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4화
비극적인 선율과 함께 무대가 천천히 어두워지며 동시에 천장에서 막이 내려오자 극장 안의 관객들은 안타까운 탄식을 터트리거나 일부는 비통함에 잠시 눈물을 훌쩍였고.
그렇게 막이 완전히 내려와 무대를 가리고 연주되던 비극적인 선율이 멎자 극장 전체의 불이 켜지고 다시 막이 오르며 그간 열정을 다해 연기하던 배우들이 다 같이 손을 잡고 관객들에게 정중히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관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자 관객들은 점차 감정을 추스르고 하나둘 손뼉을 치기 시작했고.
‘짝짝짝짝!’
그 광경을 2층 관람석에서 지켜보던 정성국은 마찬가지로 멋진 연기를 선보인 배우들을 향해 짧게 박수를 보낸 후 고개를 돌려 옆에 앉아 있던 정평국을 바라보고 말을 건넸다.
“어떠냐?”
이에 정평국은 관객들이 보내는 열광적인 박수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대는 배우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흠. 의외로 볼만하네요. 물론 결말이 비극이라는 것과 처음으로 보는 연극을, 그것도 이런 내용의 연극을 안사람이 아니라 형님과 봐야 한다는 점이 영 아쉽지만요.”
방금 정평국이 형인 정성국과 함께 관람한 연극은 잉글랜드의 유명한 작가라는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북미왕국의 극작가가 적당히 각색한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연극으로 연극 자체는 나름 재미있었지만, 불행한 운명에 처한 연인들의 비극적 사랑과 관련된 내용이었으니 정평국으로서는 이걸 왜 안사람이 아니라 형인 정성국과 함께 봐야 하는 거냐고 볼멘소리를 할 수밖에 없긴 했고.
이를 이해한 정성국이 애써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큭큭큭. 그러니 진작에 제수씨랑 관람하지 그랬냐.”
북미왕국 예술가들을 키우기 위해, 그리고 북미왕국 백성들의 문화생활을 위해 건설한 이 새한성 극장이 완공된 지도 벌써 3년 전이었다.
또한, 이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작품을 무대에 올린 지도 벌써 두 달째였고, 이 작품이 생각외로 인기라 북미신문에서도 이에 관련된 기사를 몇 번 실었을 정도인데 진작 제수씨와 관람하지 않고 대체 뭘 했냐는 정성국의 타박에 정평국이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으로 형인 정성국을 바라보며 투덜댔다.
“아니. 제가 한가롭게 이런 연극을 볼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시간이 남으면 쉬거나 애들이랑 지내야지요.”
“크흠.”
생각해보면 북미왕국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일을 모두 보고받고 확인하느라 언제나 업무에 치여 사는 자신만큼이나 바쁜 이가 바로 동생인 정평국이었다.
거기에 왕실과 관련된 업무마저 모두 정평국에게 떠넘긴 이가 바로 정성국이었으니 정성국은 동생의 불만에 그저 헛기침만 하며 애써 동생의 눈빛을 피했고.
그런 형의 반응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정평국은 시선을 돌려 무대 인사가 끝난 후 다시 내려가는 막과,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 극장을 나서는 사람들을 바라본 후,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정성국을 보고 질문을 던졌다.
“헌데...대체 이걸 왜 보러 온 겁니까?”
정평국은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는 도중 갑자기 정성국의 전화를 받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에 올라탔는데, 그 자동차를 타고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 새한성 극장이었고, 자동차에서 내려 호위대원의 안내를 받아 2층 관람석에 도착하니 한창 업무를 봐야 할 정성국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정평국은 황당한 얼굴로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질문을 던졌지만, 정성국은 별말 없이 정평국에게 앉으라 손짓한 후 일단 연극부터 관람해보라고 이야기했었고.
해서 정평국은 이미 연극도 끝났겠다 다시 정성국에게 질문을 던지자 정성국은 정평국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 네가 올린 보고서를 확인해보니까, 라디오 내용이 너무 부실해서 말이야. 음악 방송과 보도 방송이 전부인 건 조금 너무하지 않아?”
정성국은 정평국에게 무선 통신 방송과 관련된 일을 모두 떠넘기면서 이 무선 통신 방송을 자신에게 익숙한 라디오라 명명했다.
계속해서 기술이 발전하다 보면, 아파트나 빌라, 혹은 마을 단위로 무선 통신을 이용해 전달 사항을 알리는 방송을 하기도 하는 만큼, 나중에 단어를 혼용하기보다는 처음부터 이를 분리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정평국이야 생소한 단어에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정성국이 만든, 그러나 왠지 모르게 영어스러운 단어가 한둘이 아니다 보니 그러려니 받아들였고.
그 후 정평국은 북미신문의 경영자들을 대거 투입해 라디오 방송국을 설립하고, 라디오를 채울 방송을 만들며 이에 관련된 내용을 보고서를 통해 정성국에게 보고했었는데, 정성국이 보기엔 영 부족했다.
정평국의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바로 이용할 수 있는 열기구는 총 8대라, 예비용으로 2대를 뺀 6대를 이용해 매일 6시간씩 방송을 시작하겠다고 했는데, 방송 편성표를 보니 그저 음악 방송과 보도 방송을 1시간씩 번갈아 가며 틀어주는 게 전부라 정성국으로서는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해서 정성국은 전생에서 라디오 방송이 처음 시작했을 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라디오 드라마를 떠올리고 정평국에게 조언을 해주기 위해, 그리고 그 역시 새한성 극장이 개관했을 때 이후 몇 번 정도 들렸을 뿐, 최근에는 들른 적이 없기에 겸사겸사 정평국을 이곳으로 부른 것이다.
“그렇긴 한데...딱히 두 방송 외에는 추가할만한 것이 마땅치 않아서요. 해서...어? 그럼 극장에 온 이유가?”
그리고 정평국은 정성국이 갑자기 라디오 내용이 부실하다면서 타박하자 그 점은 자신도 인정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새로운 방송을 고민했기에 문득 정성국이 자신을 극장으로 불러 강제로 연극을 관람시킨 이유를 깨닫고 정성국을 바라보자 정성국이 씩 웃었다.
“그래. 이 연극을 라디오로 내보내는 것이 괜찮아 보이지 않아? 라디오 연극이라고 해야 할까?”
“라디오 연극이라...”
정평국이 정성국이 언급한 라디오 연극이라는 단어를 되뇌며 생각에 잠겼을 때, 정성국이 슬쩍 덧붙였다.
“물론 방금 본 것처럼 기존의 연극은 대사뿐만 아니라 행동을 통해 많은 내용을 전달하는 만큼, 연극을 라디오로 내보내려면 각본을 완전히 뜯어고쳐야 하긴 하겠지만 말이지.”
“아. 그건 또 그렇네요. 기존의 연극과는 달리 라디오 연극은 인물 간의 대사, 음악, 음향 효과만을 이용해 극의 내용을 전개해야겠군요?”
정성국은 정평국이 라디오 드라마의 3요소를 정확히 파악하자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 정확해. 그리고 연극은 너무 길어도 관람하는 데 지칠 수밖에 없어. 그렇기에 중간에 휴식을 취하긴 하지만 오래 쉴 수 없으니 내용을 압축해 빠르게 전개할 수밖에 없고. 하지만 라디오 연극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 될 테고.”
“음? 그건 연극이나 라디오 연극이나 마찬가지지 않나요? 오랫동안 방송하면 오히려 청자들의 집중력이 떨어질 텐데?”
의문을 품는 정평국을 보고 정성국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적당히 쪼개면 되잖아.”
“예? 아. 매일 같은 시간에 방송하니...”
“그래. 오히려 쪼개면 뒷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청자들이 라디오 연극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겠지.”
연극이야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와야 하는 만큼, 오늘은 여기까지 내용을 진행하고 내일 다시 오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라디오 연극은 극장을 방문하는 것보다는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만큼, 오히려 내용을 적당히 쪼개고, 빠른 전개를 위해 쳐낸 디테일한 묘사들을 덧붙인다면 훨씬 내용이 풍성해질 테고, 그만큼 청자들이 라디오 연극에 몰입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정성국의 설명에 정평국도 그럴싸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그게 괜찮은데요?”
“그래. 그리고 연극과는 달리 소품이나 무대를 꾸밀 필요도 없으니 라디오 연극은 제작비도 적게 들 거야.”
연극의 경우 무대를 구성하는 것이 다 돈이었지만, 라디오 연극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이미 북미왕국엔 축음기가 있는 만큼, 자주 쓰이는 음향들을 녹음해 보관해둔다면 라디오 연극의 제작비는 더 줄어들 테고 말이다.
이러한 정성국의 설명에 정평국은 이 라디오 연극을 제작하기로 마음먹고 먼저 무엇을 해야 할지 잠깐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으음. 그럼 바로 각본가들부터 모집해야겠네요. 다만 연극의 내용을 풍성하게 늘리고 쪼갠다 하더라도, 매일 방송할 것을 생각하면 정말 많은 각본이 필요할 것 같은데...”
정평국의 말마따나 라디오 연극의 성패는 결국 각본에 달려 있었다.
문제는 아직 북미왕국에 정식 작가들은 많지 않았기에 각본 수급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 뻔했기에 정성국이 말했다.
“그렇지. 당장은 우리가 후원해주는 각본가들에게 이야기해 각본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으니 한계는 명확할 거야. 그러니 새로운 작가들을 양성하기 위해...왕실의 이름으로 공모전을 열어.”
“공모전이요?”
“그래. 곧 라디오 방송에 관한 기사들을 실을 거잖아? 그때 라디오 연극에 관해서도 상세히 알리고 라디오 연극에 쓸 각본을 모집한다는 신문 광고를 내보내라고. 상금도 내걸고. 한...5000원쯤? 그럼 나름 글솜씨에 자신 있는 친구들은 너도나도 덤벼들걸?”
정평국은 정성국이 내건 상금의 액수에 탄성을 질렀다.
새한성에서 가장 돈을 많이 받는 직업이라 알려진 연구청 소속 신입 연구원의 급여가 한 달에 50원인 것을 생각해보면, 확실히 큰돈이었으니 말이다.
“와우. 5000원이나요?”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많은 이들이 도전하지 않겠어?”
정성국의 말에 정평국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상금에 다들 눈이 돌아가 너도나도 각본을 쓰려 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으니.
그런 만큼 확실히 효과적일 테고.
해서 정평국이 대답했다.
“흠. 장기적으로 많은 각본가를 키우는 데는 그 방법이 최선일 것 같으니 바로 진행하도록 하지요.”
이에 정성국은 정평국과 공모전에 관해 한참 여러 조언을 해주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정평국을 다시 붙잡으며 말했다.
“아. 그리고 물론 나라에서, 그리고 왕실에서 라디오 방송국을 운영하는 데 들어가는 돈을 지원하겠지만, 그렇다고 자체적인 수입원이 하나도 없는 것은 좀 그렇잖아? 그러니 라디오 광고도 미리 준비해두고 각 방송 사이마다 집어넣어.”
“하긴...연극도 라디오를 통해 방송할 수 있으니 광고도 라디오를 통해 방송할 수 있긴 하겠군요. 그리고 라디오 방송의 영향력이 강해질수록, 라디오 광고의 효과도 커질 테고요.”
“정확해. 근데 그렇게 되면 신문을 보는 이들이 줄어들게 될 거야. 특히 라디오 방송은 음악 방송이나 라디오 연극 등 청자들의 흥미를 끌 방송들이 있는데, 신문은 정보 전달에 주력하고 있으니까.”
정성국의 지적에 정평국이 볼을 긁적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슬쩍 정성국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흐음...그럼 독자들을 신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거군요. 통속 소설 같은?”
그리고 정성국은 그런 정평국의 대답에 무척 만족해 웃음을 터트렸다.
전생에서도 혈의 누, 무정 같은 소설들이 신문에 연재되어 무척 인기를 끌었고, 이러한 신문 연재소설을 읽기 위해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하하. 그래. 그거야. 기존의 문학과는 달리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소설. 그런 게 있으면 사람들이 라디오 방송에만 빠지진 않겠지.”
“흠. 알겠습니다. 왕실의 후원을 받고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들과 접촉해 신문에 연재할 작품을 써줄 작가를 찾아봐야겠군요.”
“그래. 정 없으면 이쪽도 공모전을 열거나 투고를 받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정평국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성국은 품 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 정평국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리고...그림과 소설을 융합한 만화를 연재해보는 것도 괜찮을 거야.”
“...만화요?”
정평국은 생소한 단어에 고개를 갸웃하며 정평국이 건넨 종이를 확인했고.
종이에는 선으로 공간을 나누었고, 공간마다 간략한 그림과 글이 쓰여 있어 정평국은 이를 보고 이게 정성국이 말한 그림과 소설을 융합한 만화라는 것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흠. 삽화와는 또 다르군요.”
“차이가 있지.”
“헌데 뭡니까. 이 내용은.”
정성국이 건넨 종이에 그려진 만화는 곡식을 먹는 참새에 분통을 터트린 농부가 참새를 모두 잡자 메뚜기가 창궐해 농부를 망쳤다는 내용이었기에 정평국이 고개를 갸웃하자 정성국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함부로 생태계를 파괴하면 뒷감당이 어렵다는 교훈적인 내용이랄까?”
정성국의 말에 정평국이 의아한 표정으로 형을 바라보았다.
“정말 참새를 잡으면 문제가 생기는 겁니까?”
“아마 그럴걸?”
정성국이 전생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정평국은 종이를 품 안에 넣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생태계를 보호해야 한다는 기사와 함께 실으면 되겠군요.”
“아. 내가 그렸다는 건...”
정성국의 말에 정평국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물론 익명의 작가가 그렸다고 하지요.”