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1화
그렇게 이번에 할양받은 쿠웨이트 지역과 관련된 이야기를 마무리한 정성국은 잠깐 휴식을 취할 겸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고.
조용한 곰은 그런 정성국을 보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전하. 이건 조금 다른 건인데...”
“음?”
또 보고할 것이 있느냐는 얼굴을 하는 정성국을 보고 조용한 곰이 말했다.
“이번에 아국이 본격적으로 동남아시아 지역에 진출했고, 또 몇 년 후엔 인도 지역으로 진출할 예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네덜란드 대사가 꽤 흥미로운 제안을 해왔습니다.”
“흥미로운 제안?”
정성국이 조용한 곰에게 막 내린 따끈따끈한 커피를 건네면서 되묻자 조용한 곰이 이를 받아들며 답했다.
“예. 아국의 아프리카 진출을 돕겠다더군요.”
“아프리카 진출이라...”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말에 인상을 굳히고 중얼거렸다.
정성국도 처음 캐롤라이나 지역을 방문해 흑인 노예 출신 백성들을 만나 더는 노예무역을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아프리카 진출을 고려했었다.
다만 북미왕국의 사정상 현지 세력과 협조해야 하는데, 문제는 아프리카의 큼지막한 세력들은 대부분 예전부터 아프리카 지역에 진출해 세력을 쌓아 둔 유럽 나라들의 종속되어 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노예무역을 통해 돈을 벌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아직 이들은 같은 아프리카인이나 같은 흑인이라는 정체성이 없기에, 그리고 아프리카 지역은 예전부터 주변 부족이나 적대 부족을 공격해 이들을 노예로 삼아 부려왔었기에 이들의 행동을 나름대로 이해는 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경제의 근간이 노예무역인 세력과 손을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정성국은 아프리카 지역으로 직접 진출하기보다는 이들에게 노예를 사들이는 유럽 나라들이 노예무역에서 손을 떼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고 말이다.
아무튼, 그렇기에 정성국은 조용한 곰이 아프리카 진출을 다시 입에 올리자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머리를 살짝 부여잡았고.
조용한 곰 역시 그런 정성국의 심정을 이해하기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을 때, 정성국이 생각을 정리한 듯 크게 한숨을 내쉬고 조용한 곰을 바라보았다.
“후우. 어떻게 돕는다는 거지?”
“동남아시아 지역의 말라카 항이나 실론 섬 일부를 아국에 할양한 것처럼, 네덜란드가 확보한 아프리카 영토 중 일부를 할양해 아국의 아프리카 진출을 돕겠다더군요.”
아프리카 지역은 원래 대항해시대를 연 포르투갈이 꽉 잡고 있었지만, 수에즈 운하가 없는 현시대에서 아시아로 이동하려면 결국 아프리카 대륙을 빙 돌아가야 했기에 유럽 각국이 하나둘 아프리카에 진출해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해서 네덜란드 역시 아프리카에 여러 식민지와 항구를 확보했는데, 이중 노예무역의 중심지였던 골드코스트에 건설한 식민지와 아시아 무역을 위해 아프리카 최남단에 건설한 식민지의 땅 일부를 북미왕국에 할양할 의향이 있다는 말을 네덜란드 대사가 했다고 조용한 곰이 설명하자 정성국은 놀랍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허. 그렇게 고생해가며 확보한 아프리카 식민지 일부를 넘기겠다고?”
네덜란드 대사는 얼마 안 되는 물자만 넘겨주면 저 두 지역에 항구를 건설할 정도의 땅을 북미왕국에 넘겨줄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는데, 정성국은 그 부분에서 네덜란드의 속셈이 무엇인지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네덜란드가 저 지역들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 무척 고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이러한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이 쓰게 웃으며 네덜란드 대사와 여러 차례 만나며 파악한 그의 속내를 설명하기 시작했고.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아국이 동남아시아에 진출하며 7함대를 창설해 배치하면서, 동남아시아에서 활동하던 유럽 해적들 일부가 7함대를 피해 인도 지역과 아프리카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보고가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정성국은 자신이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점을 떠올렸다.
조용한 곰의 말대로 처음 북미왕국에서 7함대를 동남아시아에 파견하고, 이 7함대가 필리핀 북부의 일로카노 항에서 정비를 마치고 다시 말라카 항까지 천천히 이동하면서 7함대의 존재가 동남아시아 해역에 널리 알려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북미왕국이 동남아시아 지역까지 진출하고, 또 대규모 함대를 파견했다는 것이 알려지자, 북미왕국 해군을 피해 카리브 해에서 이 머나먼 동남아시아의 바다로 도망쳤던 해적들은 치를 떨며 다시 7함대를 피해 인도 지역과 아프리카 지역으로 도망치고 있었고.
강성한 유럽 출신 해적들이 북미왕국 해군과 맞서기보다는 치를 떨며 동남아시아 해역을 떠나자, 기존의 동남아시아 출신 해적들도 말라카 항에 주둔하고 있는 7함대의 눈치를 살피거나, 혹은 함께 인도 지역과 아프리카 지역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그러니 아프리카 해역과 인도 해역은 해적들로 바글바글했고, 대프랑스 전쟁으로 해군력에 약화된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항로의 안전을 위해 북미왕국을 끌어들이는 수단으로 영토 할양을 선택했다는 생각이 든 정성국이 중얼거렸다.
“아. 아국이 인도 지역까지 진출하면 해적들 상당수가 아프리카 해역으로 집중될 테니...우리를 끌어들여 아프리카 해역의 안전을 꾀하겠다는 생각인가?”
“그렇습니다. 더불어 대프랑스 전쟁으로 국력이 저하된 네덜란드로서는 네덜란드령 아프리카 식민지를 노리는 잉글랜드나 프랑스가 부담스러울 테니 영토 일부를 아국에 할양하고, 아국이 네덜란드가 넘긴 땅에 거점 항구를 건설하고 소규모라도 병력을 파견한다면, 잉글랜드나 프랑스는 섣불리 움직일 수 없다는 점도 고려한 모양이고요.”
북미왕국과 네덜란드가 맺은 동맹이 방어동맹이긴 하지만, 이는 본토에 한정된 동맹이었다.
즉 타국이 네덜란드의 식민지를 공격한다고 북미왕국이 네덜란드를 도와 네덜란드의 식민지를 침략한 나라에 선전포고할 의무는 없었다.
그리고 이런 동맹의 성격을 다른 나라들도 알고 있었고.
다만 이 네덜란드 식민지 인근에 북미왕국의 군사기지가 존재한다면, 타국, 특히 유럽 나라들은 이 네덜란드 식민지를 공격하기가 쉽지 않았다.
인근에서 전쟁을 벌였다가 북미왕국이 휘말리기라도 하면 여러모로 골치 아플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해서 네덜란드는 이를 노리고 식민지의 중요 도시 인근의 땅을 북미왕국에 할양하려 한다는 조용한 곰의 설명에 정성국이 정리했다.
“흠. 항구를 건설할 정도의 조그마한 땅을 내어줌으로써 네덜란드령 아프리카 식민지의 안전과 아프리카 항로의 안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 이거로군.”
“맞습니다. 네덜란드 대사와 몇 번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러한 속셈이 훤히 드러나더군요. 다만, 네덜란드가 확보한 골드코스트 해안가나, 아프리카 최남단에 항구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은 매력적이고, 특히 골드코스트 해안가는 노예무역의 중심지였던 곳이라, 노예무역의 완전한 근절을 위해선 이 지역에 진출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네덜란드의 속셈은 모른 체해도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확실히 북미왕국의 국력을 이용하려는 네덜란드의 속셈이 조금 괘씸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네덜란드의 제안은 매력적인 것이 사실이었다.
아프리카 대륙은 워낙 넓고 그만큼 해안가도 긴 편이라 아프리카 해역의 안전을 위해선 아프리카 서부와 남부, 그리고 동부에 각각 거점을 만들고, 최소 분함대 정도는 배치해야 하는데, 네덜란드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쉽게 아프리카 서부, 그리고 남부에 거점을 건설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더불어 유럽 나라들은 북미왕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터라 노예무역에서 손을 뗐지만, 그동안 노예무역을 해왔던 노예상인들이나, 노예무역을 통해 경제를 유지해왔던 아프리카 세력들까지 노예무역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노예무역의 근절을 위해선 한때 노예무역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골드코스트에 어느 정도의 함대를 배치해 이 해안가에 돌아다니는 노예선을 박멸할 필요가 있었고.
또한, 네덜란드령 골드코스트의 위치는 전생의 가나이고, 네덜란드령 케이프의 위치는 전생의 남아공인데, 두 지역 모두 적게나마 석유가 매장되어 있는 지역이라는 네덜란드와 협상해 자원 개발권을 확보한다면 굳이 먼 곳에서 석유를 수송할 필요 없이 현지에서 필요한 석유를 뽑아 사용할 수도 있었으니.
‘석유뿐만이 아니지. 가나는 골드코스트라 불릴 정도로 금이 많이 나는 지역이기도 하고...남아공이야 금, 다이아몬드 같은 귀금속과 수많은 지하자원이 엄청나게 매장되어 있는 지역이잖아? 그러니 네덜란드와 협상해 자원 개발권을 따내던가, 그게 아니면 남아공의 자원을 개발하려는 네덜란드 회사에 투자한다면 손쉽게 자원을 확보할 수도 있어 보이니 네덜란드의 제안을 받는 것이 맞긴 한데...’
다만 정성국은 네덜란드가 동남아시아에서 퍼지르게 싸둔 똥 때문에 동남아시아에서 곤욕을 치렀다는 점을 떠올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끙. 그렇기는 하지. 다만, 네덜란드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동남아시아 지역에서처럼 아프리카 지역에서도 아국이 네덜란드와 무척 각별한 관계라고 알려질 것이 뻔한데...네덜란드가 온건하게 식민지를 건설하는 유형은 아니라 그 점이 조금 걸리긴 하네.”
골드코스트에 건설한 식민지는 잘 모르지만, 네덜란드령 케이프의 경우 식민지를 건설하고 이 케이프 식민지에 필요한 식량을 비롯한 물자를 대기 위해 대농장을 만들면서 그동안 자유롭게 목축하며 네덜란드인들과 물물교환을 해왔던 원주민들은 쫓겨나거나 공동체가 붕괴했고, 원주민들은 이를 막기 위해 네덜란드에 덤볐지만, 화약 무기로 무장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군대를 상대하긴 어려웠다.
해서 이들은 결국 유럽인 농장주 밑에서 일하는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고.
해서 이를 기억하는 정성국이 표정을 찌푸리자, 조용한 곰도 이미 그러한 내용을 짐작하고 있는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아마 식민지를 건설하겠답시고 원주민과 적지 않은 마찰을 빚긴 했을 겁니다. 식민지를 건설할 정도로 괜찮은 땅에 아무도 살지 않을 리는 없으니까요. 다만 어차피 아국은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었으니...”
조용한 곰이 말을 흐리자 정성국은 표정을 구기며 조용한 곰이 차마 하지 못한 내용을 말했다.
“네덜란드의 제안을 받지 않더라도 아국이 아프리카 지역에 진출하면 아프리카 세력들은 아국이 네덜란드와 무척 각별한 관계라고 생각할 거란 말이지?”
이에 조용한 곰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긍정에 한숨을 내쉬면서 투덜거렸다.
“후우. 결국, 동남아시아에서처럼 네덜란드가 퍼지르게 싼 똥 때문에 고생해야 한다는 건가. 이거 괜히 동맹을 맺은 것 같은데...”
그리고 정성국의 투덜거림에 조용한 곰이 그를 달래듯 말했다.
“다만 지금껏 아국이 아프리카 진출을 미룬 이유도 신뢰할만한, 그리고 손을 잡을만한 현지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잖습니까. 그러니...”
동남아시아 지역과는 다르게 현지 세력을 설득할 일이 없지 않겠느냐는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뒷머리를 긁적이다 답했다.
“흠. 그건 또 그렇지. 알겠네. 그럼 네덜란드 대사와 협상해 보게.”
“알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자원 개발권 정도는 확보해보도록 하고.”
정성국의 말에 조용한 곰이 의아한 듯 물었다.
“이 지역들에도 석유가 묻혀 있을 거라 보십니까?”
“지형을 살펴보면 충분히 있을법해. 그러니 자원 개발권을 확보하게.”
“알겠습니다. 네덜란드는 아프리카 식민지의 안전을 위해 우리를 끌어들이려고 하는 만큼, 자원 개발권을 달라는 아국의 요청을 거부하진 쉽지 않을 테니 그러도록 하지요.”
“그리고 나중에 이 두 지역의 자원을 개발할 때, 어지간하면 원주민들을 우선해서 채용하게.”
조용한 곰은 정성국이 슬쩍 덧붙인 말의 진의를 깨닫고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원주민들을 채용할 때, 두둑한 대가를 지급해서 원주민들의 가치를 높이라는 뜻이지요?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