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3화
투로시노가 정일신 3함대 사령관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투로시노의 보좌관이 집무실을 찾아왔고, 보좌관의 보고에 투로시노와 정일신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이다가 정일신이 급히 고개를 돌려 보좌관에게 확인했다.
“지금 누가 방문했다고?”
“청나라의 예부 상서입니다.”
그리고 보좌관의 대답에 정일신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허. 이것 참 공교롭구먼. 공교로워.”
“그러게 말입니다. 덕분에 북경을 방문할 필요는 없어서 좋긴 합니다만 말입니다.”
투로시노는 정일신의 도움을 받아 중국 대륙의 상황을 주시했고.
점차 청나라가 수세에 몰리자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이 건은 자신 혼자서 결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판단해 새한성에 중국 대륙의 자세한 사정과 자신의 의견을 첨부한 보고서를 올렸다.
그리고 이제 막 새한성에서 보낸 명령문을 읽고 청나라를 방문할 생각으로 정일신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국영 상단의 배를 타고 청나라의 예부 상서가 직접 투로시노를 방문할 줄은 몰랐기에 투로시노가 피식 웃으며 대꾸하고 보좌관에게 청나라의 예부 상서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라고 이야기했고.
그사이 잠깐 생각에 잠겼던 정일신이 생각을 마친 듯 입을 열었다.
“아마 청나라의 예부 상서가 직접 방문한 것은 역시 지원 요청 때문이겠지?”
“그렇겠지요. 다만 예부 상서가 직접 이곳까지 방한 것을 생각해보면...”
“그만큼 청나라의 사정이 좋지 않다는 방증이겠지. 그러니 우리의 중재에 귀를 기울일 테고.”
정일신의 의견에 동감한 투로시노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에 정일신은 투로시노와 대화를 나누며 마시던 커피를 단숨에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외교 협상 자리에 내가 있을 이유는 없으니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예. 예부 상서와의 협상이 끝나면 3함대 사령부를 방문하겠습니다.”
투로시노의 대답에 정일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집무실을 나섰고.
정일신이 나간 후 투로시노는 비어있는 커피잔을 치우고, 새로이 커피를 내리며 예부 상서가 오기만을 기다렸고, 커피를 다 내렸을 때쯤 보좌관의 안내를 받은 청나라의 예부 상서 연목이 집무실로 들어오며 투로시노를 보고 호들갑을 떨듯 입을 열었다.
“오오! 투로시노 공.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그렇군요.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예전에 조청 전쟁이 일어난 후, 패색이 짙음에도 자존심 때문에 버티던 청나라는, 준가르가 몽골 지역을 공격하면서 결국 북미왕국과 화친을 맺었는데, 이때 투로시노가 협상하기 위해 청나라를 방문해 연목과 만났던 적이 있었고, 그 후로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적당히 친분은 쌓았었기에 투로시노는 연목을 보고 빙긋 웃으며 환대했고.
연목은 투로시노가 건네준 커피를 마시며 입을 열었다.
“북미왕국이 별천지라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습니다만, 이곳을 방문해보니 솔직히 놀랍군요.”
“하하하. 그렇습니까?”
이곳은 투로시노의 고향이었기에, 그리고 약 25년 전만 하더라도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었기에 연목의 칭찬은 곧 북미왕국을 칭찬하는 것과 같았기에 자연스레 웃음을 터트린 투로시노였고.
그런 투로시노를 보고 연목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통해 어둑어둑해지는 거리를 가로등과 건물에서 나오는 불빛들이 환하게 밝히는 것을 보고 나직하게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예. 특히 이곳은 북미왕국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외지이잖습니까. 헌데...불야성이나 다름이 없으니, 참으로 놀랍고 또 대단하군요.”
예부의 하급 관리들은 종종 북미왕국의 배를 타고 이곳 포로나이를 방문했었고, 그때마다 포로나이의 풍경이 무척 이국적이고, 또 해가 떨어지면 전혀 다른 느낌을 자아내는 도시라고 평가했었는데, 그들의 평가가 정확하다는 생각을 한 연목의 귓가에 투로시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그런가요? 하지만 귀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곳은 그저 멀리 떨어진 외지에 불과합니다. 아국의 수도인 새한성은 더욱 대단하지요.”
황새급 비행기가 이곳 포로나이까지 배치되자 호기심이 많은 투로시노는 황새급 비행기를 타고 새한성에 방문한 적이 있었고, 이때 새한성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투로시노였기에 이렇게 이야기하자, 연목 역시 이곳이 대단해도 수도보다는 못하리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며, 새한성에 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어느덧 커피를 다 마신 둘이었고, 투로시노는 아직도 보좌관의 연락이 없자 약간 미안하다는 얼굴로 연목에게 말했다.
“아무튼, 미리 오신다고 기별을 주셨다면 환영 만찬을 준비했을 텐데, 갑자기 오시는 바람에 만찬을 열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일단 숙소에서 여독을 푸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연목은 호기심에 팔려 자신이 이곳을 방문한 목적을 잊고 있었음을 깨닫고 아차 하며 투로시노의 눈치를 살폈고.
새한성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느라 분위기가 좋은 편이라 연목은 이러한 분위기를 살리는 것이 괜찮겠다고 여겨 슬쩍 입을 열었다.
“북미왕국의 대선을 타고 와서 딱히 피곤하지는 않으니 괜찮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무런 기별도 하지 않고 방문한 거니 준비가 늦어지는 것도 당연하고, 또 덕분에 이렇게 투로시노 공에게 새한성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지요. 그보다...투로시노 공.”
“말씀하시지요.”
“부디 우리 대청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연목은 진지한 표정으로 투로시노를 바라보았고, 투로시노 역시 얼굴에 가득한 미소를 지우고 연목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후우, 전에도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만, 아국의 무기들은 함부로 판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식 소총 역시 워낙 부족한 터라 귀국에서 원하는 수량을 마련하기는 어렵고요.”
준가르가 대군을 이끌고 몽골을 공격하자 청나라에서는 조선에서 조총을 구하려 했지만, 조선이 조총 판매를 거부하자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북미왕국에도 사신을 파견했었다.
북미왕국의 무기가 강력하다는 것은 청나라도 잘 알고 있었기에.
물론 북미왕국은 단칼에 거절하긴 했지만.
그러니 투로시노가 연목의 도움 요청을 이전의 요청과 결부시키는 것은 당연했고.
이에 연목이 투로시노의 대답으로 상황을 이해하고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북미왕국의 사정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신식 소총을 팔아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아닙니다.”
“허면...?”
“이전에 우리 대청을 도와주셨던 것처럼 다시 한번 조선제 조총이라고 구해주셨으면 합니다.”
연목의 이야기에 투로시노는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허어. 이것 참...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시잖습니까. 조선에서 보유한 대부분의 조총을 이미 귀국에 넘긴 상황에서 무슨 수로 조선제 조총을 구한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저희가 알아본 바론, 조선에서 보유한 물량이 일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있기야 하지요. 허나 그건 병사들에게 쥐여줄 무기입니다. 그걸 조선에서 어찌 넘기겠습니까.”
투로시노의 이야기에도 연목은 막무가내였다.
“그건 일전에 넘겨준 조선제 조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귀국이 나서서 설득하자 조선에서 넘겨주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불가능합니다. 아시잖습니까. 이미 조선을 설득해 넘길 수 있는 물량은 모두 넘겼습니다. 지금 조선이 보유한 물량은 절대로 판매하지 않을 겁니다.”
“허나...”
그 후로도 연목은 어떻게든 투로시노를 설득하려 들었지만, 정성국이 중국 대륙을 뒤덮은 전쟁의 불길을 더욱 키우기보다는 적당히 개입해 이를 진화할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투로시노는 그저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이런 투로시노의 반응에 연목은 투로시노의 설득은 무리라는 것을 인정하고, 대청의 앞날이 새삼 걱정되어 깊은 탄식이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정녕...정녕 불가한 겁니까?”
“...송구스럽지만 그렇습니다.”
“하아...”
투로시노의 대답에 연목은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때마침 보좌관이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며 만찬 준비가 끝났다고 이야기하자, 연목은 차라리 만찬에 참석해 술이라도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투로시노가 한발 빠르게 입을 열었다.
“허나...다른 방식으로 청나라를 도울 수는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투로시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연목이 간절한 눈빛으로 투로시노를 바라보며 빨리 말해보라는 듯 재촉했지만, 투로시노는 느긋하게 말했다.
“귀하께서 그렇게 화약 무기를 구하려는 까닭은, 결국 청나라를 공격하는 적들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북쪽에서는 원나라의 부활을 외치는 오이라트의 유목민족이, 남쪽에서는 오삼계의 작당에 넘어간 반란군과 명나라 잔당들이 설치고 있는 터라 이들을 물리치려면 화약 무기가 필요하니까요.”
“아니죠. 꼭 강한 무기가 있어야 적들을 물러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투로시노의 말에 연목은 투로시노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를 깨닫고 신음을 흘렸다.
“...으음. 혹시 화친을 이야기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투로시노가 빙긋 웃으며 긍정하자, 연목은 복잡한 얼굴로 투로시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투로시노 공도 청나라의 내부 사정을 어느 정도는 아실 테니,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물론 압니다. 청나라의 입장에서 반란군들을 인정하고 싶지야 않겠지요.”
화친을 맺는다는 것은 상대를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한다는 뜻과도 같다.
헌데 동녕국은 반청복명의 기치로 건국한 나라였고, 주나라 역시 반란군에 불과했으니, 화친을 맺기엔 여러모로 거북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지금 같은 상황에서 청나라가 먼저 화친을 맺자고 나선다면 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알리는 꼴이나 다름없었으니 더더욱 꺼려질 수밖에.
다만 투로시노는 이를 잘 알고 있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그게 뭐 어떠냐는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위기 상황 아닙니까. 자존심을 지키다 멸망하는 것보다야, 주나라와 동녕국과 화친을 맺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그 말에 연목은 잠깐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투로시노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 말이 맞습니다. 청나라가 멸망하는 것보다야 화친을 맺는 것도...괜찮겠지요. 허나 아국이 화친을 원한다고 해서 저들이 이를 받아들이겠습니까? 저들은 이 기회에 어떻게든 우리 대청을 멸망시키려 들 텐데?”
이에 투로시노는 빙긋 웃었고.
투로시노의 자신만만한 미소에 연목은 문득 조금 전 투로시노가 청나라를 도울 수도 있다는 말을 한 사실과 북미왕국이 나서서 유럽의 서쪽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쟁을 중재했었다는 것을 떠올리고 투로시노가 왜 화친이라는 단어를 꺼냈는지 눈치챘다.
“...어!? 설마?”
“그렇습니다. 아국에서 나선다면, 최소한 주나라와 동녕국은 협상장에 사절을 보낼 것으로 생각합니다.”
“으음...”
투로시노의 말에 연목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북미왕국이 마음만 먹는다면 바다를 봉쇄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반란군들도 잘 알고 있을 테니, 북미왕국이 나서서 강권한다면, 최소한 협상장에 사절을 보내기는 하리라.
다만 그렇게 저들이 협상을 위한 사절을 파견한다고 해서, 쉬이 화친을 맺을 수 있을까 싶은 연목이었고.
이런 연목의 이야기에 투로시노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요. 상황이 상황이나 주나라나 동녕국은 최대한 귀국을 압박해 많은 것을 뜯어내려 할 테니까요. 하지만 저들이 원하는 것을 내어주는 대신 청나라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연목은 쓰게 웃었다.
투로시노의 말은 간단하지만,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특히, 협상 결과에 따라 자신의 목이 위험할 것이 뻔히 보이기도 했고.
그러나 자신의 목숨이 아까워서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었다.
현재 상황은 청나라에 무척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처음 청나라 조정에서는 호북성에서 조선제 조총으로 무장한 5만 명의 병력을 몽골로 이동시키면서 이 정도라면 중가르를 충분히 막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중가르는 의외로 화약 무기에 익숙하게 대응했다.
그래서인지 기동력을 이용해 정면 승부를 피하며 야금야금 공격했고.
덕분에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치열하게 대치하고 있었고, 이를 알게 된 청나라 조정은 기겁하며 추가로 병력을 보내려 했지만, 두 반란 세력이 병력을 모아 북진하면서 남쪽의 전선에서 병력을 차출하기도 불가능해져 버렸다.
거기에 그가 북미왕국의 배에 올라타기 전, 전령을 통해 들었던 내용에 의하면, 명나라 잔당들이 상륙 작전을 통해 복건성에서 북진하는 병력을 막으려는 청나라군의 배후를 공격했고, 이 때문에 크게 패배했다면서 절강성을 지키기 위해 구원병을 요청할 정도이니.
그러니 북미왕국이 최소한 주나라와 동녕국의 사절은 협상장에 앉혀 주겠다고 할 때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 연목이었다.
다만 이 정도 사안을 그가 단독으로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바로 북경에 이 사실을 전해야겠다고 여겨 투로시노를 보고 입을 열었다.
“북미왕국의 뜻은 알겠습니다. 허나 이 사안은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고, 우리 대청의 상황이 썩 좋지 않은 만큼, 빠르게 황상 폐하께 귀국의 제안을 알리고 싶으니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좋습니다. 저도 귀국의 상황을 모르지는 않으니까요. 다만 벌써 해가 진 상황이라...내일 아침에 북경으로 출항하는 배편을 구해볼 터이니, 일단은 식사라도 하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일전에 제가 북경을 방문했을 때 예부 상서께 대접을 받았으니, 저도 대접할 기회를 좀 주시지요.”
이에 연목은 마침 술이 고팠기에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