가 훨씬 늘어나 국력이 신장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세계신문을 이용해 백성들의 북방 이주를 독려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다만 백성들이 너도나도 동만주로 떠나면, 소작농을 구하기 어려워지는 탓에 지방의 양반들이 조금 반발하기는 했지만, 이전과는 달리 조선 조정의 통제력은 무척이나 강해졌기에 그 정도 반발은 무시할 수 있었고 말이다.
“허. 그거 꽤 효과적이겠는데? 조선에서는 세계신문의 영향력이 무척 강하잖아?”
“그렇습니다. 동만주에 관련된 기사와 광고가 마구 개재되면서 이주민이 대폭 늘었다고 하니까요. 또한, 3년 전에도 이상 기후로 인해 흉작이 발생해 피해가 컸었는데,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자 동만주로 이주해 정착 지원금을 받는 것이 훨씬 낫다고 판단한 농민들까지 대거 관청으로 몰려가 동만주로 이주할 뜻을 밝히고 있어, 이들을 동만주로 수송할 배편이 부족할 정도라고 합니다.”
“와...그 정도라고?”
조용한 곰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 해에 동만주로 이주하는 백성들은 3, 40만은 되어 보여 감탄하자 조용한 곰이 대답했다.
“예.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예측되는 만큼, 동만주의 개척은 성공적으로 진행되리라 봅니다.”
정성국은 조선에 동만주를 넘기면서도, 이 동만주를 제대로 개발할 수 있을까 내심 걱정했었는데, 의외로 조선에서 적극적으로 동만주를 개척하기 위해 움직이고, 또 조선 백성들도 이전의 북방 이주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나섰기에 조용한 곰의 말마따나 동만주 개척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리라는 기대감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그런 정성국을 보고 옆에서 조용한 곰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관리청장이 조금 불만이라는 듯 입을 열었다.
“물론...그렇게 조선인들이 더 많이 동만주로 이주하는 만큼, 아국이 지원해줘야 할 규모도 대폭 증가하고 말입니다.”
정성국은 동만주를 조선에 넘겨주면서, 조선이 동만주를 제대로 개척하지 못할 것을 우려해 동만주가 어느 정도 개발될 때까지 동만주로 이주하는 조선 백성들에게 식량과 생필품을 비롯한 각종 지원을 해주라고 명령했었고.
그러니 동만주로 이주하는 조선 백성들의 수가 늘어날수록, 이들을 지원해야 하는 비용이 많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터라 관리청장이 아깝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자 정성국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괜찮네. 괜찮아. 식량이라 봐야 남아돌고, 생필품 역시 원가야 얼마 되지 않지 않나. 그리고 전에도 말했지만, 조선이 동만주를 완전히 장악해서 국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우리에게도 이득이니만큼, 너무 아까워하지 말게.”
어차피 조선을 비롯한 북미왕국의 동맹국들은 북미왕국과의 동맹을 쉬이 끊을 수 없는 만큼, 그리고 이들이 어느 정도는 발전해 자체적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어야 북미왕국의 부담이 덜어지는 만큼, 지금 같은 외교 정책을 유지할 생각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이야기한 정성국이었고.
정성국의 생각이 확고함을 파악한 관리청장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