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2화
봄바람이 한창 불어오는 3월의 어느 날.
정성국은 집무실에서 홀로 커피를 마시다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조용한 곰을 반기며 새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고.
조용한 곰은 정성국이 건네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빙긋 웃었다.
“역시 전하께서 직접 내리신 커피는 다른 커피와는 다르군요. 참으로 좋습니다.”
“아부는...그보다 갑자기 방문한 용건이 뭔가? 자네 요새 꽤 바빴던 것 같은데?”
정성국의 질문에 조용한 곰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정성국을 보고 씩 웃으며 대답했다.
“전하. 드디어 협상이 끝나 외국인 노동자들을 모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헉! 그게 정말인가?”
정성국이 조용한 곰의 말에 화들짝 놀라 되묻자 조용한 곰은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조용한 곰을 보고 정성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협상이 생각보다 늦어져서 조금 걱정했는데...이거 다행이군. 헌데 결국 저들이 원하는 조건을 들어준 건가?”
“그 부분도 협상을 통해 조건을 조금 바꾸는 데 성공했습니다. 전하.”
신년에 청장 회의에서 정성국이 외국인들을 계약 노동자로 모집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이야기한 이후, 외무청에서는 새한성의 각국 대사들과 이를 논의해왔다.
허나 이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될 거라고 예상한 정성국이나 외무청의 관리들과는 달리 각국 대사들은 난색을 보였다.
일단 네덜란드나 덴마크, 그리고 스웨덴의 경우는 한창 엉망이 되어 버린 지역을 복구하고 개발해야 하는 터라, 처음 북미왕국의 제안에 흥미를 보이기는 했지만 결국 거절했고.
오스만 제국은 당장 전쟁 중이라, 포르투갈은 가뜩이나 인구가 부족해 해외 영토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보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본은 가뜩이나 북미왕국이 이주민 모집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를 빌미로 성인 남성들을 대거 귀화시키려는 것이 아닌가 경계하며 거절했고.
해서 남은 것은 잉글랜드, 프랑스, 에스파냐인데, 이 나라들 역시 계약 노동자들이 계약이 끝난 후 이곳에 눌러앉을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협상이 지지부진했다.
유럽에는 북미왕국의 소문들이 널리 퍼졌기에, 북미왕국으로의 이주를 원하는 백성들이 생각보다 많은 편이었으니 이를 허락했다가는 자국의 노동력이 대거 유출될까 걱정했던 탓이다.
그나마 일본과는 달리 단칼에 거절하진 않았기에 외무청에서는 이 삼국의 대사들을 설득하는 데 공을 들였고.
이에 삼국의 대사들은 북미왕국에 조건을 내걸었는데, 그중에는 곤란한 조건들이 몇 가지 있었다.
예를 들어 계약 노동자들의 모집과 관리를 자신들이 직접 맡겠다는 것 같은.
저들은 일종의 인력 회사를 세워 직접 계약 노동자들을 고용해 북미왕국에 인력을 제공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얼핏 생각하면 굳이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긴 했다.
모집도, 관리도 타국의 인력 회사에 떠넘기면, 그만큼 북미왕국에서 감당해야 할 업무가 줄어드니까.
다만 이를 수락하면 인력 회사가 계약 노동자들에게 가야 할 급료를 중간에서 가로챌 것이 뻔히 보였고, 계약 노동자들은 북미왕국 개발청 관리의 말보다, 직접적으로 급여를 주는 인력 회사의 눈치를 살피고 그들의 명령을 우선할 것이 뻔했기에 여러모로 일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인력 회사는 계약 노동자들의 급료를 노리고 북미왕국 내에서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이런 조건을 받아주긴 현실적으로 어려웠고.
해서 외무청에서는 삼국을 설득해, 결국 북미왕국에서 직접적으로 외국인 노동자들과 계약하는 방식을 고수하는 대신, 계약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복귀하지 않는다면 삼국에 막대한 보상금을 내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삼국의 대사들이 외무청의 약속한 보상금의 액수를 듣고, 차라리 계약 노동자들이 계약 기간이 끝나면 북미왕국에 눌러앉는 것을 바랄 정도로 말이다.
동시에 외국인 노동자들의 모집은 삼국에 맡겨 외국인 노동자들을 북미왕국에서 지정한 항구까지 데려오는 것을 맡기는 대신, 적당히 빨대를 꽂을 수 있도록 허용하기로 했고.
그 외에도 몇 가지 자잘한 요구를 받아줘서 삼국 정부의 이익을 보장한 다음에야 비로소 협상을 완료할 수 있다는 조용한 곰의 설명에 정성국은 인구가 적어서 별꼴을 다 본다고 한탄하면서, 딱 20년만 더 참자고 다짐하며 투덜거렸다.
“쩝. 돈 많이 깨지겠군. 그리고 삼국은 생각보다 큰 이득을 볼 것 같고.”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철저히 관리하려면, 그만큼 돈이 많이 깨지는 것은 사실이었고, 여기에 삼국에 이런저런 명목으로 넘겨주는 돈도 꽤 되는 터라 정성국이 투덜거리자 조용한 곰은 쓰게 웃었고.
이런 조용한 곰의 씁쓸한 웃음에 정성국은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뭐 그나마 교역으로 돈을 쓸어 담으니 크게 상관은 없지. 그보다 외국인 노동자는 얼마나 모집할 수 있는 건가?”
이 정성국의 물음에 조용한 곰은 표정을 바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총 50만 명을 고용하기로 했습니다.”
“헉! 50만 명? 그것도 성인 남성만 50만 명이라고?”
생각보다 많은 숫자에 정성국이 기겁했다.
정성국은 잘해야 10만에서 20만 명 정도를 생각했었으니까.
헌데 에스파냐에서 10만 명, 그리고 프랑스와 잉글랜드에서 20만 명에 달하는 성인 남성을 고용하기로 했다는 조용한 곰의 설명에 정성국은 놀람을 금치 못했고.
“그렇습니다. 전하. 덕분에 개발청장의 입이 귀에 걸렸더군요.”
조용한 곰의 말에 정신을 차린 정성국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럴 만도 하지. 그 정도면 인력 부족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성인 남성 50만 명의 노동력은, 못해도 150만에서 200만 명의 이주민을 받아들여야 확보할 수 있는 노동력이었다.
그런 노동력이 갑자기 생긴 셈이니, 그동안 인력이 부족해 계획만 짜두었던 여러 개발 계획들을 단숨에 진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정성국은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자 곧 다른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써먹을 50만 명이 생긴 것은 정말 좋은 소식인데, 이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충분히 짐작되었기에.
해서 정성국이 이를 언급하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성인 남성 50만 명을 통제하고 관리하려면 생각보다 많은 인력이 필요할 테니까요. 다만 군사청에서도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로 했기에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군사청에서?”
“예. 북미 내륙 지역이 꽤 안정된 상태라 탐사대를 이용해 개발청을 도울 수 있다더군요. 그리고 치안국에서도 조금 돕기로 했고요.”
탐사대가 나선다면, 여기에 어느덧 3만 명에 달하는 치안대원을 보유한 치안국이 거들어준다면, 50만 명을 통제하는 것도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기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조용한 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들은 결국 돈을 벌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 아국으로 온 인물들이니만큼, 문제를 일으키면 추방한다고 알린다면, 그리고 이런 추방자들의 뱃삯은 아국에서 지원해주지 않는다고 하면, 어지간한 이들은 조용히 일하다 돌아갈 겁니다.”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말에 괜찮은 방법이라는 듯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아. 그거 좋네. 문제를 일으키면 번 돈을 대부분 날리게 되는 셈이니까.”
“그렇지요? 그 외에도 여러 방책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 말에 정성국은 믿겠다는 얼굴로 조용한 곰을 바라본 후 이야기를 나누느라 조금 식은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조용한 곰의 보고를 듣던 정성국은 조용한 곰이 중국 대륙의 상황을 설명하자 눈을 빛내며 경청했다.
“호오. 오세번이 주나라 내부를 완전히 장악했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투로시노가 움직여 유럽 세력들이 오세번을 직접 지원하도록 만들었고, 유럽 세력들이 오세번에게 각종 군수물자를 지원하자, 오세번을 추종하는 세력이 강해지면서 다른 군벌들을 압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허. 생각보다 많은 군수물자를 지원해줬나 보네?”
“그게...저희가 조선의 조총을 청나라에 지원하자 유럽 세력들은 저희의 눈치를 살피며 주나라와 동녕국의 군수물자 판매를 멈춘 모양입니다.”
“응?”
정성국이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뜬금없다는 얼굴로 조용한 곰을 바라보자 조용한 곰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동아시아엔 3함대가, 동남아시아엔 7함대가 배치되어 있으니, 본국과 멀리 떨어진 식민지 총독부로서는 저희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잖습니까.”
“하하하. 이것 참...그래서 우리의 눈치를 보고 군수물자를 비축만 해두었다가, 투로시노가 부추기자 비축했던 군수물자들을 그대로 오세번에게 넘겼다?”
“그렇습니다. 전하. 여기에 주나라 내부에서 강력한 군벌이 바로 호북성을 장악한 군벌인데, 아시다시피 작년에 청나라의 맹공으로 깨진 후라서 말입니다.”
조용한 곰의 설명에 정성국은 피식 웃었고.
이런 정성국을 보고 조용한 곰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여기에 다른 군벌들도, 호북성이 청나라에 넘어간 이후엔 조금이나마 위기감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이대로라면 위험하다고요. 그러니...”
“하나둘 오세번에게 빌붙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오세번이 주나라 내부를 완벽하게 장악하게 되었다는 거군.”
“그러합니다. 전하.”
조용한 곰의 설명에 정성국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조용한 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주나라 내부를 정리한 오세번은 병력을 집중해 다시 호북성을 공격했다고 합니다.”
“호북성을? 그래도 상황을 이해하는 모양이네.”
현재 몽골 지역에서 준가르군과 청나라군이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니 청나라로서는 몽골 지역에 신경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주나라는 호북성을 탈환할 절호의 기회나 다름없었으니까.
물론 청나라 역시 바보는 아니라 꽤 많은 병력을 호북성에 남겨 두기는 했지만, 당장 청나라의 주요 관심사는 봉골 지역이고, 모든 지원은 몽골 지역으로 향할 테니 주나라로서는 충분히 해볼 만했다.
여기에 주나라가 준가르와 직접적으로 교류한 것은 아니지만, 주나라가 호북성을 공격해 청나라의 시선과 병력을 일부 분산시켜줌으로써, 청나라를 더욱 흔들 수 있기도 했고 말이다.
해서 정성국이 오세번의 판단을 칭찬하자 조용한 곰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오세번의 판단이라기보다는, 전하께서 그렇게 흘러가도록 만드셨잖습니까. 투로시노에게 명령해 유럽 세력을 움직였고, 유럽 세력이 계속해서 군수물자를 판매하자 오세번이나 정경의 야욕이 커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조용한 곰이 동녕국의 국왕인 정경을 언급하자 정성국이 다시 눈을 빛냈다.
“정경? 동녕국도 움직인 건가?”
“그렇습니다. 복건성의 병력을 북진시켜 절강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더군요.”
다른 때라면 모를까, 준가르가 몽골 지역을 공격하면서, 청나라는 다시 위태로워진 상황이라, 주나라와 동녕국이 청나라군의 시선과 병력을 어느 정도 붙잡아만 준다면, 청나라가 멸망할 수도 있다는 것은 모르지 않았다.
또한, 청나라가 망하면, 상황이 완전히 바뀌는 만큼, 이를 대비해 최대한 세력을 키울 필요가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유럽 세력이 군수물자를 판매하니, 주나라의 오세번과 동녕국의 정경은 더욱 과감히 움직일 수밖에 없고, 이것은 결국 정성국의 의도대로이니 놀라울 뿐이라고 덧붙이는 조용한 곰의 말에 피식 웃은 정성국은 잠깐 커피잔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중얼거렸다.
“그럼...때가 된 건가?”
이에 조용한 곰은 자세를 바로하고 정성국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투로시노도 마찬가지로 판단하고 있고요.”
“흐음...그럼 바로 투로시노에게 전하게. 청나라와 접촉하라고 말이네.”
“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