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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710화 (710/850)

710화

정성국은 그저 라디오 수신기에 귀 기울이고 있는 왕실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괜히 응접실에 라디오 수신기를 가져다 놨나? 대화가 사라졌네.’

보통 정성국은 왕실 가족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그리고 저녁 식사 후 응접실에서 다과를 즐기며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 시간을 정성국은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아무래도 서로 바쁘다 보니 가족들과 오붓하게 대화를 나눌 시간이 많지 않기도 했고, 일단 북미왕국은 왕정국가이다 보니 아이들의 교육, 특히 인성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 정성국이 이 대화 시간을 통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던 탓이다.

헌데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고, 라디오에 호기심을 보이는 아내들과 아이들로 인해 라디오 수신기를 응접실에 가져다 놓으면서, 그리고 저녁 식사 후 응접실에 모이는 것은 보통 7시 전후인데, 하필 이때 보도 방송과 라디오 연극이 방송되고, 이 라디오 연극에 왕실 가족들이 완전히 빠져버리면서 다과와 함께 이런저런 토론을 나누던 시간은 사라져 버렸고.

이에 정성국은 라디오 수신기를 치워야 하나 잠깐 고민했지만, 아무래도 궁 밖을 나가기 어려운 아이들의 경우 라디오 방송을 통해 궁 밖의 사정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도 있고, 한창 예민할 사춘기에 전생으로 치면 TV나 컴퓨터, 혹은 스마트폰을 제한하는 꼴이라 썩 내키지 않았다.

그리고 라디오 연극에 집중하며 서로서로 손을 잡고 라디오 수신기에서 들려오는 배우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왕실 가족들의 모습이 썩 나빠 보이지는 않았기에 정성국은 그저 피식 웃고 커피를 마시며 라디오 연극이 끝난 후 이에 관련해 가족들이 대화를 나눌 터이니 맞장구치기 위해 라디오 수신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막 억울하게 누명을 쓴 주인공이 자신을 잡으려는 치안대원들을 피하려고 창문으로 몸을 던지고, 효과음으로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라디오 연극이 끝나고 광고 방송이 들려오자 라디오 연극이 시작되면서부터 집중하느라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왕실 가족들이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아니! 어떻게 여기서 끊을 수가 있지!?”

“그래야 사람들이 내일 방송을 기다릴 테니 당연한 것 아니야?”

분개한 정안문을 보고 한심스럽다는 얼굴로 쏘아붙이는 정나리였고.

남매답게 서로 투닥이는 둘을 보고 전아라는 빙긋 웃으며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라디오 연극이 재밌긴 하네요. 기존의 연극보다 조금 자극적인 것 같기도 하고요.”

“하하하. 그런 면이 없지는 않지.”

원래는 기존의 연극들을 적당히 라디오 연극에 맞게 각색할 생각이었지만, 정성국으로서는 기존의 연극들만 각색해 방송하는 것이 조금 별로라 슬쩍 개입한 결과나 다름없었기에 정성국이 멋쩍은 웃음을 터트리며 이렇게 대답하자 옆에 있던 하얀 들꽃이 간식거리를 정성국과 전아라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 때문인지 오로지 라디오 연극을 듣기 위해 라디오 수신기를 사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해요.”

“하하하. 그래?”

“예. 문제는 라디오 수신기를 구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지만요.”

하얀 들꽃의 말에 정성국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알기로 미리 생산해서 창고에 보관했던 라디오 수신기만 하더라도 10만 개가량은 되었기에.

“음? 방송 시작하기 전에 쌓아 둔 라디오 수신기가 10만 개가량은 될 건데? 고작 2주 만에 그 라디오 수신기가 다 팔렸다고?”

라디오 수신기는 덩치가 큰 가전제품이나 다름없었다.

즉, 가구당 1개만 사면 그만이었고, 새한성 인근 지역에서만 방송을 수신할 수 있었으니 그 정도 물량이라면 꽤 오랫동안 판매할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고작 2주도 되지 않아 다 팔렸다는 사실에 정성국이 기겁하자 하얀 들꽃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만큼 라디오 연극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방증이겠지요.”

“허어. 그래도 그렇지...”

“그리고 의외로 먼 지역에서도 감도가 조금 나쁠 뿐이지 라디오를 수신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저 새나주나 새목포 주민들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라디오 수신기를 구매하려고 기차를 타고 새한성을 방문한다고 해요.”

물론 전리층이 전파를 반사한다면 그보다 더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도 전파를 수신할 수 있기는 하지만 안정적이지가 못했기에 돈과 심력만 낭비하는 꼴이 될 거라는 것이 정성국의 판단이었기에.

헌데 하얀 들꽃은 더 당황스러운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언제까지 새한성에서만 라디오 방송을 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짐작하는 다른 지역의 주민들도 기왕 새한성에 방문하는 김에 라디오 수신기를 사서 가져간다고 하더라구요.”

그러면서 라디오 수신기를 사기 위해 무려 보스턴에서 새한성까지 방문한 이도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자 정성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보스턴이면 절대로 전파를 수신하지 못할 텐데?”

이에 옆에 있던 전아라가 대신 답했다.

“그래도 라디오 수신기는 요새 떠오르는 가전제품이니 미리 구매해 주변에 자랑도 좀 하고, 나중에 해당 지역에서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면 라디오 수신기를 구한다고 애쓸 필요 없다는 것도 고려했겠지요.”

워낙 부유한 북미왕국의 백성들은 가전제품을 구매하는 데 망설이지 않았기에 새로운 가전제품들은 언제라 물량이 부족했다.

그러니 처음으로 방송을 시작한답시고 대량의 라디오 수신기를 쌓아 두고 팔 때, 미리 구매한 거라는 전아라의 설명에 정성국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끙...진공관 생산량을 대거 늘려서라도 라디오 수신기 생산량을 늘리긴 해야겠네.”

“예. 꼭 그래야 할 것 같아요. 특히, 라디오의 파급력이 생각보다 강해서 찻집이나 식당에서도 손님을 끌어모으기 위해 라디오 수신기를 사들이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물량이 사라졌거든요.”

“아. 그 점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

하얀 들꽃의 말에 정성국이 혀를 찼다.

생각외로 라디오의 파급력이 대단했기에 이를 미처 고려해야 했는데, 전생의 기억 때문에 오히려 라디오의 파급력을 과소평가한 셈이었으니.

그리고 하얀 들꽃은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슬쩍 조언했다.

“그 때문에 라디오 수신기가 없는 상가는 손님이 줄어들어 자영업자들이 울상이라고 하니 라디오 수신기를 상점 위주로 먼저 보급하는 것이 나을 것 같고요.”

“끙...알겠어. 따로 조치를 취해둘게.”

* * *

정성국은 조용한 곰이 건넨 문서를 확인하고 순간 움찔하며 중얼거렸다.

“이건...”

그리고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에 오스만 제국과 맺은 조약문입니다. 이것으로 바스라 남쪽의 사막 지대, 전하께서 쿠웨이트 지역이라고 명명하신 땅은 아국의 영토가 된 셈이지요.”

7함대에서 페르시아 만 안쪽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파견한 소규모 정찰 함대가 말라카 항으로 복귀하면서 이와 관련된 보고서를 새한성으로 보냈고.

조용한 곰에게 이를 보고받은 정성국은 오스만 제국과 협상해 전생의 쿠웨이트 지역 일부를 할양받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전에 오스만 제국의 요청으로 신식 소총 5천 자루와 총알 1천만 발을 넘기면서 오스만 제국은 북미왕국이 원하는 땅 일부를 할양해주기로 약속했기에.

해서 조용한 곰은 곧바로 오스만 대사와 협상해 결국 일전에 북미왕국이 오스만 제국에 군수 물자를 넘긴 대가로 쿠웨이트 지역을 북미왕국에 할양한다는 조약을 체결했고, 덕분에 오늘부터 쿠웨이트 지역은 북미왕국의 영토라고 단언하자 정성국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오. 그래?”

그러면서 정성국은 조약문을 꼼꼼히 읽고, 그 뒤에 첨부된 페르시아 만 안쪽의 지도를 살핀 후 탄성을 질렀다.

“휘유. 생각보다 할양받은 영토가 크네?”

지도에는 이번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할양받은 영토가 표기되어 있었는데, 이 영역이 전생의 쿠웨이트의 영토에 절반에 달했기에 정성국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이 지역이 아무것도 없는 사막 지역이라 별다른 가치가 없다 하더라도, 고작 신식 소총 5천 자루와 총알 1천만 발을 넘기면서 전생의 쿠웨이트의 영토를 모두 넘겨받긴 무리였다.

해서 정성국은 조용한 곰에게 석유가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한 쿠웨이트 남쪽 부르간 유전 지대의 위치를 찍어주며 이 지역만 확보하면 된다고 이야기했었고.

헌데 지도에 표기된 이번에 오스만 제국이 북미왕국에 할양한 영토는 전생의 쿠웨이트 지역의 거의 1/4에 달하는 영역이라 정성국이 놀라자 조용한 곰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아국이 원했던 땅이 쓸모없는 사막 지역이잖습니까. 그 때문인지 선심을 쓰듯 큼지막하게 떼어주더군요.”

이에 정성국은 활짝 웃었다.

오스만 대사의 선심 덕분에 추가로 소규모 유전지대를 더 확보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하하. 그런가? 뭐 나쁘지 않네. 헌데 오스만 대사가 의아하게 생각하지는 않던가?”

“물론 처음 협상을 시작하고 아국이 이 쿠웨이트 지역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오스만 대사는 아국의 선택에 무척 의아해하긴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아국은 이 페르시아 만 안쪽의 상황을 제대로 확인하겠답시고 함대까지 파견해 살폈는데 정작 아국이 원한 것은 사막 지역인 이 쿠웨이트 지역이었으니까요.”

“그래? 허면...”

물론 이미 조약을 체결했으니 혹여 오스만 대사가 이 지역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는 못한 듯싶었지만, 혹시나 해서 묻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저 오스만 대사는 저에게 정말 북미왕국이 원하는 땅이 이 쿠웨이트 지역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고, 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곧 납득하더군요.”

“음? 납득했다고?”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이 고개를 갸웃하자, 조용한 곰이 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아마 오스만 대사는 아국의 기술력이라면 이 사막 지역도 충분히 개발할 수 있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훗날 오스만 제국과의 대규모 무역을 위해 제대로 된 거점이 필요하다며 페르시아 만 안쪽의 땅을 원한다는 북미왕국이 해안가뿐만 아니라 내륙 깊숙한 곳까지 원하니 오스만 대사는 조금 의아하긴 했다.

아무리 거대한 항구 도시를 만든다 하더라도 해안가에서 30km가량 떨어진 곳까지 필요한가 싶었기에.

다만 아무것도 없는 사막 지역이니만큼, 괜히 쩨쩨하게 굴 이유가 없었고, 북미왕국의 기술력과 자본력을 생각해 본다면 해안가에서 내륙 지역까지 거대한 도시나, 혹은 농장을 건설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기후 때문에 농사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아이슬란드에서도 여러 시설을 통해 작물을 재배하는 데 성공한 북미왕국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오스만 대사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잠깐 고민한 후에 아예 선심 쓰듯 북미왕국이 원하는 영역보다 더 넓은 지역을 할양해버렸다.

북미왕국이 에스파냐에 할양받은 필리핀 북부 지역을 개발한 것이나, 이번에 네덜란드에 할양받은 말라카 항을 개발하는 것을 보면, 북미왕국은 주로 현지인들을 고용해 해당 지역을 개발하는 만큼, 북미왕국이 이 쿠웨이트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돈을 풀면, 그 돈은 결국 가까운 바스라로 흘러 들어가, 바스라의 경제가 발전하리라 판단하고, 더 많은 영토를 할양해 북미왕국이 더 많은 돈을 쓰게 만들려 한 것이다.

이러한 오스만 대사의 생각을 완벽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추측한 조용한 곰이 이를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피식 웃었다.

물론 쿠웨이트 지역을 개발하려면 가까운 바스라 지역의 백성들을 대거 고용해야 하고, 당장은 일꾼들에게 내어주는 돈이 바스라로 흘러 들어가겠지만, 이를 계속 두고 보지는 않을 생각이었기에.

다만 그러기까지는 꽤 오랜 시일이 흐른 후일 것이 분명했기에 정성국은 따로 이를 언급하지는 않고 말을 돌렸다.

“아무튼, 이번 조약으로 결국 이 쿠웨이트 지역이 아국의 영토가 되었으니 이제 이 지역의 관리가 문젠데...”

정성국이 탁자 위에 놓인 지도를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조용한 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관리라고 해도...이 지역의 기후가 워낙 열악한 터라, 일부 병력이라도 파견하려면 결국 제대로 된 거점 항구 도시를 건설해야 할 것 같은데 당장은 무리이지 않습니까.”

그나마 정찰 함대는 겨울에 쿠웨이트 지역을 방문했기에 크게 고생하지 않았지만, 여름에는 무더운 중동지역답게 4, 50도에 달하는 기온을 자랑하는 만큼, 다른 지역처럼 일부 물자만 지원해주고 소규모 선착장을 건설하게 하는 방식을 쓸 수는 없다는 것을 아는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말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해. 일단 지금 개발 중인 동남아시아의 말라카 항이나, 팔렘방 인근 지역의 개발에 집중해야 할 시기니까.”

“예. 그리고 당장 쿠웨이트 지역에 묻혀 있는 석유가 급한 것도 아니고요.”

이미 팔렘방 인근에 묻혀 있는 석유를 시추하기 위해 수송선에 각종 시추시설을 왕창 실어 출발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쿠웨이트 지역에 막대한 석유가 묻혀 있다고 해도 당장 이 지역을 개발할 필요가 없었다.

특히 실론 섬은 쿠웨이트 지역보다는 팔렘방에 더 가깝기도 했고.

해서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말에 수긍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일단은 그냥 방치해두자?”

“그게 최선일 것 같습니다. 일부는 외무청의 관리를 쿠웨이트 지역으로 파견해 쿠웨이트 지역이나 주변의 유목민들을 미리 규합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외무청 관리만을 보내기엔 위험할뿐더러 환경도 워낙 열악한 터라...”

이에 정성국도 조용한 곰의 의견에 동의했다.

아무래도 이 쿠웨이트 지역을 개발하려면 빨라야 2, 3년 후가 될 텐데 외무청 관리를 파견해 그때까지 알아서 주변 유목민들과 접촉해보라고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였으니까.

“그래. 급할 것도 없는데 괜히 소중한 외무청 관리를 위험에 처하게 하거나 고생시킬 필요는 없겠지. 알겠네. 그럼 당분간은 내버려 두는 것으로 하지. 물론 오스만 제국에도 이를 알리고.”

“알겠습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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