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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735화 (735/850)

735화

3함대의 전선을 타고 제주도에 도착한 투로시노는 숙소에서 머물며 청나라의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외무청 관리들과 함께 앞으로의 협상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논의하고 있었고.

그때 외무청 관리가 방에 들어오며 보고했다.

“북경으로 향했던 국영 상단의 배가 도착했습니다.”

기다렸던 소식이 들려오자 투로시노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벌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건 선장이 건네준 청나라 예부 상서의 서찰이고요.”

“흠...”

투로시노는 외무청 관리가 건네준 서찰의 내용을 확인한 후 역시나 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역시 청나라는 우리에게 중재를 요청했군.”

투로시노의 말에 방안에서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던 한 외무청 관리가 대꾸했다.

“이미 예상했던 일 아닙니까. 물론 대청의 자존심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는 나라를 보전하는 것이 우선일 테니까요. 그보다 어쩌시겠습니까? 바로 동녕국으로 가실 겁니까?”

연목은 만약 청나라가 중재를 요청하면 북미왕국에서 빠르게 동녕국과 주나라와 접촉해주길 원했다.

그만큼 청나라의 상황이 좋지 않았기에.

해서 투로시노가 여러 외무청 관리들과 이곳 제주도를 방문해 대기하고 있었고, 청나라에서 결국 자존심을 꺾고 중재를 요청한 이상, 바로 동녕국으로 이동할 것으로 생각해 확인차 물은 외무청 관리였고.

그러나 투로시노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물론 청나라가 급한 것은 맞는데, 그렇다고 며칠 사이에 망할 정도는 아니었고, 청나라와는 달리 다시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는 동녕국과 주나라를 설득해 협상장에 앉히려면 쓸만한 패는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화친을 맺은 이후를 생각하면 동녕국과 주나라를 너무 강하게 압박해 협상장에 끌어앉히는 것은 좋지 않아 보이는군. 그렇게 되면 최소한 두 나라는 우리보다 지금 군수 물자를 넘겨주는 유럽 각국의 손을 강하게 잡겠지. 그렇다면 유럽 세력을 설득해 함께 움직이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을 마친 투로시노가 입을 열었다.

“동녕국을 압박할 패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것 같네. 그러니 마닐라를 먼저 방문하도록 하지.”

마닐라엔 에스파냐령 필리핀 총독부가 있기도 했고, 동녕국과 주나라에 군수 물자를 판매하는 유럽 상인들도 있었다.

그러니 마닐라를 먼저 방문해 유럽 세력들을 설득한 후 주나라와 동녕국으로 외교관을 파견하는 게 낫다는 투로시노의 판단에 방안의 외무청 관리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으로 의견을 나눈 후 나쁘지 않다는 판단을 내리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 * *

마닐라의 필리핀 총독부 집무실에서 차를 즐기던 필리핀 총독은 보좌관이 갑작스럽게 문을 열고 집무실로 허겁지겁 달려오자 인상을 찌푸렸지만, 보좌관을 혼내기도 전에 그가 전한 보고 내용을 듣고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뭐? 지금 뭐라고 했나?”

“북미왕국 외무청의 고위 관리이자 아시아 외교를 총 책임자인 투로시노가 방문했습니다.”

필리핀 총독은 투로시노를 만난 적은 없었지만, 그의 위치는 잘 알고 있었다.

북미왕국이 아시아에 파견한 고위급 관리 중에 가장 높은 직급의 관리라는 것을 말이다.

예전에만 하더라도 해로는 느렸고 위험했으며, 북방 항로의 경우 1년 중 절반 정도는 항로를 이용할 수 없다 보니 투로시노가 정성국을 대리해 각국의 사절을 맞이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정성국은 의도적으로 투로시노의 직급을 최대한 올린 것이다.

여기에 북미왕국의 위상이 점차 높아지면서, 자연히 외무청의 위상도 높아졌고, 이 넓은 아시아 지역의 외교를 총괄하는 투로시노다 보니, 직접적으로 품계를 비교하긴 어렵지만, 필리핀의 총독인 자신과 맞먹거나 오히려 높을 정도이니 필리핀 총독은 그런 투로시노가 이 마닐라까지 방문했다는 보좌관의 이야기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아이누 섬에 있어야 할 인물이 갑자기 이곳엔 왜? 어라? 설마...?”

투로시노가 별다른 연락도 없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방문한 목적을 생각해보던 필리핀 총독은, 곧 일전에 마닐라를 방문한 일로카노 항의 외무청 관리를 통해 북미왕국의 대청 정책이 바뀌었다고 판단하고 주나라에 군수 물자를 대대적으로 판매했다는 것을 떠올리고 혹시 투로시노가 이를 항의하기 위해 방문한 것 아닌가 싶어 보좌관을 바라보자, 보좌관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중요한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총독 각하를 뵙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 말에 필리핀 총독은 고민했지만, 투로시노의 위치를 생각하면 그의 방문을 거절하는 것도 결례였기에 바로 명령했다.

“그럼 바로 초대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총독 각하.”

* * *

필리핀 총독부를 방문한 투로시노는 필리핀 총독과 통성명을 나누고 시종이 가져온 차와 다과를 먹으며 적당히 친분을 다졌고.

그렇게 분위기가 나아지자 필리핀 총독은 조심스럽게 투로시노가 방문한 목적을 파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보다 제가 알기로 귀하께서는 아시아 외교를 총괄하기에 무척 바쁘다고 알고 있습니다. 해서 최근에는 포로나이에서 지낸다고 들었고요. 헌데 이 먼 마닐라까지는 무슨 일로 방문하신 겁니까?”

필리핀 총독이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눈빛을 보내자 투로시노는 들고 있던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중국 대륙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 방문한 겁니다.”

“중국 대륙의 일을...말입니까?”

투로시노의 대답에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는 필리핀 총독이었고.

그런 필리핀 총독을 보고 투로시노는 자세를 바로 하며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예. 아시다시피 조청전쟁 이후, 아국은 청나라와 종전 조약을 체결하면서 청나라에 일부 이권을 획득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북미왕국이 조청 전쟁으로 청나라에 5개의 개항장을 확보했고, 이것을 부러워한 유럽 나라들이 뭉쳐 결국 주나라와 동녕국에 화약 무기를 판매하기 시작한 셈이니 필리핀 총독은 투로시노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를 깨닫고 잘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니 아국이 이 조약으로 얻은 이권을 온전히 누리려면 청나라를 지원해 청나라가 중국 대륙 전체를 수복하도록 돕는 것이 맞긴 합니다. 허나 아국은 조청전쟁 당시 동녕국과 주나라의 도움을 받은 적도 있었고, 타국의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도 꺼려졌기에 가만히 있었지요.”

조청전쟁으로 북미왕국은 청나라와 전쟁을 치렀고, 청나라를 압박하기 위해 북미왕국에서 동아시아에 배치한 3함대를 움직이자, 동녕국은 이 3함대가 효과적으로 청나라 수군을 상대하도록 정보를 비롯해 각종 물자를 지원해줬었다.

물론 동녕국으로서는 북미왕국의 힘으로 청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지원해준 거지만, 도움을 받은 북미왕국으로서는 직접 동녕국을 공격하기는 꺼려질 수밖에 없었고.

이를 이해한 필리핀 총독이 고개를 끄덕이자 투로시노가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헌데 현 청나라의 정세는 무척이나 위태롭고, 이걸 그냥 내버려 두면 청나라가 멸망하고 아국이 확보한 이권이 모두 사라지게 되는 터라 더는 방관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헉?! 그게 무슨...?”

필리핀 총독은 투로시노의 말에 기겁했다.

북미왕국의 힘을 생각하면, 북미왕국이 개입하는 순간 동녕국과 주나라의 멸망은 확정적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동녕국과 주나라가 멸망한다면, 그동안 군수 물자를 판매하며 확보한 이권들도 모두 날리게 되는 셈이니, 에스파냐의 손해도 꽤 클 테고 말이다.

그러다 문득 필리핀 총독은 일전에 방문했던 일로카노 항의 외무청 관리를 떠올리고, 북미왕국이 청나라를 지원하기 위한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들을 움직인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이 들었고.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자 필리핀 총독은 안색이 하얗게 질리며 어떻게든 북미왕국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무어라 이야기하려 할 때, 투로시노는 그런 필리핀 총독의 반응을 보고 손을 내저었다.

“아. 진정하시지요. 그렇다고 아국이 적극적으로 청나라를 도와 동녕국과 주나라를 공격하겠다...뭐 이런 이야기는 아니니까요.”

“그...그게 정말입니까?”

“정말입니다.”

투로시노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필리핀 총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의심이 과했구나 싶었고.

그때 필리핀 총독의 귓가에 투로시노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아국의 이권을 위해 이전에 조선제 조총을 넘겼던 것처럼 청나라를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이야기가 나왔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청나라를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것처럼 귀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은 동녕국과 주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으며 일부 이권을 획득했기에, 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욱 많은 군수 물자를 두 나라에 넘겨줄 테고, 결국 전쟁만 격화되겠지요.”

“...아마 그럴 겁니다.”

필리핀 총독이 투로시노의 예측에 공감하자 투로시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아국이 확보한 이권을 지키겠다고 조청전쟁 이후 교류해왔던 동녕국과 주나라를 공격하고 싶지도 않고요. 그러니 결론은 하나지요. 청나라, 주나라, 동녕국, 이 삼국을 중재해 화친을 맺게 하는 것.”

간접적인 지원도, 직접적인 지원도 어려우니 삼국을 중재해 화친을 맺게 해 강제로 전쟁을 끝내겠다는 예상 밖의 말에 필리핀 총독은 움찔하며 진심이냐는 눈빛으로 투로시노를 바라보았고.

투로시노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으음...화친이라...?”

“그게 최선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얼핏 듣기엔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문득 의구심이 든 필리핀 총독이 급히 질문을 던졌다.

“아니. 헌데 현 상태에서 화친을 맺게 되면 귀국은 손해 아닙니까? 내가 알기로 종전 조약을 통해 보장받은 개항장 중에는 복주와 광주도 포함된 것으로 아는데?”

현재 복건성의 복주는 확고한 동녕국의 땅이고, 광동성 역시 육지로의 연결이 끊어진 이후, 청나라의 땅이라기보다는 청나라의 반기를 든 반란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기에 어떻게 협상이 진행되든 청나라의 땅으로 인정받긴 어려워 보였으니 북미왕국은 5개의 개항장 중 2개의 개항장을 잃게 되는 셈이고, 이건 꽤 큰 손해인데 정말 중재에 나설 거냐는 필리핀 총독의 물음에 투로시노가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손해긴 하지요. 물론 청나라와 협상해 이 손해를 보상받을 수도 있긴 합니다만 개항장을 통해 벌어들일 수 있는 이득과 두 항구의 위치를 생각하면 특히나 더 그렇고요. 다만 그 정도 손해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습니다. 동녕국, 그리고 귀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과의 관계가 있으니까요.”

북미왕국의 부유함을 생각해보면 투로시노의 말도 완전히 틀린 것 같지는 않기에 필리핀 총독은 내심 부럽다는 생각과 함께 입을 열었다.

“으음...허면 귀하께서 이곳을 방문한 까닭은 역시...”

“예. 저희와 뜻을 함께해 주셨으면 합니다. 동녕국과 주나라를 설득하려면 그편이 나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에 필리핀 총독은 고심하기 시작했다.

투로시노가 직접 움직인 것을 볼 때, 북미왕국은 청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아 보이고, 그러니 삼국을 중재해 화친하게 만든다면 당장은 자신들이 손해 볼 것 같지 않았기에 괜찮아 보이긴 했다.

‘문제는 교역인데...’

지금은 한창 전쟁 중이라 군수 물자를 비싸게 판매해 막대한 이득을 위하고 있었지만, 전쟁이 끝난다면 동녕국이나 주나라는 지금처럼 군수 물자를 비싸게 사들이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 이를 대체할 교역품이 필요한데, 문제는 중국 대륙은 물산이 풍부해 대부분의 물건들은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 보니 팔 만한 것이 없다는 점이 영 걸리는 필리핀 총독이었고.

해서 필리핀 총독이 슬쩍 이를 이야기하자 투로시노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그러니 더욱 아국을 도와 함께 중재하셔야지요.”

“예?”

“생각해보시지요. 한 나라가 중국 대륙을 완전히 장악하면, 필요한 물건을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 보니 팔 만한 물건이 없겠지만, 지금처럼 중국 대륙이 삼등분되어 있다면, 부족한 물건이 있지 않겠습니까.”

“아...”

투로시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필리핀 총독이 탄성을 내뱉었을 때, 투로시노가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저희가 중재해 중국 대륙에 평화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분명 삼국은 서로를 쉽게 믿지는 못할 겁니다. 자연히 강병을 육성하려 들 테고, 그러면...”

“군수 물자를 판매할 수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또한, 아국을 도와 중재한다면, 그 대가로 삼국에 추가로 이권을 획득하실 수도 있겠지요. 이 정도면 나름 괜찮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투로시노가 진한 미소를 지으며 필리핀 총독을 바라보자, 필리핀 총독은 결정을 내렸다.

‘그래. 괜히 북미왕국과 척을 져봐야 좋을 것 없으니...차라리 북미왕국과 함께 움직이면서 이득을 취하는 게 맞다.’

“...좋습니다. 우리 에스파냐도 북미왕국을 도와 삼국을 중재하는 데 거들겠습니다.”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헌데 에스파냐뿐만 아니라, 동녕국과 주나라에 물자를 지원하는 네덜란드, 잉글랜드도 함께 중재에 참여했으면 합니다만...”

“아. 그렇지 않아도 동녕국, 주나라와의 외교 문제를 일임받은 타국의 외교관들이 마침 마닐라에 머물고 있으니 바로 부르겠습니다.”

“오!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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