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5화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던 한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나무 밑에서 힘없이 앉아 있는 왜소한 체구의 사내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야!”
이에 힘없이 앉아 있던 왜소한 체구의 사내는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고 느릿하게 손을 들어 인사했고, 그런 친구의 반응에 건장한 체구의 사내는 오히려 답답하다는 얼굴로 손짓했다.
“뭐해! 늦었어! 빨리 와!”
왜소한 체구의 사내는 건장한 체구를 지닌 사내의 재촉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미안. 어제 일하다 무리한 모양인지 오늘은 몸이 영 안 좋아서 말이야. 해서 당분간 쉴 생각이니 혼자 다녀와.”
이들은 말라카 항 인근에 사는 원주민으로, 그동안은 주로 네덜란드가 지배하고 있는 말라카 항에서 일거리를 찾아 입에 풀칠하며 살았다.
그러다 최근에 북미왕국이라는 세력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네덜란드가 지배하고 있던 말라카 항을 양분했으며, 자신들의 영역을 개발하기 위해 후한 조건으로 일꾼을 대량으로 모집했고, 덕분에 건장한 체구의 사내나 왜소한 체구의 사내나 북미왕국의 일꾼으로 며칠간 일하며 일당을 꽤 두둑하게 받았었고.
다만 왜소한 사내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오랫동안 일을 하긴 힘들었는데, 북미왕국이 일꾼을 고용하며 지급하는 일당이 워낙 만족스러워 쉬지 않고 무리하게 일을 하다 보니 결국 탈이 난 모양이라 당분간을 쉴 생각이라 이를 자신의 친구인 건장한 체구의 사내에게 이야기하자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어차피 오늘은 일 못 해.”
“응?”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 듯한 얼굴을 하는 왜소한 사내였고.
그런 왜소한 사내를 보고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말했다.
“오늘은 북미왕국의 기념일이래. 북미왕국의 역법으로는 오늘이 새해라나? 그래서 북미왕국인들은 오늘부터 3일간 축제를 벌인다더라.”
“오늘이 새해라고?”
“그래. 뭐 네덜란드놈들도 새해라고 함께 축제를 벌이던데? 그러니 공사를 관리할 인원이 없어서 공사도 3일간은 안 한다고 하고.”
이에 왜소한 체구의 사내가 다행이라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거 잘됐네. 어차피 쉴 생각이었는데 3일간 휴식이라니. 헌데 그럼 넌 어딜 가려고 한 거야?”
“말했잖아. 저들은 오늘부터 3일간 축제라고. 그리고 축제엔 술과 음식이 넘쳐나지.”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씩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자 왜소한 체구의 사내는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자신의 친구를 바라보고 말했다.
“설마...몰래 저들의 축제에 참여해서 음식과 술을 먹으려고? 위험하지 않을까?”
이러한 걱정에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북미왕국은 쪼잔한 네덜란드와는 달라. 자신들의 영역을 기웃거리며 뭐 얻어먹을 것이 없나 하는 원주민들을 초대해 고기와 술을 대접한다더라. 그뿐만이 아니라 이 표식을 지닌 원주민들에게는 추가로 식량 포대를 준다고 하더라고.”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내보인 표식은 북미왕국이 고용한 원주민들을 관리하기 위해 내어준 작은 표식으로 한 번이라도 북미왕국에게 고용된 원주민들은 저 표식을 받은 터라, 표식을 지닌 원주민들에게 추가로 식량 포대를 준다고 한다면, 아마 이 근방의 원주민 남성들은 대부분 추가로 식량 포대를 받을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왜소한 체구의 사내로서는 도저히 자신들에게 식량을 퍼주는 북미왕국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아 이 사실을 이야기해준 친구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체 왜 식량을 나눠줘?”
이에 건장한 체구의 사내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나도 자세한 것은 모르지. 다만 얼핏 듣기로는 오늘이 북미왕국의 기념일이라 나라에서 모든 백성에게 식량을 나눠주는 풍습이 있는데, 이 표식을 지녔다는 것은 자신들의 백성이나 다름없으니 식량을 나눠준다고 하던데?”
“그게 대체 무슨...”
왜소한 체구의 사내는 이러한 대답에 혼란스럽다는 얼굴을 하자 건장한 체구의 사내는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도 이해가 안 가긴 하는데...중요한 것은 북미왕국의 영역에만 가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술과 고기를 대접하고, 이 표식만 있다면 추가로 일주일 치 식량을 나눠준다는 거지. 그러니 일단 배도 채우고 식량도 받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어?”
“으음...”
건장한 체구의 사내 말대로 이유가 무엇이든 북미왕국에서 술과 고기, 그리고 일주일 치 식량을 제공한다면 일단 가서 받아오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한 왜소한 체구의 사내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네 말이 맞다. 일단 준다는 데 받긴 해야지. 바로 가자.”
“그래. 가자고. 그리고 간 김에 술과 고기도 마음껏 즐기고 말이야.”
* * *
“엄청나게 북적이는군.”
이번에 새로 창설된 7함대의 함대 사령관인 이홍섭은 갑판 위에서 북적이는 말라카 항을 보고 중얼거리자 그를 따라 갑판 위로 나온 보좌관이 입을 열었다.
“공짜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고, 덕분에 이곳에서 하루 거리에 사는 원주민들이 몽땅 몰려왔다고 하니 저 넓은 말라카 항이 북적이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피식 웃은 이홍섭이 보좌관을 보고 물었다.
“식량 상황은?”
“충분합니다. 이를 위해 일로카노 항에 비축되어 있는 식량을 왕창 가져왔으니 말입니다.”
“고기나 술이 부족하진 않고?”
“예. 작전대로 고기나 술도 충분한 양을 미리 구해두었으니까요.”
보좌관의 대답에 이홍섭은 만족한 표정을 짓다 전선의 냉장창고에서 고기를 꺼내는 병사들과 저 원주민들이 먹을 음식을 만드느라 화덕에서 떠나지 못하며 고생하는 원주민 여성들을 보고 이 축제가 끝난 후 병사들은 조금 더 쉬게 하고 자신들에게 고용되어 3일 동안 쉬지 않고 수천 명의 음식을 만들고 있는 저 불쌍한 원주민 여성들에게는 약속한 일당보다 더 많은 일당을 내어주어야겠다고 생각할 때, 보좌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헌데...이게 정말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이홍섭은 수염이 삐죽삐죽 난 턱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7함대가 이렇게 원주민들까지 참여하는 축제를 벌이고, 식량마저 제공하는 것은 7함대에 동승한 외무청 관리 이자화의 권고 때문이었다.
처음 7함대가 새한성을 떠나 오랜 기간의 항해 끝에 말라카 항에 도착했을 때, 7함대에 동승한 이자화는 원주민 말을 할 줄 아는 네덜란드인들의 도움을 받아 말라카 항 인근 원주민 마을을 돌아다니며 그동안 네덜란드가 장악한 말라카 항 서쪽을 이젠 북미왕국이 통치한다는 사실과, 이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일꾼을 대거 모집하고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말라카 항 서쪽으로 찾아오라는 이야기를 했었고.
하지만 예상외로 북미왕국인들이 머무는 말라카 항 서쪽으로 찾아오는 원주민들은 드물었다.
이는 북미왕국에서 원주민들에게 약속한 일당이 네덜란드나 다른 유럽 상인들이 말라카 항을 방문해 원주민들을 고용할 때 지급하는 일당의 2배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자화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었고.
해서 이자화는 혹시 네덜란드가 무슨 수작을 부렸나 해서 자세히 알아보니 그동안 이 지역에 진출한 수많은 외국 세력이 워낙 행패를 부렸기에, 그리고 원주민들과의 약속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일을 시킬 때 얼마를 약속하든 정작 원주민들에게 던져준 돈은 쥐꼬리만도 못한 금액을 내어주는 터라, 원주민들은 이번에 새로 방문한 북미왕국인들이 얼마를 약속하던 그 대가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혀를 찰 수밖에 없었고.
물론 이러한 분위기는 북미왕국이 약속한 대로 네덜란드보다 2배에 해당하는 일당을 내어주고, 이를 받은 원주민들이 마을로 돌아가면서 이 사실이 퍼져 순식간에 뒤바뀌며 원주민들이 이 말라카 항 서쪽으로 몰려들긴 했지만, 이 일로 원주민들이 외부 세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던 이자화는 이를 심각하게 생각했고, 북미왕국은 다른 유럽 세력과 다르다는 것을 이 지역, 그리고 동남아시아 전체에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7함대가 이곳 말라카 항에 머물면서 팔렘방 술탄국을 설득하기 위해 팔렘방에 머물고 있던 외무청 관리가 잠깐 찾아와 이 동남아시아에서 네덜란드의 인상이 무척 좋지 않은데 북미왕국이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다 보니 원주민들은 북미왕국도 무척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리자 이자화는 이러한 북미왕국의 인상을 확실히 바꿀 필요가 있다고 여겼고.
해서 이자화는 이홍섭 7함대 사령관에게 이를 보고하며 이대로라면 원주민들에게 북미왕국은 또 다른 정복자란 인상만 굳어질 테니 빠르게 이를 탈피할 필요가 있다며 곧 있을 신년 축제를 이용하자고 건의했다.
신년 축제의 판을 키워 원주민들도 참여시키고, 북미왕국이 일꾼들의 관리를 위해 나눠준 표식을 지니고 있는 이들에게는 신년마다 나라에서 백성들에게 식량을 지급하는 것처럼 약간의 식량을 지급해 저들의 인식을 단숨에 뒤바꾸자고.
정복자가 아니라 원주민들의 친구로 말이다.
이에 이홍섭 7함대 사령관은 원주민들이 단지 네덜란드의 동맹이라는 이유로 북미왕국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지만, 이는 북미왕국이 진심으로 원주민들을 대한다면 결국 해결될 문제인데 굳이 막대한 돈을 퍼부어가며 그럴 필요가 있나 싶어 이를 지적하자 이자화는 분명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지만, 이홍섭의 방법대로 하려면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걸릴 텐데, 그렇게 시간이 걸리면 동남아시아에 퍼진 네덜란드의 악명이 고스란히 북미왕국의 이름을 물들일 수도 있는 터라, 나중에 이를 수정하려면 더 많은 노력과 돈이 들어갈 수도 있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어차피 이 말라카 항 인근의 원주민들이 모두 몰려온다 하더라도 이들이 소비할 술과 고기, 그리고 이들에게 나눠줄 약간의 식량쯤은 북미왕국의 입장에서는 푼돈이나 다름없는데, 이 푼돈을 사용한다면 동남아시아인들이 북미왕국을 바라보는 시선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으니 오히려 남는 장사라고 강조했다.
여기에 이자화는 이홍섭 7함대 사령관을 만나기 전에 팔렘방 술탄국과 반자르 술탄국에 파견되어 있던 외무청 관리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리며 지지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들이 보기에도 이자화의 계획은 한 번 해볼 만했기에 기꺼이 이자화를 지지한다는 편지를 보냈고.
이를 이자화가 꺼내 이홍섭 7함대 사령관에게 건네자 이홍섭으로서는 고심 끝에 이자화의 권고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해서 일부 전선을 필리핀 북부의 일로카노 항이나 자카르타, 수라바야, 마닐라로 보내 고기와 술을 대량으로 사들였고, 1684년 1월 1일이 되자 신년을 기념한다는 명목으로 원주민에게 대대적으로 식량을 제공하기 시작한 것이고 말이다.
다만 이홍섭의 보좌관은 이게 쓸데없이 돈만 쓰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강하게 품고 있었고, 해서 이를 감추지 못하고 살짝 표출하자 이홍섭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 민간 작전이 정말 효과가 있을지, 아니면 없을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하지만...이미 작전이 시작되었으니만큼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네.”
아예 시작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이미 원주민들과 함께하는 축제를 시작하고 원주민들에게 식량을 마구 안겨주고 있으니 괜히 초 치지 말라는 듯한 이홍섭의 말에 보좌관은 조금 멋쩍은 미소로 뒷머리를 긁적였고.
이홍섭은 그런 보좌관에서 눈을 떼고 북미왕국 병사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흥겹게 놀고 있는 원주민들을 바라보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저 모습을 보아하니...아예 효과가 없는 것 같지도 않고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